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너로 할게2020.05.03.
“라나문한테 가겠습니다.”
라틸이 개인적인 호기심을 뒤로 한 결단을 내리자, 시종장은 대기하고 있던 다른 시종에게 무언의 눈짓을 했다. 시선을 받은 시종은 꾸벅 인사하고서 얼른 밖으로 튀어 나갔다. 아마 라나문에게 황제의 방문을 미리 알리러 갔을 것이다.
“후우…….”
라틸은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내뱉으면서 마른세수를 했다. 다시 긴장감이 몰려왔다. * * * 후궁들이 모여 사는 하렘은 좀 독특한 모양새로, 건물의 모양만 따지자면 커다란 도넛과 비슷했다. 그 도넛 안에 여러 개의 방과 복도 등이 있는 형식인데, 도넛 주위로는 화려한 정원이 둘러싸고 있고, 도넛 가운데의 그 뻥 뚫린 부분에는 커다란 수영장이 있었다.
“클라인 님의 요청으로, 라나문 님과 클라인 님의 방은 가장 멀게 배치하였습니다.”
“잘했습니다.”
간단하게 각 후궁의 숙소 위치를 설명한 시종장은, 라나문이 머무는 방 앞에 멈추어 서서 조용히 라틸을 보았다. 라틸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장은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라틸은 태연한 척 어깨를 쭉 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탕,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괜히 크게 느껴졌다. 후궁 침실과 복도 사이에는 중간 복도가 하나 더 있었다. 대신 안쪽 복도와 침실 사이에는 여닫는 문은 없고 아치문만 있는 형태였다. 그 아치문에는 보석으로 엮은 주렴이 달려 있었다. 한 손으로 주렴을 헤치고 들어가자, 낮에 본 예복 차림의 라나문이 보였다. 그는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지 약간 피곤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라틸이 들어오는 걸 보자, 당연히 라틸이 여기에 올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 한쪽이 차갑게 올라갔다.
‘어, 엄청 민망한데?’
그리고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라틸은 더 다가가지 못한 채 일순간 굳어버렸다. 급격하게 어색해지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내가 황제니까, 그래도 리드해야 하는 거 아닌가? 누우라 해야 하나? 이리 오라 해야 하나? 키스부터 해야 하나, 아니면 일단 대화부터 해야 하나? 근데 오늘 꼭 잠자리까지 가져야 하나?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거의 기계처럼 멈춰 있자니, 잠시 눈썹을 들어 올린 라나문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사정인지 알겠다는 듯, 그는 가볍게 웃고서 천천히 라틸에게 다가왔다.
“긴장되십니까, 폐하?”
다가온 라나문은 자연스럽게 라틸의 머리카락을 손빗으로 넘기며 물었다. 라틸은 라나문을 올려다보았다. 다른 영애들이 라나문의 미모를 칭송할 때에도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확실히. 이렇게 딱 얼굴을 붙이고 보니 아주 심장이 멎을 지경으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좀…….”
라틸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라나문은 라틸의 관자놀이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저도 그렇습니다.”
“하나도 안 떠는 것 같은데?”
“심장 소리를 들어보셔도 됩니다.”
라틸은 얼결에 라나문의 가슴에 귀를 기댔다. 키 차이가 크게 나는 덕에 바로 고개만 들이밀면 되었다. 하지만 예복을 겹겹이 껴입고 있는 터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 들려.”
라틸은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헉 숨을 소리 나게 들이쉬었다. 한 손으로 라나문이 그의 예복 한가운데 단추를 툭 툭 툭 가볍게 풀어버린 탓이었다. 완벽하게 잡힌 근육이 사이로 드러나면서 깨끗한 피부가 드러났다. 라틸은 약 3초 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라나문은 굳어 버린 라틸의 머리를 잡고 제 가슴 위로 누르며 속삭였다.
“이제 들리십니까?”
* * *
“클라인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느냐?”
하이신스 황제의 질문에 부하는 괜히 자기가 더 거북스러워져서 힘없이 대답했다.
“예, 폐하.”
하이신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서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내가 가자마자 편지를 보내라고 했는데, 그 망아지…….”
중얼거리는 하이신스의 이마에 힘줄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새로운 환경이니 적응하시느라 바쁜 게 아닐까요?”
부하는 클라인을 두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이신스를 달래기 위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러나 하이신스는 턱도 없다는 듯 코웃음만 쳤다.
“가출한답시고 유학생으로 신분을 위장해 적국 황궁에까지 들어갔다 온 녀석이, 적응?”
“그야…… 그땐 좀 어리셨고…….”
“적응은 두 시간에 다 끝냈을 거다.”
딱 잘라 말한 하이신스는 초조하게 옥좌 손잡이를 두드렸다. 툭 툭 툭 툭. 그가 강박증처럼 두드릴 때마다 불안한 소리가 커다란 홀을 울렸다. 가서 라틸은 만난 건지. 라틸이 괜히 자기에 대한 화풀이를 동생에게 한 건 아닌지. 동생을 괴롭히는 건 아닌지. 반대로 동생이 라틸을 괴롭히는 건 아닐지. 동생이 라틸과 너무 사이가 좋아져서 정말로 두 사람이…… 아니, 꼭 그 둘이 아니어도 지금쯤이면 후궁들이 서약식을 마치고 하렘에 들어갔을 터. 하이신스의 안색이 무섭게 구겨졌다.
“악시안을 불러와라.”
“부단장님을요?”
“그래. 클라인이 편지 쓰길 먼저 기다리다가 날이 다 새겠다.”
그러나 15분 후, 하이신스를 찾아온 건 악시안 부단장이 아니라 아이니 황후였다. 하이신스의 표정이 딱딱해지자, 부하는 황제와 황후의 눈치를 살피다가 눈치껏 먼저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하이신스는 부하가 빠져나가는 걸 알았지만, 굳이 붙잡는 대신 아이니를 향해 물었다. 부인을 대하는 목소리는 차갑고 매정했다. 아이니 역시 딱딱한 얼굴로 다가오며 말했다.
“폐하께서 저와 이혼을 준비하신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인가요?”
“몰라서 묻는 건가?”
“네. 폐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묻는 겁니다.”
하이신스는 헛웃음을 짓고는, 팔걸이에 한쪽 팔을 걸치며 물었다.
“왜 이래, 아이니. 어차피 알던 일이잖아. 내 옆에 심어놓은 첩자가 3년 전부터 내내 이야기해 줬을 텐데, 뭘 모르는 척이야?”
* * * 어깨 위가 무거웠고, 움직임은 답답했다. 코끝에서는 좋은 향이 감돌았다. 라틸은 멍하니 눈을 뜨다가, 눈앞의 깨끗한 피부를 보고서 눈을 끔뻑거렸다. 잠시 머리가 멍했다. 뒤늦게야 라틸은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으악.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라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침잠이 많은 건지, 라나문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잠든 상태로 내내 라틸을 꼭 끌어안고 있던 것이다. 라틸은 자신이 라나문의 팔을 베고 있던 걸 눈치채고서 슬쩍 머리를 뺐다.
‘아…… 이거 완전 부끄럽네.’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옆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일어나셨습니까?”
라틸은 힐긋 눈동자만 돌렸다. 라나문이 몸은 일으키지 않고서 라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나른한 태도는 어딘가 색정적인 면이 있어서, 라틸은 얼굴에서 열이 올라왔다.
“어. 으응.”
라나문은 웃지도 않은 채 손을 뻗어 라틸의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더니, 살며시 손을 내려 등을 쓸었다. 커다란 손이 얇은 옷 위를 쓰는 감각에 라틸은 놀라 정자세를 했다. 이번에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났다.
“으음. 어색하네.”
라틸이 중얼거리자, 라나문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자연스럽게 라틸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가볍게 입을 맞춘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씻고 가시겠습니까?”
같이. 들릴 듯 말 듯 덧붙인 소리에, 라틸은 벌떡 일어나며 고개를 저었다. 라나문은 다시 한번 웃는 듯 마는 듯 미약하게 웃고는, 라틸이 벗어 두었던 망토를 가져와 입는 걸 도와주었다. 살이 스칠 때마다 더욱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하이신스가 상대였다면 이러진 않았을 텐데.’
자신도 모르게 전 남자친구를 떠올린 라틸은 순간 자존심이 상했다.
‘젠장, 하이신스가 갑자기 여기서 왜 나와?’
똑같이 복수도 해 주었으니, 이젠 하이신스에 대해 잊어버려야 할 텐데. 아직도 그러지 못한다는 게 싫었다.
“오늘 밤도 오실 겁니까?”
다행히 라나문이 다음 질문을 꺼내면서, 라틸은 잠시 치솟은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
라틸은 놀라 라나문을 돌아보았다. 라나문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안 오실 겁니까?”
표정은 무덤덤한데 목소리는 좀 매서웠다.
“으음. 좀 바쁠 것 같아서.”
라틸이 대답을 듣자 표정도 무덤덤하지 않게 변했다. 반듯한 미간 사이가 약간 찡그려졌다.
“바쁘다, 도 아니고 바쁠 것 같다, 입니까? 혹시 ‘바쁘고 싶다’는 아니십니까?”
“!”
“오기 싫으신가 봅니다.”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린 라나문은 빗을 가져와 라틸의 머리카락을 살살 빗겨주었다. 손길은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분위기는 냉랭했다.
“아니, 정말로 바빠서.”
라틸은 부자연스럽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사실이었다. 정말로 바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렘에 남자들을 들이긴 했지만, 라틸은 월화수목금토일 후궁들을 돌아가며 방문할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가는 임신할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아기를 낳고 나면 몇 개월은 정무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으니까. 황제로서 후계자를 보는 게 꼭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지지기반을 완전히 잡아 두기 전까지 임신은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그렇다고 한 남자만- 그것도 공신의 아들인 라나문만을 대놓고 총애하면 하렘 내에서 서열이 확실하게 잡혀버릴 텐데. 그건 라틸이 원하는 구도가 아니었다.
“그렇습니까.”
그래도 하루 같이 침대를 써서 그런가. 원래도 차갑고 무뚝뚝한 녀석이긴 했지만, 좀 섭섭한 기색을 보이는 게 신경 쓰인다. 라틸은 라나문이 하나로 묶어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괜히 라나문의 옆모습을 곁눈질했다. * * * 라틸이 떠나자 복도에서 밤새 대기하고 있었던 그의 시종 카르둔이 들어와 욕실에 물을 받고, 그동안 라나문이 먹을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대부분의 귀족가에서 그러듯 라나문도 자신만의 유모를 두고 있었는데, 카르둔은 유모의 친아들이자 라나문의 유형제였다. 라나문으로서는 친형제들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인 데다 편했기에 일부러 데리고 들어온 것이었다. 식사가 다 차려지자, 카르둔은 라나문의 맞은편으로 가 앉으며 뿌듯하게 히죽댔다.
“짐작한 일이긴 했지만. 역시 다른 후궁들과는 게임이 안 되네요.”
“…….”
“두 명은 평민이고, 다른 한 명은 귀족이지만 행동거지가 나무늘보 같고. 클라인 황자가 신분이 높긴 하지만, 뭐 결국 겨뤄볼 것도 없는 문제였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지만 라나문은 별 대꾸 없이 가만히 수프에 대고 숟가락만 휘저었다. 생각보다 유쾌해 보이지 않는 행동에 카르둔은 의아해졌다. 열심히 책을 읽으며 공부하시더니. 성과가 없으셨나? 슬며시 걱정도 되었다. 그 걱정은 아침부터 찾아온 클라인 황자가 시비를 걸자 더욱 커졌다.
“오늘 하루 폐하의 성총을 받았다고 해서 자만하지 마라. 거울을 보면 알겠지만 너 같은 얼굴은 빨리 질리는 스타일이거든.”
“…….”
평소라면 단정하게 독설을 날려야 할 라나문이, 대꾸하는 대신 그냥 클라인 황자를 스쳐 나가버린 것이다. 클라인 본인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라나문을 돌아볼 지경이었다. 라나문을 따라 나온 카르둔은 자기가 다 답답하고 화가 나서 잔소리했다.
“아니, 도련님. 평소에는 말을 그리 잘하시더니 왜 이번에는 아무도 말도 안 하시는 겁니까!”
“…….”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걸 두고 보실 겁니까? 말로 이겨 먹는 건 도련님 전공이시잖아요. 예?”
그러나 라나문은 통 입을 열지 않았다. 인적 드문 곳까지 와서야 라나문은 간신히 털어놓았다.
“끝까지 가지 못했다.”
“뭐가 말입니까?”
“폐하와. ‘끝까지’ 가지 못했단 말이다.”
처음에는 라나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카르둔은 뒤늦게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그럼 밤새 뭐 하셨습니까?”
“잤지. ……끌어안고.”
“예? 공부하셨다면서요? 공부 열심히 하셨잖아요? ……그거!”
밤새 끌어안고 잠만 잘 거면 그 공부는 왜 그리 한 거냐고, 카르둔은 진심으로 갑갑해서 입을 뻥긋거렸다. 혹시 우리 도련님, 공부만 하고 소화는 못 시키는 타입이신가?
“폐하께서 원하지 않으셨다.”
유형제의 답답해하는 기색을 눈치 챈 라나문은, 차갑게 말하고서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어젯밤. 분위기는 제법 좋았다. 황제는 라나문을 상당히 이성적으로 의식하는 듯 보였다. 사랑스러운 반응이었다. 라나문은 심장 소리를 들려주는 걸 시작으로 해서 조금씩 조금씩 살이 닿는 부분을 늘려나갔다. 라나문은 원래 라틸에게 그리 관심이 크진 않았다. 정확히는 사람들 모두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니, 누군가와 닿는 것조차도 싫었다. 그래서 소위 ‘공부’를 하면서도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다. 내가 과연 이런 행동들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막상 실전에 닥치자 그런 생각들은 없어졌다. 그의 행동 하나에 숨결 하나에 말 한마디에 반응하는 황제의 모습은 책 내용을 잊게 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말랑한 피부는 부드러웠고, 축축한 머리카락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그는 황제 역시도 자신에게 같은 감동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침대에 눕자마자 황제는 “잠시만.” 하고 라나문을 밀어대더니, 피곤하다면서 그냥 자자고 했다. 그게 끝이었다. 책에 나온 화려하고 요란한 일들은 다른 세상 얘기였다. 라나문이 밤새 한 일은 그냥 인간 베개 겸 이불이었다.
“아…… 그래서 계속 표정이 그러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