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꼬리가 열두 개 달린 여우2020.04.15.
진짜로 급히 할 말 있어서 온 거 맞아? 클라인 황자와 술 마시는 걸 막으러 온 거 아냐? 타이밍이 교묘하다 보니, 라틸은 아트락시 공작을 따라가면서도 의심했다. 그러나 의외로 그가 전한 소식은 정말로 급하고 중요한 사안이었다.
“폐하. 틀라 황자가 폐하께 대응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던 정황이 발견되었습니다.”
“외국 세력을?”
라틸은 놀라서 날카롭게 외쳤다.
“어느 나라를?”
“정확히 어느 국가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접국들은 폐하를 지지했고, 카리센에선 바로 황자를 후궁으로 보내왔으니 그 나라들은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하. 기가 차군.”
라틸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반년 사이에 참 많은 일을 시도했어. ‘군주의 인장’을 사용한 건가?”
“예. 군주의 인장 계속 황궁 안에 있었으니까요.”
‘군주의 인장’은 황제의 서명과 다를 바 없기에, 외교 활동이나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데에 있어 그 효력이 절대적이었다.
‘큰일인데.’
라틸은 걱정에 인상을 구겼다.
“군주의 인장까지 사용해서 외국 세력을 끌어들이려 했다면 분명 서류를 통해 조약을 체결하고, 어떤 대가가 있었겠지. 미친 자식.”
“예. 틀라 황자와 계약한 나라들이 ‘군주의 인장’이 사용된 걸 앞세워서 계약 이행을 폐하께 대신하라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라틸은 끙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정말 마지막까지 똥을 제대로 싸고 갔구나, 틀라.”
우호 관계의 국가라면, 틀라 황자가 멋대로 한 계약을 라틸에게 이행해 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진 않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두 나라 사이가 완전히 어그러질 테니. 그러나 우호적인 국가의 상당수가 이미 라틸을 지지했던 만큼, 틀라가 끌어들이려 한 외국 세력은 비우호 국가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 국가에서 과연 당시 타리움의 상황을 이해하고, ‘군주의 인장’이 엉뚱한 사람에 의해 발효되었다는 걸 수긍할까? 설마. 알면서도 모른 척 시치미를 뗄 확률이 높았다.
“아트락시 공작. 우선 어떤 나라가 무슨 내용으로 조약을 맺었는지부터 알아내시오. 정식으로 기록을 남기진 못했겠지만, 인장을 찍은 이상 분명 어딘가에 서류는 남아 있을 거요.”
“예, 폐하.”
라틸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런데 아트락시 공작이 이상했다. 보고는 이미 끝난 것 같은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나가지도 않았다. 덕분에 방 안엔 어색한 침묵이 채워졌다. 라틸은 따로 공작과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직 알아낸 게 없는 외세 이야기를 계속 반복할 수도 없었다. 결국, 라틸은 아트락시 공작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물었다.
“더 할 말이 있소?”
아트락시 공작은 라틸이 묻자 용기를 얻은 듯, 아까 보고할 때보다 더욱 신중해진 얼굴로 심각하게 물었다.
“저…… 폐하. 우리 라나문은 언제 들여보내면 좋을지요?”
질문 내용은 그리 심각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라틸은 눈썹을 찡그리고서 입꼬리만 어색하게 올렸다.
‘아트락시 공작이 자기 아들을 꼭 국서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구나.’
후궁에 들여보내겠다면서 제일 먼저 서류를 제출했을 때도 놀라웠지만. 이렇게 대놓고 찾아와서 얼른 들여보내고 싶단 뉘앙스까지 풍기니 더욱 놀랍다. 얼굴이 붉어진 걸 보면 본인도 이런 질문을 하는 게 부끄럽긴 한 모양인데…….
‘그보다 어쩐다.’
라틸은 눈을 ‘데록’ 굴렸다. 물어보니 대답은 해 주어야 하는데. 아직 시종장은 다른 후궁 세 명을 골라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라틸은 다른 후궁들을 다 뽑기 전까지는 라나문을 들여보낼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신분이며 위치가 빼어나게 높을 게 뻔한데. 지금 라나문을 후궁에 가장 먼저 들였다가는, 이후 들어올 다른 후궁들이 라나문에게 눌려 지낼 게 뻔하니까. 그나마 신분도 높고 제멋대로인 클라인 황자 정도가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으려나?
‘안 되지.’
그러라고 만든 하렘이 아닌데, 어디서 서열 정리를 하려고. 후궁들은 자신이 국서를 맞이할 마음이 들 때까지, 서로 치열하게 싸워대면서 귀족들의 시선을 잡아주어야 한다. 절대로 하렘 안에서 위계질서가 생기게 둘 수는 없었다. 생각을 마친 라틸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다섯 명이 다 골라지면. 모두 같은 날에 들일 생각이라네.”
“하지만 클라인 황자는…….”
“외국인이잖나. 먼 곳에서 왔으니 특별히 임시 거처를 주었을 뿐, 그도 아직 정식으로 하렘에 들어오진 않았네. 후궁 자리에 오른 것도 아니고.”
아트락시 공작은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폐하.”
* * * 저택으로 돌아온 아트락시 공작은 곧장 라나문을 찾았다.
“라나문! 아들!”
늦은 시간이지만 라나문은 일찍 잠드는 일이 드물었다. 오늘도 분명 아직 깨어 있을 것이었다.
“주인님.”
“라나문은?”
“도련님께서는 서재에 계십니다.”
예상대로 라나문은 멀쩡히 깨어 있었다. 아트락시 공작은 집사에게 지팡이를 건네고, 한 손으로는 목을 조르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단추를 몇 개 풀어내며 당장 서재로 갔다. 라나문은 책상 의자 옆에 발 받침대까지 가져다 놓고서 편한 자세로 앉아 독서 중이었다. 그 책 제목이 아주 음란하기 짝이 없긴 하지만, 글자만 가리면 외관상으로는 여유롭고 지적인 듯 보였다. 아트락시 공작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얼핏 보았던 클라인 황자와 자신의 아들을 비교해 보았다. 얼굴로는 박빙인데…….
“아버님?”
시선을 눈치챈 라나문이 정신없이 읽던 책에서 시선을 떼고 아트락시 공작을 보았다.
“뭐 하십니까?”
아트락시 공작은 말없이 라나문이 앉은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황궁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트락시 공작은 책상에 기대어 선 채 심각한 얼굴로 아들을 응시하다 대답했다.
“너와 함께 입궁하게 될 또 다른 후궁이 오늘 먼저 궁으로 들어갔다.”
라나문은 책을 덮고 받침대에서 발을 내리며 반듯한 이마를 조금 구겼다.
“먼저 후궁이 된 겁니까?”
“아니. 외국에서 와서 거처가 없단 핑계로, 귀빈 대우를 받으며 지내는 모양이더라.”
“귀빈 대우? 누가 왔는데 귀빈 대우를 받고 있는 겁니까?”
“카리센의 클라인 황자. 하이신스 황제의 이복동생이지.”
라나문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입니다.”
아트락시 공작은 ‘네가 들어본 이름이 있긴 하느냐’고 말할 뻔한 걸 꾹 참고 설명했다.
“나랏일을 하던 황자는 아니야. 카리센에서도 딱히 두각을 드러내던 황자는 아니었을 거다, 아마.”
“그러면 상관없지 않습니까? 외국 후궁이야 어차피 대외 관계 때문에 정략적으로 들였을 텐데. 국적 외엔 장점이 없는 머리 나쁜 후궁은 경쟁 상대도 되지 않습니다.”
라나문의 단호한 대답에 아트락시 공작이 혀를 찼다.
“그러지 않으니 문제지.”
“다른 장점이 있습니까?”
“아주 잘생겼다. 너에 비견될 만큼.”
“…….”
“네 말대로 국적도 장점이더라. 외국인이라 그런가, 이국적인 매력이 있어.”
어딜 가서든 자기가 제일 잘났다 생각하는 라나문은, 아버지가 의외로 순순히 외국 황자를 칭찬하자 기분이 상한 듯 점점 얼굴이 굳어갔다. 하지만 아트락시 공작은 적에 관해서는 냉정하게 판단하고 솔직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여겼기에, 아들을 위로하는 대신 클라인 황자의 결정적인 강점까지 알려주었다.
“아주 여우 같은 놈이다. 오늘 왔는데, 첫날부터 폐하와 동침하려고 복도에서 벼르고 있더라.”
“그런……!”
“꼬리가 열두 개는 달린 듯하니 긴장해야 한다. 알았니?”
아트락시 공작은 말하고 나니 더욱 걱정되어서 라나문을 바라보았다. 그의 장남은 신분이며 머리, 얼굴까지 빠지는 게 없이 잘난 탓에 지나치게 자존심이 높았다. 그 드높은 자존심은 벽이 되었다. 라나문은 사람들에게 쉽사리 다가가지도, 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장점이 하나로 모이더니 오히려 단점이 된 셈이었다. 그런데 비슷한 수준의 얼굴과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클라인 황자는 아주 적극적인 여우였다. 성격이 문제가 되면 라나문이 밀릴 것 같았다.
“…….”
그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라나문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궁금해지는군요.”
“어차피 후궁이 되면 보기 싫어도 매일 볼 거다.”
“아니요. 내일.”
“내일?”
뜬금없이 웬 내일?
“내일 가서, 어떤 사람인가 제 눈으로 미리 보고 와야겠습니다.”
* * * 아트락시 공작의 공식적인 라이벌이나 다름없는 재상은, 이번 황위 싸움에서 완전히 중립을 지켰고, 라틸과 틀라 중 어느 쪽도 돕지 않았다. 그 결과 라틸이 틀라의 측근들을 내칠 때 자리를 부지할 수 있었지만, 아트락시 공작에 비해 권력이 약간 밀려났다. 그 좁아진 입지 때문일까. 재상 역시 자신의 차남을 후궁으로 올렸고, 라틸은 고민하지도 않고서 그 차남에게 합격을 주었다. 대상단의 후계자 역시도 어떤 의도로 지원한 건지 노골적일 만큼 뻔히 보여서 합격이었다. 귀족들이라 해도 돈은 필요하기 마련이다. 아니, 오히려 저택의 고용인들과 품위 유지비, 막대한 저택, 기사들을 굴리기 위해 귀족들은 돈이 더욱 많이 필요했다. 이 점을 이용해서, 부유한 상인들은 신분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딸이며 아들을 가난한 귀족들과 결혼시켰고, 심지어는 나이 많은 재혼 자리로도 마구잡이로 밀어 넣고는 했다. 그런데 귀족도 아니고 황족, 심지어 황후가 없는 황제의 후궁 자리이지 않은가. 운이 좋아 황제와의 사이에 아기가 태어나기라도 한다면 평민이 순식간에 황족이 되는 거였고, 더욱 운이 좋으면 다음 대 황제의 외가가 될지도 모르는 일. 머리 좋은 상인이라면 제 후계자를 밀어 넣을 만도 했다. 하지만 용병왕 칼라인은……. 라틸은 거의 30분가량을 생각에 잠긴 채 용병왕 칼라인의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얘가 좀 이상하단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지원한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막막했다. 용병왕은 왜 뜬금없이 후궁이 되겠다고 지원했을까?
“그럼 폐하, 이자는 물릴까요?”
시종장은 라틸이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서류 한 장만 뚫어져라 쳐다보자, 시종장이 다시 물었다.
“이자가 오지 않는다면, 그다음 데려올 사람도 정해 두기는 하였습니다. 마법 아카데미의 우수한 인재입니다.”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찜찜하기는 한데, 또 그냥 물리기에는…….”
라틸은 슬쩍 용병왕 칼라인의 초상화를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섹시했다. 아주 많이. 게다가 용병왕이라면 아주 짐승 같은 매력이 있지 않을까? 라나문과 클라인은 세기의 미남들이고 재상의 차남은 온화한 미남이다. 상단의 후계자라면 지성미가 있겠지. 그렇다면 남은 하나는 거친 매력도 괜찮을 것 같은데……. 라틸의 속내를 읽은 시종장은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눈치껏 물었다.
“이자로 할까요, 폐하?”
* * * 다음날, 라나문이 클라인 황자를 직접 만나본다면서 집을 나선 후. 아트락시 공작은 하루 종일 초조하게 저택 거실을 돌아다니며 라나문을 기다렸다. 클라인 황자는 상당히 제멋대로인 성격 같던데. 그런 성격이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은 인간 취급도 해주지 않는 라나문과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면 할수록 걱정되었다.
“적당히 인사나 하고 오겠지요. 정신 사나우니 좀 그만 돌아다녀요.”
공작부인이 짜증스럽게 혼을 냈지만, 아트락시 공작은 구석에서 잠시 멈춰 서 있을 뿐,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마침내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기다리던 라나문이 돌아왔다.
“어땠니, 아들?”
아트락시 공작은 대문가로 달려나가 아들을 보자마자 채근했다.
“그 여우는 만나 보았어? 무슨 얘기를 했고?”
라나문은 늘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이어서, 얼굴이나 분위기만으로도 대화가 잘되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으니 답답했다.
“네. 만났습니다.”
그러나 라나문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홀을 가로질러가 곧장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가기만 했다. 아니, 얘는 무슨 얘기 하고 왔냐니까 왜! 아트락시 공작은 얼른 그 옆으로 따라붙으며 계속 물었다.
“뭐라고 하던? 험한 말을 하지는 않더냐?”
라나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폐하가 자기를 몇 년간 짝사랑했다더군요.”
대답은 태연했으나, 아트락시 공작은 놀라서 휘청했다. 계단에서 떨어질 뻔한 아트락시 공작은 간신히 난간을 붙잡아 균형을 맞췄다. 그는 그 사이에 훌쩍 먼저 올라가 버린 아들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뭐라고?
“짝사랑했다고? 폐하가? 그자를?”
아트락시 공작은 서둘러 다시 아들의 옆으로 달려갔다.
“아니, 폐하께서 그자를 어디서 만났기에 짝사랑하셨단 말이냐?”
“거기까지 얘기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면? 또 뭐라던?”
“전 후궁이 되어 봤자 그냥 꽃 배경 중 하나가 될 거라더군요.”
“꽃 배경?”
아트락시 공작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내 아들이 꽃 배경이라니. 식충식물이 될 지언정 꽃 배경이 될 아이가 아닌데. 아트락시 공작은 씩씩거리며 호통쳤다.
“아니 미련하기는! 넌 그 말을 듣고만 왔느냐?”
“…….”
“아니지? 너도 뭔 말을 하기는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