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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아버지의 연인에게 (16/367)

16화. 아버지의 연인에게2020.04.22.

라틸은 미간을 찡그리고서 기사를 보았다. 아낙차가 자신을 부른다는 게 귀찮았다. 아낙차가 닷새를 굶든 엿새를 굶든 무슨 상관이야? 라틸은 아버지의 후궁들 모두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관례에 따른 대우는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낙차는 라틸이 가장 싫어했던 사람이고, 틀라 황자의 일로 더욱 싫어하게 된 사람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서는, 그 사람은 굶어 죽는다 해도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피를 보는 것도 적당히 해야 하는 법이었다. 이미 이복오빠인 틀라를 망설임 없이 죽여버린 일로 다들 한 번 기겁했다. 아직은 그 약발이 남아 있으니, 굳이 매몰찬 인상을 주면서 그 어미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다. 죽이는 건 언제든 은밀하게 해도 되니까.

16551068996607.png“좋아. 가보지.”

  * * * 라틸이 기억하는 아낙차 후궁의 첫 모습은 ‘화려하다’였다. 그녀는 어머니인 황후보다 더욱 커다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했고, 머리에는 우아한 왕관을 낀 채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있던 화사한 여자였다. 아낙차는 만개한 벚꽃처럼 아버지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아버지는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었고, 그 옆에 앉은 쪼그만 꼬맹이는 낚시를 가자며 칭얼거렸다. 라틸은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여자는 왜 내 아바마마의 옆에 안겨 있지? 아바마마는 왜 어마마마를 여기에 두고 저쪽에 있지? 당시엔 너무 어려서 화가 나기보다는 이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어머니는 소풍이 끝나고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두 번째로 기억하는 아낙차는 화를 내고 있었다. 라틸에게 오빠는 레안 하나뿐인데, 어느 날. 듣도 보도 못한 꼬맹이가 와서 자기가 라틸의 오빠라며 뻐겼다. 그러고는 라틸이 자신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충고했고, 라틸은 무엄하다며 그 꼬맹이의 정강이를 차버렸다. 꼬맹이는 엉엉 울면서 제 엄마를 찾았다. 찌질한 새끼라고 다시 발로 차버리려 할 때, 아낙차가 달려왔다.

16551068996613.jpg“어쩌면 성질머리가 황후 폐하를 아주 쏙 빼닮으셨군요! 고약해! 지독해! 나이도 어린 게 참으로 못됐습니다!”

아낙차 후궁은 날카롭게 소리치면서 라틸을 떠밀었다. 라틸이 뒤로 밀려나 연못에 빠지자 그녀는 잠시 당황하는 듯했지만, 곧 제 아들만 챙겨 가버렸다.

16551068996613.jpg“누구냐. 감히 누가 널 떠밀었느냐.”

흠뻑 젖은 옷을 보고 화를 내는 어머니에게, 라틸은 아낙차가 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었더라도 그녀의 이름을 몰랐기에 말하지 못했겠지만. 어쨌든 라틸은 침묵을 선택했다. 어머니가 속상할까 봐. 대신 그녀가 퍽 아끼는 듯하던 꼬맹이, 자기가 라틸의 오빠라 주장하는 꼬맹이의 정강이를, 다시 만났을 때 더 세게 세 대 차버리고 튀었다. 세 번째로 만났을 때, 아낙차는 라틸을 거의 씹어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매서운 시선을 보며 라틸은 그녀를 마주한 이래 처음으로 웃었다. 어머니를 울게 한 여자는, 웃고 있는 것보단 저렇게 일그러지는 게 더 어울렸다.

16551068996607.png“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도 나고 그러네요.”

그리고 지금. 아낙차는 꼭 그때처럼 라틸을 노려보고 있었다. 라틸은 뒷짐을 진 채 입꼬리를 올리고서 철창살 너머의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오라고 할 때는 귀찮았는데. 와보니 오길 잘한 것 같다. 이렇게 통쾌할 수가 있을까. 어머니가 신전에 들어가지 않으셨다면 좋았을걸. 라틸은 새삼 아쉬워하다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어머니도 아낙차가 몰락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할 테니까. 이 꼴을 어머니에게 구경시켜 드리면 더욱 좋아하시지 않을까? 라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때로는 침묵과 표정이 더욱 살벌한 분위기를 전해주는 법이었다. 아낙차는 입술을 악물며 험악하게 과거를 회상했다.

16551068996613.jpg“전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영악하고 못된 아이셨죠. 네. 저도 옛날 생각이 납니다.”

16551068996607.png“전하가 아니라 폐하. 지칭을 고치셔야죠.”

16551068996613.jpg“제게 있어 폐하는 단 두 분뿐입니다. 내 남편과 내 아들!”

라틸은 한쪽 입꼬리를 히죽 올렸다.

16551068996607.png“이 자리에 오르면 꽤 너그러워지는 모양입니다.”

16551068996613.jpg“?”

16551068996607.png“예전엔 당신이 미운 말을 할 때마다 너무 화가 났는데. 지금은 뭐…… 그냥 발버둥 치는 거로 보이네요.”

아낙차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며 라틸은 더욱 통쾌해서 웃었다. 사실 객관적으로는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려 들면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자식은 틀라였고, 황후의 자녀들은 틀라의 경쟁자였다. 그리고 사랑을 건 경쟁에서 그녀는 언제나 승리했다. 하지만 황위를 건 경쟁에서 그녀의 아들은 패배했다. 그 대가로 20년 넘게 호화로운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 탑에 유폐되었으니, 아낙차는 지금 라틸이 아주 못마땅해 죽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과 그녀의 입장을 받아들여 주는 건 별개였다.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 아닌가? 황위를 쟁취한 게 틀라였다면, 아낙차 역시 황후와 라틸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테니까. 어쨌든 패배한 적과 실랑이를 하는 것도 우스운지라, 라틸은 그녀를 더 긁는 대신 거만하게 물었다.

16551068996607.png“그래. 날 왜 보자고 한 겁니까?”

그 질문을 듣자, 아까까지만 해도 매섭던 아낙차가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도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16551068996613.jpg“내 아들…… 내 아들은 지금 어디 있지요?”

응? 아직 모르나? 라틸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물론 처형을 명령하는 장소에 아낙차가 있진 않았다. 처음에는 틀라도 감옥에 갇혔고, 이후 처형되었으니. 시간상 아낙차는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끌려가 갇혔긴 했을 거다. 하지만 한 달이 넘게 지났으니 간수라던가 누군가 전해주었을 줄 알았는데. 힐긋 그녀를 담당하는 근위기사를 쳐다보자, 기사가 푹 고개를 숙였다. 라틸은 다시 아낙차를 보았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라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16551068996607.png“음…….”

라틸은 잠시 고민했다. 뭐라고 말할까. 사실 아낙차는 앞으로 평생 여기에 갇혀 살아야 하니,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거짓말을 해도 상관은 없다. 라틸이 틀라가 살아 있다 알려준다면, 그녀는 언젠가 아들이 라틸을 죽이고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 믿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16551068996607.png‘마음을 편하게 해줄까 말까? 말하지 말까?’

16551068996607.png“당신 아들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라틸은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길을 선택했다.

16551068996607.png“내가, 처형시키라 명령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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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볍게 웃으며 말해주자, 아낙차의 얼굴이 얼음물에 불시에 빠진 것처럼 변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라틸을 쳐다보았다. 파란 입술이 부들부들 질리더니 서서히 얼굴빛이 하얘졌다.

16551068996613.jpg“그, 그런…… 그럴 리가! 틀라는 네 오빠야!”

16551068996607.png“당신 아들이죠.”

16551068996613.jpg“!”

16551068996607.png“날 죽이려고 했고.”

16551068996613.jpg“그건…….”

16551068996607.png“내 것을 빼앗으려 했고.”

16551068996613.jpg“이…….”

16551068996607.png“내 어머니를 울렸고.”

16551068996613.jpg“못된 것!”

충격 다음은 분노였다. 아낙차 후궁은 번개처럼 찢어지듯 외치며 창살을 움켜잡았다.

16551068996613.jpg“제 형제도 몰라보는 것, 틀라가 황제가 되었더라면 널 죽이진 않았을 거다!”

16551068996607.png“외세를 끌어들이면서까지 황제 자리를 노린 틀라가, 평생 가시가 될 나를 내버려 뒀을 거라고요?”

16551068996613.jpg“틀라는 너 같이 냉혈한이 아니야!”

16551068996607.png“어휴, 나도 우리 엄마한텐 냉혈한 아니에요.”

말이 끝나자마자 퉤, 아낙차가 침을 뱉었다. 라틸의 얼굴에 그녀의 침이 튀었다. 주위에 있던 이들이 동시에 몸을 움찔했다.

16551068996607.png“아…….”

라틸이 손을 내밀자 서넛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라틸은 그걸로 얼굴에 묻은 침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16551068996607.png“점점 인내심 빠지게 하시네.”

서넛은 위협적으로 검을 빼 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철창살 사이로 집어넣어 아낙차 의 목 밑에 가져다 댔다.

16551068996613.jpg“이 배신자! 넌 폐하의 기사이면서, 어떻게 폐하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을 죽이는 데 일조하지? 넌 반역자다! 넌 간신이야!”

아낙차는 서넛을 향해서도 버럭 외쳤으나, 서넛은 무표정했다. 그걸 본 라틸은 나른하게 웃으면서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듯 속삭였다.

16551068996607.png“됐습니다, 서넛 경. 죽여도 칼로 죽이면 안 되죠.”

라틸의 손짓에 서넛이 바로 검을 집어넣었다. 아낙차는 검이 닿을 수 없는 거리로 뒷걸음쳐 물러났으나, 라틸이 남긴 섬뜩한 말은 피하지 못했다.

16551068996607.png“뭐. 어쨌든 물어볼 말이 그거뿐이었다면 가겠습니다.”

16551068996613.jpg“이 냉혈하고 악독한…….”

16551068996607.png“네에. 저 못돼 처먹었습니다. 그래서 그쪽이 단식 투쟁하다 굶어 죽더라도 상관 안 합니다. 그러니 앞으론 쓸데없는 짓 하지마요.”

손을 휘휘 저은 라틸은 그대로 돌아섰다.

16551068996613.jpg“지금은 네가 이긴 것 같지?”

협박도 애원도 통하지 않자 조용해진 아낙차는, 라틸이 막 감옥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다시 소리쳤다. 라틸은 발 한짝을 복도에 걸친 채 고개만 돌려 아낙차 후궁을 보았다. 그녀는 철창살을 꽉 잡고서, 꿈에 나올까 무시무시한 눈으로 라틸을 노려보고 있었다.

16551068996613.jpg“하지만 아니다. 라트라실. 이 악독하고 못된 냉혈한 악마야, 너는 가장 소중한 이에게 배신당하게 될 거다! 네가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이어서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깔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들이 처형당했다는 충격이 생각보다 큰 듯했다.

16551068996613.jpg“난 저주를 퍼붓는 게 아니야. 미친 것도 아니지. 내 말은 모두 사실이다. 나중에, 나중에 그날이 오면 너도 내가 한 말이 떠오를 거다!”

  * * * 싫어하는 사람의 침을 얼굴에 맞은 데다, 시퍼렇게 눈을 부릅뜨고 퍼붓는 저주를 들었다. 두렵진 않으나 입맛이 뚝 떨어져서, 라틸은 저녁 식사를 포기하고 침실로 돌아갔다. 서넛은 걱정이 되는지 굳이 침실까지 따라 들어와서는, 불안한 눈으로 라틸을 바라보다 물었다.

16551069117737.png“괜찮으십니까?”

라틸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16551068996607.png“되게 의미심장하게 말했잖습니까. 좀 찝찝하긴 합니다.”

16551069117737.png“폐하를 기분 나쁘게 만들려 한 말입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16551068996607.png“물론 단순 악담일 수도 있긴 한데…….”

라틸은 허리에 찬 검을 풀어 침대 위에 내려놓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16551068996607.png“아직 편지 도둑과 암살범이 잡히지 않았잖습니까. 좀 신경 쓰입니다.”

딱 이 두 개만 아니었어도 악담을 들으면서 오히려 더 놀려줄 수 있는데. 이 두 개가 앞뒤로 걸려서 떠름했다. 라틸의 말에 서넛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16551069117737.png“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빨리 멜로시에서 가져온 장부를 다 확인해야겠습니다.”

16551068996607.png“같이 할까요?”

16551069117737.png“폐하와 함께하는 야근은 제게는 기쁜 일입니다만.”

16551068996607.png“다만?”

16551069117737.png“폐하를 야근하게 했다간 시종장이 제 목을 꺾어버리고 싶어 할 겁니다.”

시종장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어서 라틸은 웃음을 터트렸다.

16551068996607.png“그건 그러네요.”

그러나 웃고 있어도 여전히 기분은 개운하지 않았다. 창살을 붙잡고 눈을 빛내던 그 흉흉한 아낙차의 눈빛이 불쾌하게 뇌리에 남아버린 것이다.

16551068996607.png“서넛 경. 아낙차에 대한 감시도 늘려주세요. 신원이 확실한 이들로 여러 명이 동시에 감시해야 합니다.”

16551069117737.png“예.”

두 번째 명령을 내린 라틸은 그 후로도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 말했다.

16551068996607.png“그리고 내일, 잠행을 나가 봐야겠습니다.”

16551069117737.png“잠행이라니요?”

16551068996607.png“친하진 않지만 게스타야 그래도 어떤 사람인지 알지 않습니까. 하지만 상인인 타시르나 용병왕 칼라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잖아요.”

16551069117737.png“설마…….”

서넛의 얼굴이 굳었다.

16551069117737.png“예비 후궁들을 만나보실 생각이십니까? 직접?”

16551068996607.png“직접 만나든 옆에서 지켜보든, 일단 후궁으로 들어오기 전에 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라틸의 남자가 될 이들이었다. 어쩌면 라틸과 한 침대에 누울 지도 모르는 이들. 아무리 강한 근위기사들을 곁에 두어도, 그들이 기사로 있는 이상 절대 접근하지 못할 거리가 있는 법. 그러나 후궁들은 그 범위 안으로 훌쩍 들어와, 단둘만 있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들이었다.

16551068996607.png“미리 내 사람이 되기 전에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아낙차를 보고 나니 미리 판단해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인지, 후궁으로 들여도 될지, 도움이 될지 위험이 될지…….”

라틸은 무의식중에 높게 묶었던 머리카락도 풀다가, 뒤늦게 서넛이 아직 옆에 있단 걸 떠올리고서 어색하게 웃었다.

16551068996607.png“아. 맞다, 서넛 경.”

16551069117737.png“제가 풀어드릴까요?”

16551068996607.png“아니, 그보다 손수건. 어쩔까요. 아낙차가 침 뱉은 거.”

16551069117737.png“!”

16551068996607.png“돌려……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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