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전남친의 동생을 첩으로2020.04.12.
하도 놀랐더니 머리가 잠시 굳었나보다. 라틸은 입을 쩍 벌리고 클라인 황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냐, 설마 하이신스가 자기 동생을 내 후궁으로 보냈겠어. 걔가 그렇게 미치진 않았을거야.’
라틸은 가까스로 그럴듯한 결론을 찾아냈다. 그래, 저 남자는 아마 내 후궁을 배웅하기 위해 함께 온 걸 거야. 일행이겠지. 일행. 그러나 라틸을 본 황자가 씩 웃더니 저벅저벅 다가와 콱 자신을 끌어안는 순간. 라틸은 이 남자가 자신의 후궁으로 온 거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드디어 잡았다.”
“잡아……?”
“날 가지게 되어 기쁘겠군?”
“어?”
“안심하지 마. 몸이 왔다고 해서 마음까지 쉽게 주진 않을 거니까.”
하이신스가 굳이 자신의 동생을 후궁으로 보낸 이유 역시 쉽게 알 수 있었다. ‘또라이’. 하이신스의 동생은 또라이였다. * * * 시종장이 하이신스의 동생을 데리고 임시로 머물 거처에 데려간 사이. 라틸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황당한 기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다행히 어이 없는 기분은 점차 가라앉았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이신스 이 미친놈. 후궁을 보내라 닦달했더니 자기 동생을 보내?’
전 약혼녀 애인으로 남동생을 보내는 자식이 제정신일까?
“저 사람. 클라인 황자 아닙니까?”
서넛 기사단장 역시 결혼식장에서 그를 봤던 게 기억나는 듯 라틸에게 물었다. 클라인. 라틸은 하이신스 남동생의 이름도 이제야 기억해냈다. 그러고보니 그런 이름이었지. 클라인. 라틸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맞습니다. 하지만…… 참. 후궁으로 동생을 보낼 줄은 몰랐습니다. 적당히 신분 높은 귀족가에서 찾아 보낼 줄 알았는데.”
외국에 후궁으로 서자 출신 황녀나 황자를 보내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아니, 이건 오히려 우호국에 보내는 최대한의 친밀한 표시였다. 그러나 황자를 보내온 이가 전 남자친구이다 보니 전혀 친밀한 표시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저 의심스러울 뿐. 무슨 꿍꿍이이지? 혹시 저 황자에게 타리움의 정보를 빼돌리라거나, 그런 명령이라도 내린 건 아닐까? * * * 사블레 후작은 선대 황제 때부터 쭉 시종장 역할을 맡아 왔기에, 라틸을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다. 물론 그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건 라틸만은 아니었다. 그는 다른 황자나 황녀들 역시 태어날 때부터 보아왔다. 하지만 가끔씩 파티 때에나 마주치는 다른 황족들과 달리, 라틸은 늘 부황을 쭐레쭐레 쫓아다녔고, 자연스레 마주칠 일도 유독 많았다. 자주 봐야 정이 짝트기 좋은 법. 당연히 사블레 후작은 황자와 황녀들 중 라틸에게 가장 정이 갔다. 권력을 쥘 수 있긴 하지만 그만큼 골치 아프고 할 일도 많은 시종장 업무를 두 세대에 걸쳐 맡기로 한 것도, 그가 라틸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시종장은 클라인 황자를 임시 거처로 안내하는 내내, 매의 눈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 황자는 우리 황제 폐하에게 어울리는 사람인가 아닌가. 우선 얼굴. 얼굴로 치자면 단연 만점이었다. 약간 어두운 피부, 이에 대비되는 신비로운 은발과 블루 다이아몬드 같은 눈동자는 경국지색이란 별명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자존심과 미모로는 타리움에서 가장 뛰어날 거라는 라나문 아트락시와도 비견할 수 있을 정도이니, 가히 절색이었다. 두 번째. 신분. 황자라는 점에서 10점이지만, 하이신스 황제의 동생이란 점에서 마이너스 5점이다. 세 번째가 성격인데…….
“여기서 지내라고?”
“예, 황자 전하.”
“방이 너무 좁군. 타리움은 돈이 별로 없나?”
“…….”
“임시 거처라 했지? 진짜 거처는 언제 갈 수 있느냐? 거기도 이렇게 작고 수수한가?”
“진짜 거처는…….”
“아, 어련히 알아서 가겠지. 수수하면 내가 꾸미면 되고. 괜한 걸 물었어.”
“예, 그리고 여기 머무시는 동안은…….”
“폐하의 방은 어디지?”
성격은 빵점이로구나. 시종장은 무슨 말을 하는 족족 클라인 황자에게 씹혀버리자, 미간을 찡그리고서 점수를 짜게 냈다. 막판에 뒤통수를 때리긴 했지만, 하이신스 황제는 유학 시절에는 참으로 예의가 발랐는데. 클라인 황자는 싹수가 아주 얼굴과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폐하의 방은 어디냐고.”
클라인 황자가 재차 재촉하자, 시종장은 미간을 찡그리고서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자꾸 폐하 방이 어디 있는지 물으십니까?”
“하하. 왜 묻냐니?”
그러나 대놓고 퉁명스럽게 물었는데도, 클라인 황자는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어차피 폐하께서는 내 방에 오실 테지 않느냐. 번거로울 것 없이 내가 가서 기다리려 그러는 거다.”
진짜 재수없는 놈이로구나. 시종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시종장의 마음속에서 클라인 황자에 대한 평가가 최하점을 쾅쾅 찍는 순간이었다. * * * 클라인 황자를 보낸 후, 라틸은 카리센에서의 일을 보고 받기 위해 브레타 백작을 공개 집무실로 데려갔다. 그런데 순순히 잘 따라오던 백작이 집무실 안에 들어오자마자 돌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브레타 백작? 왜 그러시오?”
왜 저러나 싶어 라틸이 불러보자, 백작은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폐하. 주위에 사람들을 물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사람들을 물리라고? 라틸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주위에 사람이라고 해 봐야, 시종장이 클라인 황자를 데려간 지금은 서넛 기사단장뿐이었다. 즉 브레타 백작은 ‘사람들’이 아니라 서넛 기사단장을 물려 달라 요구하는 것이다. 라틸은 힐긋 서넛 기사단장을 보았다. 그는 별로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았지만 물러날 마음도 없는 듯했다. 라틸 역시도 같은 생각이었다. 브레타 백작이 어떤 이야기를 꺼내든 서넛 기사단장까지 물릴 필요는 없었다. 라틸은 서넛을 보내는 대신 명령했다.
“괜찮으니 말해보시오.”
브레타 백작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곧 품 안에서 편지를 꺼내 라틸의 책상 위에 내려놓고 물러났다. 뭐야. 고작 이거 하나 건네려고 서넛을 물려달라 한 거야? 라틸이 의아해서 쳐다보자 브레타 백작이 얼른 대답했다.
“카리센의 폐하께서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전하라 하셨습니다.”
‘하이신스가?’
라틸은 미심쩍어하며 편지의 봉인을 뜯었다. 하이신스가 보낸 거라 하니 영 의심스러운데. 설마 보자마자 화를 내며 발광할 내용을 써둔 거라던가……. 의심스러운 마음 반 호기심 반으로 편지를 꺼낸 라틸은 편지를 보자마자 “흠” 소리를 냈다. 편지 안에 적힌 건 라틸이 생각한 그런 내용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편지도 썼고 선물도 보냈는데, 무슨 말이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항의. 하지만 ‘사람들이 없을 때 전하라’는 말을 굳이 덧붙였다는 건…….
‘나는 하이신스에게 편지도 선물도 받은 적이 없는데. 하이신스는 일주일마다 보냈다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편지를 아무도 없을 때 전하라고 했어.’
라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누군가 중간에 자신의 편지를 가로챈 것 같단 이야기를 하는 건가? 하이신스가 막판에 뒤통수를 치긴 했지만, 공적인 일에서는 철두철미한 성격이었다. 이런 문제로 거짓말을 할 성격은 아니었다. 라틸은 심각한 얼굴로 옥좌 손잡이를 긁었다. 하이신스가 보낸 편지가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 한들 죄다 쓰레기통에 처박았을 확률이 높지만. 그와 별개로 황제가 황태녀에게 보낸 편지를 말없이 가로챈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 선황제가 암살로 사망했고, 그 암살범이 아직까지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먼 길이었는데 오가느라 고생했소. 이 일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치하할 터이니, 당분간은 푹 쉬도록 하시오.”
라틸은 브레타 백작의 노고를 치하한 후, 서넛 기사단장과 단둘만 있게 되자 편지 내용에 대해 털어놓았다.
“하이신스가 내게 보낸 편지와 선물을 가로챈 사람이 있는 모양입니다.”
“타리움 제국에 말입니까?”
“카리센인지 타리움인지, 아니면 완전히 제3국인지에서 한 짓인지, 그건 모릅니다. 하이신스도 그걸 모르니 아무도 없을 때 편지를 열어보라 했겠지요.”
서넛 기사단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역시도 잡히지 않은 선황제의 암살범을 떠올리는 눈치였다.
“암살범이 편지 도둑과 관련 있을 확률은 낮지만…… 일단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전혀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황제의 물품을 가로챈 건 중죄이고요.”
라틸은 다시 편지를 봉투 안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하이신스가 보낸 편지와 선물은 약 3년 동안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라틸이 즉위한 후 브레타 백작을 통해 직접 보낸 서신은 전부 다 하이신스에게 전해졌다. 즉, 편지 도둑이 카리센 쪽에 있다면 ‘보내는’ 업무에 관련되어 있을 것이고, 타리움 쪽에 있다면 ‘받는’ 업무에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서넛 경. 은밀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서넛 경이 이 일에 대해 책임지고 수사해주세요.”
* * *
‘젠장. 하이신스가 동생을 보낸 데 분노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라틸은 업무를 끝내고 침실로 돌아가면서야 그 생각을 떠올렸다. 사라진 편지 이야기에 잠시 잊어버렸어! 끙 소리를 내며 벽에 이마를 댄 채 후회했지만, 뒤늦게 브레타 백작을 불러다가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실 브레타 백작을 불편한 자리에 사절단 대표로 보낸 것부터가, 틀라 황자를 지지한 데 대한 화풀이이기는 했지만. 라틸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신기한 일이었다. 하이신스와의 이별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마음 아프고 짜증 나는데. 이제는 바쁜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아프고 괴로운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중에는 바쁘지 않을 때도 생각나지 않겠지. 그런 식으로 이별을 극복하는 거겠고.’
라틸은 먹먹한 감정에 젖어 쓰게 웃었다. 그를 사랑할 당시엔 이런 감정 변화 따윈 평생 남 일이라 여겨는데. 그러나 한껏 이별의 쓴맛과 사랑의 슬픔에 취한 마음은 자신의 방문 앞 복도에 있는 남자를 보자마자 바로 땡그랑 깨어졌다.
‘저건 뭐야?’
라틸은 계단을 올라가다가 멈춰서서 먼발치의 광경을 쳐다보았다. 방문 앞 복도에 의자가 있고, 그 위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서 거북스러워하는 기사들……. 라틸은 황급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의자에 앉아 있는 건 클라인 황자였다. 하이신스의 동생. 라틸은 기가 막혀서 입을 벌렸다. 단지 의자에 앉아 있는 것 뿐만이 아니었다. 황자는 작정하고 여기에 죽치고 있었던 듯 아예 책까지 가져다 읽고 있었다. 심지어 아주 굵은 책이다.
“폐하.”
그러나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 장본인은, 라틸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일어나서는 예절서에 실려도 좋을 만큼 정확한 각도로 인사했다. 라틸은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가 물었다.
“황자.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클라인.”
“?”
“클라인이라 불러주시죠.”
라틸은 입을 다물고 클라인 황자를 지그시 쳐다보다 말했다.
“뭐 하는 거지, 클라인?”
클라인 황자는 책을 내려놓고, 옆에 있던 시종에게서 술병을 건네받아 들어 보였다.
“이곳에서의 첫 술은 폐하와. 같이 마시고 싶어 왔습니다. 폐하는 제게 취하고, 저는 술에 취하고.”
라틸은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저 또라이. 지금 날 놀리는 거지?’
달콤한 척 말하고 있지만, 클라인 황자가 가져온 술은 예전에 두 사람이 사고를 칠 때 마신 그 술이었다. 라틸이 팔짱을 끼고 쏘아보자, 클라인 황자가 당당하게 변명했다.
“사실 안에서 기다리고 싶었습니다만. 시종장이 폐하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절대로 들여 보내줄 수 없다 해서요. 정 원한다면 복도에서 기다리라고 하기에 기다리던 중입니다.”
정 원한다면 복도에서 기다리란 말은, 그냥 꺼지란 말이잖아. 라틸은 팔짱을 풀고 이마를 짚었다. 역시 하이신스가 저놈을 내게 보낸 이유는 성격 때문 아닐까. 의심이 더욱 강해졌다. 한숨이 나왔지만, 라틸은 결국 클라인 황자에게 들어오라 허락해주었다.
“좋아. 들어와라.”
어차피 후궁으로 온 이상 최소한 반년은 데리고 있어야 한다. 계속 그날의 일을 찝찝하게 여기며 피하기보다는, 이참에 제대로 대화를 하고 털어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런데 라틸이 막 앞서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복도 너머 계단에서 “폐하!” 하고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자, 아트락시 공작이 서둘러 다가오고 있었다.
“이 시간에 공작이 무슨 일이오?”
뭐야. 넌 또 무슨 일인데. 라틸은 아트락시 공작이 가까이 오자마자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아트락시 공작은 자연스럽게 클라인 황자와 라틸의 사이에 끼어들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척 중한 일입니다.”
‘타이밍이 좀 교묘한 것 같은데.’
라틸은 떨떠름해서 아트락시 공작의 어깨 너머에 선 클라인 황자를 보았다.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클라인 황자도 미간을 찡그리고서 공작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