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시건방진 족제비2020.04.19.
제발 그렇다고 해라, 제발 그렇다고 해! 아니면 너무 화가 날 것 같다.
“…….”
라나문은 무심한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트락시 공작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히 있는 걸 보니 무슨 말을 하긴 했구나.
‘하긴, 저 성격에 막말을 듣고서 가만히 있을 리가 있나.’
황자라고는 하지만 곧 같은 후궁이 될 처지였다. 예비 후궁들끼리 싸워댄다고 한들, 국가 문제로까지 비화할 가능성은 적다. 그렇다면 크게 문제 되지 않을 선에서 기선을 미리 제압하고 오는 게 좋았다. 미래를 위해서도. 마침내 방 앞에 도착한 라나문은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멈춰섰다. 그리고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님 말씀대로 여우 같은 놈이더군요.”
“그래, 그렇다니까.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라나문.”
“그자는 제가 국서가 되자마자 쫓아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아트락시 공작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 라나문. 네가 클라인 황자에게 무어라 했는지는 정말 안 알려줄 게냐?”
* * *
“무식한 외국인? 나라 말아 먹을 상이라고?”
클라인은 베개를 퍽 내리치며 이를 갈았다.
“어디서 시건방진 쪽제비 같은 새끼가……!”
그가 씩씩거리는 걸 보며, 카리센에서부터 클라인을 따라온 수행원이 걱정스레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한 겁니까, 전하?”
“그래. 아주 눈 똑바로 뜨고서 재수 없는 목소리로 말하더라.”
클라인은 자꾸 귀찮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핀으로 고정해 놓고서는,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침대에서 물고기처럼 팔딱거렸다.
“그딴 것과 같은 곳에서 살아야 한다니! 그런 시건방진 놈과!”
수행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몇 마디 나누었다고 벌써 저렇게 난리를 부리는데. 과연 반년간 조용하게 지낼 수 있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한 무더기였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다행이라니! 그 시건방진 놈이 날 모욕하고 갔는데, 다행이라니! 나라 말아 먹을 상이라는 소릴 들었는데 다행이라니!”
“전하께서 잘 참으셨지 않습니까.”
“…….”
“한 달 전이었으면 바로 주먹이 날아갔을 텐데. 꾹 참으셨다니, 참으로 의젓해지셨습니다.”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고서 손을 저었다.
“아부해도 소용없다.”
아부가 아니라 진심 어린 안도였으나, 수행원은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카리센에서 출발한 이후부터 내내 그의 지랄 맞은 성미가 언제 터질까 봐 불안했단 이야기를, 본인 앞에 대고 할 수는 없었다.
“하렘에서 함께 지내시더라도 방은 다르니까요. 시종장에게, 오늘 라나문 경과 클라인 전하께서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단 걸 알리고, 최대한 먼 방으로 배정해 달라 부탁하겠습니다.”
“그래라.”
클라인은 힘없이 대답하고서 베개를 끌어안은 채 이를 갈았다.
“어쨌든 그 쪽제비 같은 놈. 두고보라지. 내가 국서가 되자마자 홀딱 벗겨서 맨몸으로 쫓아낼 테니.”
* * * 클라인과 라나문이 각기 비슷한 미래를 각오하는 그 시각. 편지 도둑에 대해 알아내라는 라틸의 밀명을 받은 서넛 기사단장은, 아버지가 영주로 있는 멜로시에 와 있었다. 틀라 황자가 불법으로 궁을 점령한 반년간 라틸은 멜로시 영지에 머물렀는데, 이 기간에도 편지가 유실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515년 중순부터 말에 작성된 편지들 말씀이시지요?”
“황제 폐하, 그러니까, 당시에는 라트라실 황태녀님 앞으로 온 편지들이다.”
성에서 일하는 관리는 커다란 상자와 촘촘한 장부 등을 꺼내어 이것저것 확인한 후 말했다.
“보자…… 라트라실 폐하께 전달된 편지가 321통, 그리고 ‘검열’을 통해서 가려진 편지가 125통이 있습니다.”
“검열?”
“네. 검열한 건 중요 인장이 찍혀 있지 않은 편지들이고, 정식으로 작성되어 온 편지들, 외국 황실이나 나라 인장으로 보내온 편지들은 모두 검열하지 않았습니다.”
“검열한 게 누구지?”
“접니다.”
관리는 머쓱하게 손을 들었다.
“물론 이 부분은 미리 허락을 받았습니다.”
“무슨 내용이었나?”
“혹시 몰라서 최소한도로만 검열하였습니다. 전하, 아니, 폐하께 전달하지 않은 편지는 모두 다 틀라 황자를 지지하는 자들이 보낸 모욕적인 편지였지요. 그런 걸 폐하께 읽으시라 전달할 수는 없잖습니까.”
관리는 다른 쪽 칸막이로 가더니 굵직한 서류철을 가지고 왔다.
“그런 편지를 보낸 자들은 대부분 익명이나 가명을 사용했지만, 때로는 미친놈들이 대놓고 자기 이름을 걸고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익명이든 아니든, 우선 그런 편지를 보낸 자들에 대해서는 모두 수사가 들어갔고요.”
서류철 안에는 편지를 보낸 이들의 목록과 편지, 그리고 그들을 수사한 내용 등이 들어 있었다. 빈 공간이 드문드문 있는 거로 보아 완전히 조사가 끝난 사안은 아닌 모양이었다. 서넛은 파일을 덮으며 지시했다.
“이게 125통 전부는 아니겠지. 검열된 편지 125통 모두와 발신인으로 추정된 이들의 목록, 수사 일지, 관련 장부, 그리고 ‘검열되지 않고 전달한’ 321통의 편지에 대한 서류도 모두 내 방으로 가져오게.”
우선 들고 있던 서류철과 상자만을 챙긴 채 서넛은 지하실을 올라왔다. 그런데 막 그의 방으로 가려는 서넛을 멜로시 영주가 불렀다.
“서넛 님.”
서넛이 돌아보자 멜로시 영주가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잠깐 시간이 괜찮으십니까?”
서넛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아버님?”
“……좀 사적인 이야기입니다.”
“괜찮습니다.”
서넛이 괜찮다는 데도 멜로시 영주는 쉽게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래도 서넛이 참을성 있게 기다리자, 멜로시 영주는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서넛 님은 옛날부터 황제 폐하를 좋아하지 않으셨습니까.”
설마 아버지가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 몰랐던지라, 서넛의 표정은 돌처럼 굳었다.
“얼마 있지 않으면 정식으로 폐하의 후궁들이 들어올 거고, 폐하의 성총을 받을 겁니다. 서넛 님은 기사단장이니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멜로시 영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넛을 바라보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저는…….”
서넛은 말끝을 흐렸다. 표정 역시 흐려졌다. 하지만 곧이어 흘러나온 건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폐하께 기쁨을 주는 남자가 아니라 안정을 주는 남자이고 싶습니다.”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렸으나 서넛의 낯빛은 그리 밝지 못했다.
“다른 자들이 후궁에 틀어박혀 폐하를 기다리는 동안, 전 폐하의 곁에서 그분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거면 됩니다. 이게 제 사랑의 형태입니다.”
멜로시 영주는 입을 뻐끔거렸다. 만족할 수도 있겠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면서 행복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황제가 다른 남자를 품는 걸 지켜보는 건 고통스러울 터였다. 게다가 현재 정해진 후궁 숫자만 다섯 명이다. 그 숫자가 더 늘어날 가능성도 높았다. 그 남자들이 라트라실 황제의 옆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애정을 받고 총애를 구하는 동안, 과연 사랑을 누른 채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괴로울 것이다. 아주 많이. 하지만 이미 굳게 결심한 아들에게 무어라 하겠는가. 멜로시 영주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넛 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니, 제가 이래라저래라 참견할 수는 없겠지요. 그저, 너무 아파하시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 * 유독 안개가 자욱한 아침이었다. 라틸은 비몽사몽 한 채 식당으로 가 아침 식사를 한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와 옷을 입으며 물었다.
“서넛 경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어?”
유모는 라틸의 제복에 금색 술을 달지 은색 술을 달지 빨간 술을 달지 대어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휴가를 갔으니 푹 쉬다 오겠지요. 내내 고생했잖아요.”
휴가 간 거 아닌데. 라틸이 내린 밀명을 수행하기 위해, 잠시 멜로시에 조사하러 다녀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라틸은 “그렇지.” 하고 대답하면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모에게 거짓말을 하려니 미안했지만, 밀명은 비밀을 엄수해야 하기에 밀명이었다. 유모를 믿고 신뢰하지만,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법. 게다가 라틸은 편지 도둑이 어쩌면 아버지나 유모처럼 아주 가까운 사람일지 모른단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이신스와 라틸의 관계를 알 테니, 라틸을 위해 ‘좋은 의도’로 편지를 숨겼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 되었든 유모에게 거짓말을 한 건 사실인지라, 라틸은 멋쩍어져서 괜히 유모를 한 번 꼭 끌어 안아준 후 알현실로 내려갔다. 서넛 기사단장이 돌아온 건 업무가 거의 끝나가는 오후 다섯 시 경이었다. 라틸은 국방부, 재무부의 장관들과 군비에 관한 의논을 하던 중이었기에, 바로 그를 만나보지는 못했다. 두 장관은 거의 30분가량을 더 이야기한 후에야 물러났고, 라틸은 그제야 서넛 기사단장을 불렀다.
“서넛 경!”
라틸은 서넛 기사단장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면서 다가갔다.
“일은 잘 해결됐습니까?”
“조사할거리만 한가득 가져왔습니다.”
“오가면서 힘든 일은 없었고요?”
“보고 싶어서 조금 힘들었습니다.”
서넛 기사단장이 짓궂은 표정으로 하는 말에, 라틸은 낄낄 웃고는 시종장에게 ‘그 서류’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 서류라니요?”
“제 예비 후궁 명단입니다. 다섯 명을 다 골랐거든요. 서넛 경한텐 미리 보여주겠습니다.”
라틸은 테이블 앞으로 가 앉고는 서넛 기사단장에게도 여기 와 앉으라며 대각선 옆자리를 가리켰다. 서넛 기사단장이 굳은 얼굴로 와 앉자, 라틸은 두 손을 깍지낀 채 기대하라며 히죽 웃었다. 잠시 후 시종장이 두툼한 서류를 가져와 라틸의 앞에 놓았다.
“아, 클라인 황자는 지원을 받아서 들어오는 게 아니라 따로 서류가 있진 않습니다.”
라틸은 간단하게 설명하고서 서넛 기사단장의 앞에 네 장의 인물 프로필을 늘어놓았다.
“이쪽이 아트락시 공작의 장남인 라나문.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이 로르드 재상 차남인 게스타. 여기가 앙제스 상단 후계자인 타시르, 다른 한 명이 누군지 알겠습니까?”
라틸은 신이 나서 히죽거렸다.
“칼라인입니다. 그 용병왕 칼라인이요.”
“……”
서넛은 굳은 얼굴로 하나같이 수려한 남자들의 초상화를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아주 종류별로 다 고르셨습니다.”
“잘 고른 것 같습니까?”
“다양성에 초점을 둔다면 잘 고르셨습니다.”
“인상이 나쁜 남자는 안 보입니까? 남자끼리 보이는 그런 거요.”
“죄다 나쁩니다.”
“……정말?”
그 정도야? 별로 안 그래 보이는데? 라틸이 고개를 갸웃하며 초상화들을 살피자,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시종장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폐하. 후궁 후보들을 열흘 후 입궁시키는 게 어떨까 합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열흘요? 괜찮을까요?”
너무 짧은 기간이 아닌가 싶어 라틸이 묻자, 시종장이 대답했다.
“서류를 제출하면서 다 근방에 머무르고 있는 거로 압니다.”
라틸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서 그러라고 대답했다. 시종장이 서류를 도로 챙겨 나가자 라틸은 괜히 긴장되어서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몇 년 전에는 한 남자와의 결혼을 꿈꾸던 내가 지금은 다섯 명의 남자를 후궁으로 두게 된다니…….’
하렘 선언을 한 다음 날 느낀 그 묘한 기분이 다시금 닥쳐왔다. 라틸은 입술을 괜히 잘근잘근 깨물다가 고개를 돌리며 서넛 기사단장을 보았다. 그는 평소처럼 가볍게 웃는 낯으로 라틸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라틸은 두 손을 깍지 껴 테이블 위에 모으고서, 그 위로 상체를 숙이면서 히죽히죽 장난스럽게 질문했다.
“서넛 경. 지금쯤 하이신스 속이 좀 어떨까요? 뒤집어졌을까요?”
하지만 이 장난 같은 질문 속에 숨은 건 진심이었다. 라틸은 정말 아주 많이 원했다. 하이신스가 지금 아주 분해서 미쳐 죽기 직전이기를. 서넛 기사단장은 덤덤하게 웃으며 확신했다.
“물론입니다.”
“그렇겠죠? 그런데 자기 동생을 보낸 걸 보면 멀쩡한 것 같기도 합니다.”
‘또라이로 골라 보낸 걸 보면 멀쩡하다 못해 이성적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서넛 기사단장은 이번에도 고분고분하지만 확실한 어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완전히 뒤집어졌을 겁니다.”
그리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하게 덧붙였다.
“제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말 속에 어린 희미한 슬픔을 라틸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면 다행이지만요.”
한숨을 내쉰 라틸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한 번 더 한숨을 내쉬고서 일어섰다.
“그보다 저녁 먹었습니까? 안 먹었으면 같이 먹죠.”
* * * 라틸이 서넛 기사단장을 데리고서 긴 회랑을 지나 식당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선황제의 후궁이자 틀라 황자의 어머니인 아낙차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기사가 급히 라틸 쪽으로 달려왔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멈춰선 기사는 노래진 얼굴로 보고했다.
“폐하, 아낙차 님이 음식 먹기를 거부하며 폐하를 불러오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낙차는 라틸이 황궁을 탈환한 지 일주일 후에 바로 탑에 유폐되었고, 이후 라틸은 그녀를 따로 만난 적이 없었다. 라틸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말라 해라.”
그리고는 시원스레 지나가려는 라틸에게, 기사가 급히 덧붙였다.
“닷새째입니다. 닷새째 음식을 먹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