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첫날밤은 누구와?2020.04.29.
라틸은 금색 술이 달린 하얀색의 예장을 갖추어 입은 채, 창문 너머로 궁전 아래를 확인하고는 혀를 찼다. 담벼락이며 대문 앞에 기자들이 거의 전투병력처럼 모여 있었다.
“와…….”
라틸은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했다.
“들어올 때 좀 힘들겠는데요?”
편지 도둑에 대한 수사와 틀라 황자가 끌어들이고자 했던 외국 세력에 대한 조사, 선황제의 암살범을 잡는 일 등이 지지부진한 가운데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새 후궁들이 정식으로 입궁하는 날이었다. 라틸은 ‘최초의 남성 하렘’이란 이유로 지나치게 세간의 주목이 쏠린 상황을 염려해서, 후궁들의 입궁을 축하하는 파티는 개최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후궁의 친지들만을 모은 서약식과 연회를 베풀기로 하고, 자세한 일정은 일부러 공개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후궁들이 정식으로 입궁하는 날짜가 되자, 온갖 기자며 구경꾼들이 저렇게 바글바글 궁전 앞에 모여든 것이다. 서넛은 좀 시큰둥한 태도로 대답했다.
“후궁이 초대한 손님들도 나갈 때 꽤 고생할 겁니다.”
라틸은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휙 서넛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넛의 말투가 ‘꼭 고생하길 바란다’처럼 들려서.
“왜 그러십니까?”
“방금 서넛 경…….”
그러나 막 질문하려는 찰나. 갑자기 밖에서 ‘우와아아’ 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라틸은 말을 멈추고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대번에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호화찬란한 마차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마차는 정문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엄청난 황금색 마차 뒤로는 하얀색의 마차 다섯 대가 연달아 따라오는데, 그걸 본 기자들이 무어라 무어라 소리쳐대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앙제스 어쩌고저쩌고하는 소리였다. 서넛도 소리를 들었는지 짤막하게 말했다.
“앙제스 상단에서 오는 건가 봅니다.”
“아, 타시르.”
라틸이 선 창문에서는 마차가 정문 안을 통과한 다음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제법 빠른 속도로 달렸는데도, 결국 가장 마지막 마차가 기자들에게 붙잡혀 들어오지 못하자 라틸은 휘파람을 불었다.
“와. 저 사람들, 간을 어디다 맡겨두고 오기라도 한 건가. 저걸 잡네.”
그 사이에 기자 중 몇 명은 아예 창문을 붙잡고 매달려 마차 안에 탄 사람에게 인터뷰를 시도하고 있었다.
“병사들을 더 투입할까요?”
그걸 보던 서넛이 물었다. 라틸은 그게 낫겠다고 말을 하려다가, 바로 마음을 바꿔서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될 것 같습니다.”
기자들에게 붙잡혀 있던 하얀 마차가, 새까만 말 무리가 나타나면서 풀려나고 있어서.
“두 번째 후궁 행렬이 왔습니다.”
라틸은 중얼거리면서 말 무리 쪽을 보다가 감탄사를 뱉었다.
“오. 멋지다. 흑사신단인가 봅니다.”
기자들이 제 발로 물러나게 한 말 군단은 아까의 화려하고 화사하던 마차 군단과는 분위기가 대조적이었다. 말 그대로 ‘흑과 백’처럼 위협적이었고 어두웠다. 후궁으로 오는 게 아니라 무슨 전쟁에 출정하는 모양새였다. 가장 앞의 커다란 흑마 위에는 용병왕으로 추정되는 까만 망토를 두른 남자가 있고, 그 뒤로 비슷한 차림이지만 다 같이 얼굴을 가린 부하들이 뒤따랐다.
“대열이 칼 같네요.”
아까는 달리던 하얀 마차에 매달리기까지 하던 기자들도, 아예 가장 앞줄에서 가는 용병왕은 붙잡을 용기가 안 나는지 다들 멀찍이 서서 쳐다보기만 했다. 이어서 세 번째로 들어온 마차는 아트락시 공작가의 마차였기에 알아보기 쉬웠다. 그다음은 재상가의 마차였지만, 공작가 마차와 재상가 마차는 용병들의 인상이 너무 강렬한 탓에 좀 묻히는 감이 있었다. 네 개의 집단이 모두 정문을 통과하는 걸 확인한 라틸은 창문에서 떨어졌다. 이제 라틸도 슬슬 대연회장으로 내려가야 할 때였다. * * *
“폐하께서는 가장 마지막에 입장하셔야 합니다.”
시종장의 당부에 따라 라틸은 대연회장 근처의 작은 방에서 거의 30여 분가량을 기다린 후에야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대연회장 상석으로 곧장 이어지는 작은 문을 통해 라틸이 나타나자, 떠들썩하던 홀이 완전히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손님들은 다섯 개의 무리로 나뉘여 자기들끼리 뭉쳐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확 갈렸네.’
옷깃조차 겹치지 않게 선 그들을 빠르게 둘러본 라틸은, 몇 개의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가장 상석의 단상 위에 섰다. 그 위에 서서 내려다보자, 단상 위 계단에서 대기 중이던 다섯 남자도 라틸을 동시에 쳐다보았다.
‘와. 엄청 쑥스러운데?’
저 다섯 명이 오늘부터 공식적으로 라틸의 남자가 될 최초의 남자 후궁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데려온 손님들. 그들 역시 눈에 불을 켜고서 라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라틸은 자신의 남자가 될 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보내는 시선을 받으며 머쓱해졌다. 대관식 날에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들을 보며 짜릿했는데. 어째 오늘은 좀…… 민망했다. 하지만 이런 건 민망한 티를 내면 더 민망해지는 법. 라틸은 얼굴을 두껍게 하고서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다섯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자리 배치 좀 봐.’
일부러 저렇게 갈라진 건지 아닌 건지는 모르겠지만, 클라인 황자가 가장 중심에 있었고, 그 오른쪽으로 귀족인 라나문과 게스타, 왼쪽으로 평민인 타시르와 칼라인이 서 있었다.
‘우선은 저렇게 패거리가 갈리려나…….’
귀족파와 평민파로 나누어져서 경쟁하는 건 별로인데. 그랬다간 후궁 간의 암투가 아니라 귀족 대 평민 간의 싸움으로 번져서 처리하기 곤란해질지도 모른다.
‘이 부분은 계속 지켜보자.’
탐색하면서도 라틸은 칼라인 쪽을 가장 유심히 살폈다. 다른 남자들은 그래도 최소 한 번 이상은 다 보았는데, 칼라인은 이번에 처음 보는 것이다보니 제일 관심이 갔다. 저 용병왕, 먹지도 마시지도 화장실에 가지도 않은 채 며칠을 버텼다더니. 다행히 그런 것치고는 당장 쓰러질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늘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답지 않게 피부가 창백한 걸 보면 의외로 병약한 것 같기도 했다.
‘용병왕은 용병왕인데, 용병왕이 되자마자 은퇴한 거 아냐?’
“폐하.”
라틸이 칼라인 쪽을 계속 보고만 있자, 서약식을 돕기 위해 다가온 시종장이 작게 라틸을 불렀다.
‘아차. 내가 너무 용병왕만 쳐다봤구나.’
착각일까. 손님들 역시 덩달아 용병왕을 같이 힐긋거리는 것 같다. 라틸은 진행하라고 시종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종장은 미리 들고 있던 서류를 단상 위에 설치된 높은 대 위에 올린 후 클라인을 불렀다.
“카리센에서 오신 클라인 황자 전하.”
클라인이 대 앞으로 나오자, 시종장은 두 손으로 깃털 펜을 공손히 받치며 설명했다.
“읽어보신 후 아래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클라인의 서명이 끝나자 시종은 라나문의 이름을 불렀고, 이번에는 라나문이 나서서 서명했다. 그렇게 다섯 명이 서명이 끝난 후, 라틸은 다섯 남자의 손에 미리 준비해 온 반지를 각기 끼워 주었다. 남자들은 라틸이 끼워 준 반지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영원한 충성과 사랑을 맹세한 뒤 물러났다.
“…….”
라틸은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의 후궁이 된 다섯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이제 진짜로, 진짜로 저 남자들은 자신의 하렘에 들어온다. 하렘 안에서 자신을 기다려주고, 자신을 위해 사랑을 속삭여줄 것이었다. 하이신스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 남자 중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없겠지.’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정략적으로 들어온 이들이니까. 라틸 역시 그들을 사랑해서 데려온 게 아니니까. 라틸이 원하는 건 그들의 암투일 뿐. 라틸은 그들이 하렘 내에서 경쟁하면서 귀족들과 국민들의 눈길을 끌어주길 원했다. 그들의 배경이 자신의 황권 강화에 도움이 되길 원했다.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저 남자들 역시 돈, 명예, 미래 등등 각자의 계산을 마친 후 이곳에 들어왔을 테니. 라틸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하긴. 진심 어린 사랑이 대수인가. 그 사랑이란 놈이 가장 먼저 뒤통수를 치고 떠났는데?
‘적어도 내가 황위에 머물러 있는 한, 이 사람들은 내 뒤통수를 치진 않겠지.’
* * * 이후로는 구성원들이 조금 독특할 뿐인 평범한 연회가 벌어졌다. 하지만 분위기는 아주 묘했는데, 우선 앙제스 상단에서 온 이들은 이 자리에서도 장사부터 하려 들었다. 라나문과 게스타의 손님으로 온 귀족들은 상단 평민들과 한자리에 앉는 걸 싫어하는 듯하면서도, 그들이 입을 놀려댈 때마다 제일 먼저 귀가 솔깃해져 빨려 들어갔다. 어느새 몇몇은 뭘 예약 주문이라도 한 건지, 식사하다 말고 수표에 서명을 해서 건네고 있고.
‘앙제스 상단 손님들, 입 놀리는 게 장난 아니잖아?’
앙제스 상단 손님들과 가장 정반대 분위기인 건 오히려 귀족들이 아니라 흑사신단 용병들이었다. 입장할 때 쓰고 온 가면은 다 벗었으나, 이들은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식사만 했다. 전에 선술집에서 보았을 때처럼. 카리센에서 온 귀족들은 입을 열긴 열었지만, 분위기가 어색한지 자기들끼리만 대화했다. 라틸은 시선을 돌려 아트락시 공작과 로르드 재상을 살폈다. 그들 사이에서도 이미 자기들만의 신경전이 벌어져 있었다. 반면 로르드 재상의 아들인 게스타는 완전히 기가 죽어서 고개조차 들지 못했고, 라나문은 게스타가 아닌 클라인 황자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타시르는 칼라인에게 낯빛이 시체 같다고 했다가 포크로 눈알이 찍힐 뻔했다. 식사를 마친 후.
“폐하, 어떠셨나요? 가까이에서 후궁들을 보니 마음에 드는 분이 계시나요?”
방으로 돌아온 라틸에게 유모가 소감을 물었고, 라틸은 며칠 전과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역시 게스타가 걱정이야.”
유모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도련님은 어린 시절부터 원체 조용하셨으니까요.”
“응. 간간이 잘 들여다 봐야 할 것 같아. 아니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형체도 안 남겠어.”
“어린 시절의 정도 있으니 폐하께서 어여쁘게 챙겨주세요.”
“그래야겠어.”
‘어린 시절의 정’이라 하기에는 그리 친하지 않았지만. 라틸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한 후 평소처럼 자신의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왔다. 그런데 욕실 밖으로 나와 보니 응접실에서 시종장이 기다리고 있다는 게 아닌가.
‘왜 시종장이?’
보통 황족 여자들은 시녀를, 황족 남자들은 시종만을 두지만, 라틸은 아버지의 시종들을 거의 그대로 데려온 탓에 시녀와 시종 모두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생활 수발을 시종들에게 맡길 수는 없었기에, 업무가 끝난 이후의 사적인 일과는 대부분 유모와 시녀들이 보필해주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시종장이 와 있다니? 자주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무슨 일 있어요?”
라틸은 덜 마른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고서 응접실로 나가며 물었다. 시종장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일이라니요? 오늘은 첫날이 아니십니까, 폐하.”
“네?”
첫날? 라틸이 어리둥절해 되묻자 시종장이 ‘어떻게 이걸 까먹으실 수 있냐’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후궁들이 입궁한 첫날이요. 그래도 한 명은 고르셔야지요. 다들 폐하의 은혜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내 은혜가- 아.”
라틸이 알아들은 듯 멋쩍은 표정을 짓자,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에게 가시겠습니까?”
이렇게 민망한 질문이 있을까. 라틸은 새삼 쑥스러워져서 목덜미를 문질렀다. 하지만 시종장은 물론 주위에 선 이들 모두 아주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라틸은 덩달아 신중해져서 생각에 잠겼다. 누구와 첫날밤을 보낸다…….
당장 생각나는 사람은 세 명이었다. 우선, 재상의 차남인 게스타. 남자로서 끌리는 건 아닌데. 너무 순한 성격이다 보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후궁들은 황제와 가까울수록 권위가 살아나니, 첫날에 찾아가 주는 게 좋지 않을까? 또 다른 신경 쓰이는 후궁은 칼라인이었다. 그는 게스타와 정반대의 의미로 신경 쓰이는 자였다. 개인적인 호기심과 흥미. 대화를 나누어보지 못한 유일한 남자여서 그럴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신경 쓰이는 이가 아트락시 공작의 장남인 라나문이었다. 정확히는 라나문이 아니라, 라나문의 뒤에서 단단히 골이 나 있을 아트락시 공작이 신경 쓰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라틸의 승리에 큰 도움을 준 공신이었으니까. 오늘만 해도 식사 하면서 몇 번이나 라틸에게 눈치를 주었던가.
“으음…….”
라틸은 팔짱을 낀 채 빙글빙글 방 안을 돌다가, 한참 만에야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