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그 여자가 원하는 건 나야2020.04.05.
하이신스는 몇 번이나 거듭해서 편지를 확인하고 확인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편지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하.”
하이신스는 기가 막혀서 이마를 짚었다. 눈가로 열이 올라왔고, 머리는 한 대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라틸이 이딴 편지를 보냈다고? 라틸이? 하이신스는 와락 편지를 구기고서, 이 편지를 가져온 사절단 대표를 노려보았다. 그가 마치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라는 듯이. 사절단 대표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좋지 못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겁먹은 표정으로 움츠렸다.
‘라틸, 라틸, 라틸……!’
하이신스는 편지를 꼼꼼하게 구겨서, 한 손에 넣고 꾹꾹 공처럼 뭉치며 잠시 숨을 골랐다. 당장 저자를 끌고 가 죽이란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움츠린 사절단 대표의 뒤로, 라틸이 비틀리게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세 번째 손가락을 들어올리는 것도 같았다. 하이신스는 천천히 옥좌 손잡이를 잡고 손가락 끝으로 툭 툭 툭 두드렸다. 무엇이든 말을 해야 하는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도 그의 머릿속은 백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하며 사절단 대표만 노려보다가, 하이신스는 가까스로 한마디를 입에 담았다.
“안 된다.”
사절단 대표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하, 하오나 폐하…….”
브레타 백작은 하이신스가 설마 이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타리움의 황제에게 전하라. 절대로 후궁은 보낼 수 없다고.”
“그렇지만…….”
저건 무슨 돼먹지 않은 심보지? 너네는 우리나라에서 후궁을 데려가지 않았느냐고, 사절단 대표는 목 끝까지 치솟은 말을 꿀떡 삼켰다. 이 말을 했다간 정말로 카리센의 황제가 검이라도 휘두를 태세여서. 고작 이 한마디에 던지기엔 그의 목숨은 너무 소중했다. 그러니 라트라실 황제가 후에 ‘이 식충아 넌 일도 제대로 못 하냐!’고 혼을 내더라도, 우선은 침묵을 택하는 수밖에. * * * 3년 전 라트라실 황녀가 고백해 놓고서는 인사도 없이 달아난 이후. 자존심이 상한 클라인 황자는 그녀에 대해 잊어버리기로 결심했다. 그게 상처 입은 자존심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다. 하지만 타리움 제국은 너무 강대국이었다. 빌어먹을 그 나라 소식은 관심을 끊으려고 해도 여기저기서 톡톡 튀어나와 그를 자극했다. 최근에는 특히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 라트라실 황녀. 술에 취해서 엉엉 울던 그 황녀가 타리움의 황제로 즉위했다는 이야기였다.
‘타리움도 큰일 났군.’
황제의 술주정이 그렇게 나빠서야…… 클라인은 괜히 기분이 상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즉위한 황제는 카리센으로 곧장 사절단을 보냈다. 국교를 위해 카리센 출신의 후궁을 요청하는 사절단이었다. 클라인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존심이 상했다.
‘분명 날 보내라는 거다.’
전에는 부끄러워서 도망가 버렸지만, 이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으니 그를 데려가고 싶어 하는 거겠지. 뻔한 이야기였다.
“하. 미치겠군.”
클라인은 어이가 없어서 숨을 뱉어내고는, 눈가로 흘러내리는 은발을 쓸어 올렸다.
“정말로 어이가 없구나.”
클라인에게 사절단 소식을 전해 준 수행원은 “예?” 하고 되물었다.
“제가 뭐 이상한 말씀을 올렸는지요?”
“너 말고. 타리움 제국의 라트라실 황제 말이다.”
수행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클라인을 쳐다보았다. 뜬금없이 무슨 말씀이시지? 3년 전부터 클라인 황자는 늘 라트라실 황녀에 대한 보고서를 받고 있었다. 본인이 보고를 지시한 건 아니었다. 다만 매번 어디서 들었는지 “내가 듣기로는…….”이라고 운을 떼며 자세한 보고를 하도록 유도했고, 결국 수행원이 눈치껏 라트라실 황녀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으면 알아서 클라인 황자에게 찾아와 보고하게 된 것일 뿐. 보고를 받을 때마다 황자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했다. 뚱한 얼굴로 초조해하는 것. 그러다 가끔씩은 맥락 모를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제법 인내심이 긴가?”
“바쁘다 보니 잊었나 보다.”
이런 식의. 그런데 오늘은 초조해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하! 참, 허! 참’ 하는 소리만 내자 의아했다.
“전하? 왜 그러시는지요?”
“국서도 아니라 후궁이라지 않느냐. 괘씸해라.”
“예?”
수행원은 멍청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여전히 클라인 황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원래 클라인 황자는 이것저것 잘 설명해 주는 성품이 아니었다. 오늘 역시도 마찬가지. 클라인은 제 할 말만 투덜거리고서, 설명 없이 손을 휘저어 수행원을 내보냈다. 그러나 수행원이 나간 후에도 클라인은 한참 동안 불쾌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카리센은 약소국이 아니었다. 타리움과 맞먹는 강대국이지. 그런데 이런 대단한 나라의 황자를 원하면서, 어떻게 후궁으로 들여보낼 생각을 하는 거지?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절대로 응해주지 말아야지. 클라인은 냉랭하게 다짐했다. 두 번이나 도망갔으니, 상대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클라인의 야심 찬 계획은 시도도 하기 전에 엎어졌다. 수행원이 한 시간 후 다시 달려와 전한 말 때문이었다.
“전하, 폐하께서 타리움의 사절단들을 그냥 돌려보내셨다 합니다! 타리움에는 후궁으로 보낼 적당한 사람이 없다고요.”
클라인은 거울을 보다 말고 흠칫해서 수행원을 쏘아보았다.
“뭐라? 누굴 돌려보내?”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수행원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제가 아니라 폐하께서…….”
* * *
“형님!”
클라인이 쾅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이닥치자, 하이신스는 커다란 업무용 의자에 앉아 담배를 물고 있다가 눈살을 찡그렸다.
“뭐냐, 클라인. 그 손은 용도가 없어? 노크도 할 줄 몰라?”
“있지. 막아서는 기사들을 내치는 용도.”
하이신스가 입을 벌리자 그의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듯 메케한 연기가 느리게 뿜어졌다.
“말본새가 아주 예뻐졌구나, 동생.”
“진짜야?”
“돌려 말한 거다.”
“그거 말고!”
클라인은 낮은 계단 여러 개를 한 번에 튀어 올라가 하이신스의 코앞까지 다가가서는, 작은 의자를 끌어다가 걸터앉았다. 이게 미쳤나……? 하이신스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한 손으로 빼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질문을 하려면 문장을 제대로 말해.”
“형님이 타리움 사절단을 돌려보냈어?”
“아아.”
“형님이야?”
“나 말고 돌려보낼 사람이 또 있나?”
그런 사람이 있으면 데려와 보라는 듯 하이신스가 가볍게 웃자, 클라인은 기가 막혀서 항의했다.
“미쳤어? 그 사람들을 왜 돌려보내?”
“너야말로 미쳤구나. 네 형이지만 지금은 황제다, 클라인.”
클라인은 씩씩거렸으나 입만 뻐끔거릴 뿐, 그 부분은 반박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하도 티격태격 자란 터라 아직도 반말을 뱉어대지만, 사실상 하이신스가 많이 봐주고 있단 건 그도 인정하는 바였다. 클라인은 결국 조금 목소리를 낮췄다.
“내 말은, 타리움과 전쟁이라도 하고 싶으냔 거야. 2년 전인가 3년 전인가, 형님은 타리움에서 후궁을 받아 왔잖아? 그 이름 뭐지…… 하여튼 누구 왔잖아. 누구였지?”
하이신스는 말없이 담배를 책상에 비벼 껐다. 클라인은 황당해서 인상을 구겼다.
“뭐야, 형님도 이름 몰라? 형님 후궁이잖아?”
“본론.”
“형님은 후궁을 받아 놓고서 우리는 안 주겠다고 하는 게 어딨어? 타리움에서 알겠다고 순순히 넘어갈 거 같아? 기분 상하지 않을까? 무시하는 처사라 여길지도 몰라. 아니, 실제로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거절하면 안 됐지. 받기만 하고 안 준다니, 이런 치사한 경우가 어딨어?”
“갈 사람이 없다. 재상의 아들은 기혼이고, 대공의 아들은 외동이라 외국으로 보낼 수 없어. 황족 중에서도 미혼은 여자뿐이고.”
클라인은 말없이 하이신스의 책상을 새 부리처럼 손을 모아 두드리고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하이신스는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올렸다.
“너? 네가 가겠다고?”
“형님 입으로 말했잖아. 갈 사람이 없다고. 정확히는, 나 외에 갈 사람이 없단 거 아냐?”
그러나 하이신스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돼.”
그 차가운 목소리에 클라인은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렸다. 어휴 둔하기는!
“형님. 모르겠어?”
이렇게까지 했는데?
“?”
“라트라실 황제는 애초에 날 염두에 두고 보낸 거라고, 그 사절단.”
하이신스의 표정이 모호하게 변했다.
“왜? 그녀가 왜 널 염두에 두고 후궁을 보내라 했다 믿는 거지, 클라인?”
“형님이 말했잖아. 나 외엔 갈 사람이 없다고.”
“…….”
“그쪽도 알겠지. 그런데 굳이 사절단을 보냈다는 건, 날 달라는 거 아니겠어?”
“…….”
“난 그쪽으로 가도 상관없어, 형님. 어차피 그녀는 날 좋…… 흠. 카리센의 이름값이 있으니 적당히 시기를 보다가 국서로 올리겠지.”
하이신스는 잠시 입을 꾹 다문 채 클라인을 쳐다보다가 손을 저었다.
“나가. 바빠.”
클라인이 나간 후. 하이신스는 쾅 책상을 걷어찼다. 그는 머리에 한 손을 짚고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의 화려하고 웅장한 그림이 외려 그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다.
“라틸. 정말이냐. 정말로 이런 식으로 내게 복수하려는 건 아니겠지?”
* * *
“우와…… 서넛 경. 이거 보십시오.”
라틸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시종장이 불쾌하다는 듯 서넛 기사단장을 쳐다보았다. 틀라와의 싸움에서 근위기사들을 이끌고 라틸을 도운 이후. 서넛 기사단장은 자연스럽게 라틸의 최측근이 되어 여전히 기사단장직에 있었다. 파격적으로 젊은 나이에 기사단장 자리에 올랐기에, 두 세대의 황제를 걸쳤지만 서넛 기사단장은 여전히 다른 기사단장들에 비해 어린 편이었다. 그러나 시종장이 서넛 기사단장을 불만스레 쳐다보는 이유는, 기사단장이 어리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적으로는 레안 전 황태자의 친구이자 어릴 때부터 라틸과도 친하게 지낸 이웃 오빠나 다름없다지만, 그래도 지금 라틸과 서넛은 주군과 부하의 관계인데. 라틸은 여전히 황녀 시절처럼 서넛 기사단장을 대하고, 서넛 기사단장 역시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니, 그게 못마땅해서였다. 라틸이야 그렇다 쳐도, 서넛 기사단장은 알아서 격식을 차려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 따가운 시선을 눈치챘으면서도, 서넛 기사단장은 모른 척 라틸이 가리키는 서류를 보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러나 능청스럽던 서넛의 표정은 서류를 보자마자 일그러졌다. 라틸은 어깨너머에 선 서넛의 표정을 볼 수 없기에 태연히 혀를 찼다.
“보면 모릅니까? 내 후궁이 되겠다면서 서류를 보내온 사람들입니다.”
서넛 기사단장의 시선이 누구보다 빠르게 서류를 훑었다. 아주 얇은 종이로 한 장 한 장 쌓았는데, 그 높이가 대략 15센티미터 정도. 지원자 수가 최소 몇백 명은 되는 걸로 추정되었다. 시종장 역시도 서넛 기사단장을 쳐다보던 걸 잊고 혀를 내둘렀다.
“지원자가 많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더 많군요. 가려내야겠습니다, 폐하.”
“그러네요. 우선은 다섯 명만 들일 생각인데. 생각보다 많이 지원했네요.”
고개를 끄덕거리던 시종장은 눈을 부릅떴다.
“우선이라 하셨습니까?”
“사람 마음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요. 내가 지금은 순애보 황제 콘셉트인데. 나중에 마음 바뀔지도 모르고.”
순애보…… 게다가 콘셉트라고…… 시종장이 황망해 중얼거리는 사이. 라틸은 엄지로 주르륵 종이를 훑으며 고개를 젓다가, 가장 위쪽에 있는 서류 한 장만 들어 올리며 혀를 찼다
“그보다 참. 라나문 아트락시가 후궁이 되겠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라틸이 집은 서류는 아트락시 공작가에서 보내온 서류로, 그곳에 적힌 이름은 라나문 브로트샤 드 아트락시. 아트락시 공작의 장남 이름이었다.
“본인 성격에 후궁이 되겠다 했을 리는 없고. 아트락시 공작이 밀어 넣은 거겠죠?”
라틸은 혀를 쯔쯔 차면서 서류를 내려놓았다.
“가엾어라.”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고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은 사람도 아니긴 한데. 그래도 제 아버지에게 등이 떠밀려 후궁이 될 라나문을 생각하니 약간 동정심이 들었다.
“아트락시 공작이 생각보다 참 욕심이 많은가 봅니다. 이 자존심 강한 애를 후궁으로 들이밀다니요.”
다시 한번 더 혀를 차면서도, 라틸은 라나문의 서류는 다른 쪽으로 빼냈다. 그러고는 나머지 서류를 시종장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아트락시 공작의 면은 세워 줘야죠. 공신이신데. 라나문은 무조건 넣고, 한 명은 카리센에서 올 테니, 나머지 세 명은 사블레 후작이 보고 도움 될 사람들로 추려 주세요.”
“도움 될 사람으로만 추리면 될까요? 달리 원하시는 기준은 더 없으십니까?”
라틸은 입 모양으로 ‘비슷한 수준이라면 미남으로’ 신호를 보내고서 히죽 웃었다.
“제가 안목 하나는 끝내주지요.”
시종장은 알겠다는 표시로 한쪽 눈을 찡긋한 후, 서류를 챙겨 근처에 놓인 자신의 책상으로 갔다. 시종장이 진지한 얼굴로 서류를 훑기 시작하는 걸 보며, 라틸은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즉위한 지도 어느새 보름이 훌쩍 지나갔다. 첫 일주일은 온몸이 무거울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고 정신이 없었는데. 사람은 어디든 적응하게 된다고, 그래도 지금은 그 바쁜 스케줄에도 많이 익숙해졌다. 급하게 황태녀가 되면서 일반적인 스케줄 이상으로 빠르게 후계자 교육을 소화해야 했는데, 그때 바쁘게 지낸 게 몸에 베인 덕이었다.
‘슬슬 카리센에 보낸 사절단도 도착하겠지.’
하이신스가 과연 어떤 답을 해올까. 라틸의 입꼬리가 짓궂게 올라갔다. 물론 하이신스는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