21화. 자존심 VS 자만심2020.05.10.
‘도대체 하루 사이에 무슨 수를 쓴 거지?’
황제 일행이 사라지자마자 부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타시르를 쳐다보았다. 방금 그거 보셨냐고, 제일 얌전한 멍멍이가 어디서 꼬리를 구해다가 흔들면서 황제랑 손잡고 걸어가고 있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부하는 하고 싶은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타시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흥미 가득한 시선으로 사라진 황제와 게스타 후궁의 흔적을 살피고 있어서.
“소단주님?”
타시르의 저 표정은 흥미 신경이 확실하게 자극받았을 때나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소단주님?”
부하는 괜히 불안해져서 타시르를 거듭 불렀다. 저 인간이 저런 표정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일들이 발생했더라…… 유쾌한 일들은 아니었다. 절대로.
“그러네.”
“예?”
“네 말이 맞다, 히얼란. 폐하의 눈에 들 방도를 찾아야겠어.”
타시르의 입꼬리가 히죽 재밌다는 듯 올라갔다.
“제일 얌전한 고양이라고 안심했더니. 주인 취향이 딱 그 고양이네?”
부하는 타시르의 표정을 불안하게 여기면서도, 타시르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 같은 태도를 보이자 기뻐하며 물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일단 네 말대로 꽃단장을 해야지.”
“네, 네. 그러고요?”
“폐하의 과거를 조사해 봐야지.”
“예?”
부하가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잘 나가다 왜 갑자기 스토커로 가십니까? 왜 꽃단장 다음이 뒷조사인데요?”
“폐하 취향을 먼저 알아봐야 할 거 같아서.”
“아. 취향.”
“또 하나 더. 폐하께 첫사랑이 여태 없었을 수도 있지만,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아?”
“첫사랑이 있다면 깨지셨단 걸 테고. 첫사랑이 누군지 찾으면 대충 어떤 스타일 좋아하시는지 나오고. 그러면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릴 수 있잖아?”
“되게 계산적이시네요. 최고입니다. 원래 하렘에선 머리를 잘 굴려야 하죠.”
“그렇지?”
히죽 웃은 타시르는 황제가 간 곳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돌아가자. 자세하게 계획을 짜 봐야겠다.”
* * * 하렘에 후궁들이 들어온 후 찾아온 두 번째 밤이었다. 클라인 황자는 전신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오늘 밤은 당연히 나에게 오시겠지.”
“그럴까요……?”
“당연하지 않으냐. 정치적인 이유로 첫날은 구렁이 같은 놈에게 가셨지만, 오늘은 나한테 오실 거다. 그분은 날 사랑하니까.”
참으로 밑도 끝도 근거도 없는 자신감이었으나, 시종은 깜빡 넘어갔다. 성격이 아주 지랄 맞긴 했지만, 클라인 황자의 외모만큼은 누구보다도 아름다웠으니까. 저런 미남이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때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시종은 그렇게 수긍했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황제는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자신만만하던 클라인의 입가에 초조한 기색이 찾아왔다.
“폐하께서 지금 어디에 있나 확인해 보아라. 빨리.”
클라인은 결국 가만히 기다리길 포기하고 시종의 등을 두드리며 채근했다.
“예, 나갑니다. 나가요.”
시종은 얼결에 황급히 복도로 나와서 잠시 막막히 서 있었다. 폐하 위치를 어떻게 알아내지? 고민 끝에 시종은 직접 돌아다니면서 찾기로 했다. 사실 그 수 밖에 없기도 하고. 그렇게 다른 후궁들의 방 근처를 일일이 돌아다니며 정찰을 한 결과, 시종은 알아차렸다. 황제가 두 번째 밤에는 누구도 찾지 않았다는 걸. 황제가 찾아오면 근위기사들이 방 주인의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데. 오늘은 그런 기사들이 없었던 것이었다.
“폐하께서는 오늘 아예 하렘에 오시지 않았답니다, 황자님.”
시종이 클라인에게 돌아와 이를 알리자, 클라인은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멍하니 벌렸다. 괴상한 냄새를 맡은 고양이 같은 모습이었다. 넋 나간 황자의 표정을 본 시종은 자기가 더 민망해서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 * * 누구의 방에도 찾아가지 않아 클라인을 놀라게 한 라틸은, 그날 밤 내내 방 안에서 일을 하며 밤을 새우고 있었다. 급히 내일까지 처리하고 싶은 안건이 발견되어서, 아예 빨리 해치워버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라틸은 새벽 다섯 시까지 책상 앞에 붙어 있다가 아침 해가 뜨는 걸 보고서야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러나 일어날 시간이 정해져 있기에 세 시간이 지나자 다시 눈을 떠야 했다. 부족한 잠에 머리며 어깨, 몸이 무거워졌지만, 라틸은 그래도 비척비척 일어나 간단하게 씻었다. 자주 입는 하얀 제복 차림을 하고서 머리카락은 하나로 올려 묶었다. 식사하기 전 ‘딱 30분만 더 자면 안 될까?’ 하는 충동이 잠시 올라왔으나, 라틸은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해 이 유혹도 참아냈다. 그런데 방문을 열고 나오니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라나문. 라나문 아트락시였다.
“라나문?”
라나문의 방문은, 클라인 황자가 의자를 가져다 두고 문앞에서 독서 하는 걸 보았을 때만큼 놀랍진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예상 외였고 놀라웠다. 얘는 클라인처럼 다짜고짜 밀고 들어오는 성격이 아닌데? 왜 아침부터 찾아온 거지? 라틸은 당황해서 그에게 다가갔다.
“왜 여기 이러고 있어?”
그러나 라나문은 가볍게 인사를 올리자마자 차가운 얼굴로 딱딱하게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침부터 기다리고 선 사람답지 않은 말투였으나, 라틸은 라나문이 원래 이런 성품이란 걸 알기에 태연히 무시하고 물었다.
“아침 식사했어?”
“안 먹었습니다.”
“같이 먹으면서 얘기하지. 나 지금 식당 가거든.”
라틸이 턱 끝으로 복도를 가리키자, 그 신호를 알아본 시종 하나가 먼저 식당으로 달려 내려갔다. 식당에 1인분을 더 준비해 두란 지시를 내리러 간 것이니, 라틸과 라나문이 그쪽에 도착할 때는 감쪽같이 테이블에 2인분이 차려져 있을 것이다. 라나문도 무척 급한 것처럼 말을 꺼내 놓고서는, 라틸이 함께 식사를 청하자 그건 또 거절하지 않았다. 게다가 할 말이 있다면서.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당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자, 짐작했던 대로 2인분의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고구마로 만든 샐러드와 부드러운 수프, 바삭하게 구운 빵이었다. 라틸은 자기 자리에 앉은 뒤 샐러드를 입에 넣으며 ‘말해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라나문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보내신 선물을 받았습니다.”
‘아. 어제 시종장이 첫날밤을 기념할 선물을 보낼 거라 했지.’
벌써 보낸 모양이다. 라틸은 그 선물이 뭔지도 모르지만, 일단 웃으면서 물었다.
“마음에 들어?”
그러나 돌아온 대답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왜 보내신 겁니까?”
라틸은 포크를 문 채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보냈냐니?”
“시종장의 전언으로는, 첫날밤을 보낸 걸 축하한다던데.”
“맞아.”
라나문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그는 잠시 라틸을 강렬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말했다.
“폐하께서도 아실 텐데요. 그날 밤, 폐하께서는 절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선물을 받는 게 부당하다는 거야?”
“예. 돌려드리겠습니다.”
자존심 덩어리라더니…… 진짜네.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넘어갈 텐데. 그걸 또 돌려주겠다며 찾아온 걸 보자, 아트락시 공작이 저 아들을 용케도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싶었다. 하지만 놀라운 건 놀라운 거고. 라틸은 일단 라나문의 거절을 대번에 거절했다.
“돌려줄 필요 없어.”
“저는…….”
“첫날밤을 어떻게 보냈든, 너는 내 남자잖아. 나는 내 남자에게 선물을 보낸 것뿐이고. 첫날밤을 보낸 기념으로 받기 싫다면 같이 손잡고 잔 기념이라 생각해. 그러면 되잖아?”
라나문은 전혀 아니라는 표정이지만, 라틸은 무르는 대신 딱 잘라 말했다.
“네 거야. 선물을 방 안에 쌓아두고 사용하지 않더라도 네 거라고.”
그 단호한 말에 라나문이 아까보다 훨씬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선물을 주시기 전에 폐하를 주실 마음은 없는 겁니까?”
라틸은 라나문만큼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직 없는데.”
“그러면 제가 드릴 테니 우선은 받기만 하시지요. 그건 됩니까?”
“무서워서 그것도 별로.”
“무섭다니요?”
“표정만 봐서는 주고 싶단 게 주먹인 것 같아서."
“…….”
“농담이야.”
라나문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라틸은 웃으면서 포크를 들어 올린 다음 그의 접시를 ‘팅’ 가볍게 내리쳤다.
“천천히 가자 천천히. 우리 아직 얼굴 제대로 맞댄 거 다섯 번도 안 된 거 알아?”
“……압니다.”
“그러니까. 평생 너 내 남자일 거잖아. 근데 뭐가 그리 급해?”
“!”
“천천히 가자.”
* * *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진짜 자존심이 엄청나네. 저 자존심으로 성을 쌓는다면 아주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겠어."
라나문이 나간 후 라틸은 혀를 차며 중얼거리다가, 서넛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턱에도 힘이 꽉 들어간 모습이, 웃음을 참으려는 듯 연신 입술에 힘을 주긴 주는데, 잘 주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서넛 경? 뭐 좋은 일 있습니까?”
그 사이에? 라틸이 어리둥절해 묻자, 서넛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호흡을 정리하더니, 아까처럼 웃음을 참는 표정이 아니라 가벼운 미소만 입가에 띠고서 라틸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게 더 수상해 보여서 라틸은 다시 캐물었다.
“좋은 일이 뭡니까? 좋은 일은 나누면 두 배라는데. 같이 들읍시다.”
“안 됩니다. 안 가르쳐드릴 겁니다.”
“아. 치사해.”
“제가 소중하게 간직한 이야기라, 쉽게 들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치사해.”
“이 정도는 치사해도 됩니다.”
더 캐묻고 싶지만 그건 지나치게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는 거겠지. 라틸은 서넛의 좋은 일이 무엇인지 아직 궁금했지만, 계속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공적인 질문으로 넘어갔다.
“알았어요. 그럼 편지 조사는? 그건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서넛도 좀 더 진지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혼자서 처리하다 보니 생각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렇죠.”
라틸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의 말을 수긍했다. 그럴 것이다. 기밀로 진행해야 하는 일인데, 그걸 완전히 혼자서 맡고 있으니. 수사는 아주 극히 예외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력을 많이 투입할수록 진행 속도가 빨라진다. 그런데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이 수사를 혼자서, 그것도 몰래 하고 있으니 속도가 나는 게 더 이상했다.
“내가 도와줄 건 없습니까?”
생각해보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라틸이 묻자, 서넛은 가볍게 대답했다.
“한 번 웃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누구한테요?”
“저한테요.”
“농담 말고. 진짜 도와줄 거 없습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말해요. 서넛 경이 빨리 조사를 끝내는 게 나한테도 좋으니까.”
“…….”
진짠데, 서넛은 작게 중얼거리면서도 라틸의 말에 수긍했는지 잠시 생각하다가 부탁했다.
“그러면 폐하께서 멜로시에 있을 때 ‘공식적’으로 받은 321통의 편지 말입니다. 그건 제가 확인할 수 없으니, 기밀이나 지나치게 사적인 내용을 빼고 ‘누구에게서 온 어떤 목적의 편지’란 것 정도만 적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관리자에게 받아온 목록과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 * * 반년 간 받았던 편지라지만, 한창 바쁜 시기였기 때문에 양이 어마어마했다. 라틸은 321통의 편지를 정리하다가 밤 11시가 되자 펜을 내려놓았다. 어제도 밤을 새우며 업무를 보았는데 오늘까지 온종일 일하려니 몹시 피곤했고, 자꾸만 다른 생각이 났다. 펜을 내려놓은 라틸은 괜히 서랍을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서류 속 초상화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거…….’
라틸은 초상화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후궁 지원 서류 때 함께 온 칼라인의 초상화였다.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 들인 유일한 후궁. 그 초상화는 다시 보아도 라틸을 혹하게 했다. 퇴폐적인 아름다움. 이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용병왕이 눈 돌아가게 잘생겼다더라’는 소문이 안 난 게 신기할 정도였다. 라틸은 칼라인을 그린 그림을 빤히 바라보다가 초상화를 서랍 안에 다시 넣었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와는 아직 한 번도 말을 섞어 본 적이 없지. 서약식 때 보긴 했지만 워낙 정신이 없었고 가까이에서는 보지도 못했다.
‘계속 궁금했는데. 어차피 오늘은 더 일하기도 글렀겠다, 한번 찾아가 볼까? ……그래. 찾아가자. 내 후궁이잖아.’
생각을 마치자마자 라틸은 얼른 가벼운 망토를 걸치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라틸이 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얼른 다가왔다.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폐하?”
“칼라인에게 찾아가겠다고 사람을 보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