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아양이란 걸 떨어 보지요2020.04.01.
“예. 사절단 대표로 염두에 두신 분이 있으십니까?”
“브레타 백작에게 맡기도록 하지.”
관리는 라틸의 요구를 다 들은 후에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카리센의 황제인 하이신스는 황자일 때 이곳에 유학을 와 있었고, 그가 결혼할 때에는 라틸이 사절단 대표로 찾아갔다. 최근에는 타리움 쪽에서 후궁을 보내기도 했으니, 라틸의 요구는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관리가 나간 후. 라틸과 하이신스의 뒷이야기를 아는 시종장은 걱정스럽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폐하?”
시종장은 선황제 때부터 측근으로 있었기에 라틸이 하이신스의 결혼 소식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생생히 기억했다. 이후 후궁 요구에 얼마나 분개했는지도. 그러나 라틸은 비실비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괜찮았는데. 이제 괜찮아질 것 같다.”
“폐하…….”
“하이신스도 자기 손으로 내 남자가 될 이들을 고르면서 느껴봐야지.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어이없어 하려나? 황당해할까? 속이 훤히 보인다고 비웃을래? 아니면…… 너도 조금이라도 마음이 아플까? 어느 쪽이든 반응을 코앞에서 볼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거기까진 무리겠지.’
“그보다 사블레 후작. 아트락시 공작은 어떨 거 같아? 자기 아들을 나한테 보낼까?”
“라나문 군을 말씀하십니까?”
“어. 공작은 자기 아들을 국서로 밀고 싶어 했잖아. 후궁으로 보내면서까지 국서로 만들고 싶어 할까?”
“설마 그 정도이겠습니까.”
시종장은 어린 시절부터 코가 하늘까지 닿았던 라나문을 떠올리고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라나문 군이라면 아트락시 공작이 억지로 보내려고 해도 안 올 겁니다.”
* * *
“후궁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시종장의 예상과 달리, 먼저 후궁이 되겠다며 나선 건 라나문 쪽이었다. 아트락시 공작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방금 내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느냐?”
아들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아트락시 공작 역시 라나문이 절대로 후궁 자리에는 가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먼저 나서서 가겠다 하다니?
“황제가 후궁을 들이겠다 선포하였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후궁이 되겠다고?”
“예.”
라나문은 무덤덤하게 대답하고서 아버지를 응시했다. 엄청난 발언을 한 사람답지 않게 몹시 평온한 태도였다. 그러나 아트락시 공작은 더욱 놀라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라틸이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 아직 틀라 황자와 경쟁하고 있을 때. 라나문에게 국서 이야기를 꺼낸 건 아트락시 공작이었다. 그는 라나문에게 ‘장차 네가 국서가 될 것’이라면서 큰소리까지 떵떵 쳤다. 그래서 라틸이 후궁 이야기를 꺼냈을 때,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모른다. 자신의 계획이 일그러진 거야 그렇다 쳐도, 국서 자리를 호언장담했던 라나문에게는 무어라 말한단 말인가.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은 아들에게, 이 일을 대체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막막했다. 라나문은 무척이나 자존심이 강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몇 달 내내 집안을 얼음판으로 만들 게 분명했다. 그래도 말을 안 할 수는 없으니 민망한 기분을 삼키고서 이 황당한 소식을 전한 건데. 의외로 시원스럽게 후궁이 되겠다고 나오니, 오히려 공작이 당혹스러웠다.
“혹시 아들. 후궁이 뭔지…… 모르니?”
얘가 사교계에 관심이 아예 없는 편이기는 한데. 그래도 후궁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면 어쩌나. 모른다고 하면 뭐라고 알려주어야 하나. 공작은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라나문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행히 라나문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원래는 화월국의 제도였으나 오래 전 대문화 교류기 때 유행처럼 번져나가 자리 잡은 문화입니다. 그 이전에는 '황제의 정부'라고 불렸던 이들이지요. 물론 황제에게 선택되어 온전히 애인의 역할만을 한 정부와 달리, 후궁은 황제의 의사에 상관없이 바쳐지기도 하고, 목적에 따라 볼모의 역할도 한다 알고 있습니다. 대신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되어 황제의 하렘 안에서 지내는 건 물론, 정부의 자녀들과 달리 후궁의 자녀들은 황제의 아이로 인정받지요.”
“그렇지…….”
공작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과서대로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황후와 달리 공식적인 업무는 없으며, 황제에게 즐거움과 안정을 주는 게 그들의 최우선 역할입니다.”
실무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밤일을 잘해야겠죠.”
현실까지도.
“제가 비록 아직은 경험은 없으나 습득 능력이 빠르니,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칠 수 있…….”
“아들!”
아트락시 공작은 화들짝 놀라 라나문의 입을 틀어막았다. 성인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자식이었다. 그는 다 큰 아들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물론, 다 크지 않았다면 더욱 싫었겠지만. 라나문은 시큰둥하게 공작의 손을 치워냈다.
“이게 현실 아닙니까.”
“그런데도 가겠다고?”
네 성정에?
“예.”
라나문의 입꼬리가 차갑게 말려 올라갔다. 아트락시 공작이 걱정한 게 맞았다. 무덤덤한 겉모습과 달리, 라나문은 지금 자존심이 아주 많이 상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나오는 건 공작의 상상 이상으로 자존심이 더욱 많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라나문은 꼭 국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라나문에게 국서 자리란 ‘원하지 않지만 그냥 내가 해준다’ 정도의 위치였다. 그렇지만 다른 이에게 양보할 마음도 없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가 후보로 거론된 자리를 다른 이가 차지하는 건 불쾌하니까. 자신보다 못한 덜떨어진 놈들에게 국서란 이유만으로 허리 굽혀 인사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 뭐? 국서를 안 뽑아? 후궁을 들여? 후궁 중에 국서를 골라? 라나문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황제는 바보가 아니었다. 당연히 누가 가장 유력한 국서 후보였는지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국서를 안 뽑겠다고 선언한 건, 그를 국서로 들이기 싫다는 의견이나 다름없었다. 라나문은 이걸 인정할 수 없었다.
“제가 후궁이 되어서, 아양이란 걸 떨어 보지요.”
아양까지 떨려고……? 아들의 파격적인 말에 아트락시 공작이 흠칫 뒤로 물러났다.
“지금 들고 계신 게 후궁 관련 서류입니까?”
라나문은 서늘한 눈빛으로 아트락시 공작이 폐기하려던 서류를 빼앗았다. 그러고는 상의에 달린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서류 위에 거침없이 사인했다. 공작은 눈 깜짝할 사이 아들의 서명이 적힌 종이를 품 안에 안게 되었다. 라나문은 펜을 도로 집어넣으며 싸늘하게 예고했다.
“일 년도 못 지나서 황제는 절 국서로 올릴 겁니다, 아버님.”
“……그래. 그러기를 바란다, 나도.”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철저하게 준비해 주셔야 합니다.”
준비! 그 말에 아트락시 공작은 지금 자신이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아니란 걸 떠올렸다. 그래. 후궁이 되기로 결심한 이상, 이제 많은 준비를 해야 했다. 국서 자리를 놓고 치뤄질 후궁 간의 암투는 아마도 아주 치열하고 무서울테니. 공작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준비를 해줄까. 독? 최음제? 사람을 매수하는 거? 하인으로 위장해 데려갈 호위? 말하거라. 그게 무엇이든 내가 다 준비해주마.”
그 진지하고 매서운 말에 라나문은 고개를 마주 끄덕이고서 부탁했다.
“밤 기술에 대해 저술한 서책으로 부탁드립니다.”
“아, 아들!”
너 어디까지 준비해 가려고! * * * 브레타 백작은 의아했다. 나는 왜 뜬금없이 카리센으로 가는 사절단의 대표가 되었을까? 사절로 오간 경력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 경험 많은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친분 때문이라고 하기엔, 백작은 라트라실 황제와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가까울 수가 없었다. 라트라실 황제가 트라탈라 황자와 황좌를 놓고 쟁탈전을 벌였을 때, 그는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았으니까. 굳이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아마 트라탈라 황자 쪽을 골랐을 것이다. 그런 데면데면한 관계이기에,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 고민이십니까?”
수행인이 웃으며 하는 말에 브레타 백작은 퉁명스레 답했다.
“생각해도 이상하니 그러지. 혹시 안 좋은 다른 의도라도 있을까 봐.”
“어휴, 안심하십쇼. 첫 사절단 대표로 백작님을 직접 임명하셨다는 건 좋은 현상입니다.”
"그럴까?"
"그럼요."
수행인이 거듭 좋은 말을 반복해주자, 그제서야 백작은 약간 마음을 놓았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러나 카리센에 도착해 그곳의 황제에게 후궁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백작은 라트라실 황제가 굳이 자신을 사절단의 대표로 삼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카리센의 황제는 타리움 제국에서 온 사절은 모두 반가운 손님이라면서 제법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옆나라까지 소문이 자자한 수려한 얼굴 가득 반짝이는 미소를 뿌리면서. 그러나 그 눈부시던 미소는, 브레타 백작이 사절단의 목적을 밝히자마자 싹 사라졌다. 아니, 미소가 사라진 정도가 아니었다. 하이신스 황제는 낯빛이 하얗게 질려서는 아예 이를 꽉 악물기까지 했다.
“누가, 누구더러, 누굴 보내라고?”
한 마디 한 마디 끊어서 질문을 던지는데, 마지막에는 옥좌를 뽑아 던져버릴 기세였다.
“타리움의 현재 황제가 라트라실 황제 아닌가?”
“그, 그렇사옵니다.”
“그런데, 라트라실 황제가, 자기 하렘에, 넣을 남자를, 골라 달라고, 그쪽을 보냈다? 내게?”
눈치를 보아하니 하이신스 황제와 라트라실 황제는 사적인 친분이 있는 듯했다. 좋지 않은 쪽으로. 즉, 라트라실 황제는 하이신스 황제가 길길이 날뛸 걸 예상하고서 사이 나쁜 브레타 백작을 사절단 대표로 삼은 것이었다. 아니, 그래도 좀 너무하신 거 아닌가. 브레타 백작은 울상을 지었다. 속으로 틀라 황자 쪽이 ‘지금은’ 황위에 더 어울리다 여긴 건 맞지만, 그걸 밖에다 티 내고 다닌 것도 아닌데. 쾅, 엄청난 소리가 잠시 다른 곳으로 샜던 브레타 백작을 정신차리게 했다. 브레타 백작은 딸꾹질을 삼키고서 눈을 부릅뜨고 카리센의 황제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억울해할 때가 아니었다. 임무를 받았으니 영지를 포기하고 이민 갈 게 아니라면 시킨 일은 제대로 수행해야 했다. 브레타 백작은 최대한 사근사근한 어조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타리움의 황제 폐하께서는 카리센에 무한한 호의를 가지고 계십니다. 두 해 전에는 타리움에서 카리센으로 후궁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카리센에서 타리움으로 후궁을 보내 주신다면 두 나라가 두 개의 연으로 묶일 테니, 더욱 사이가 돈독해질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브레타 백작은 품 안에서 황제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꺼냈다.
“이건 라트라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시는 친서입니다.”
하이신스 황제의 뒤쪽에 서 있던 수석비서가 다가와 편지를 받은 후, 그걸 다시 하이신스 황제에게 전달했다. 브레타 백작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서 하이신스 황제를 바라보았다.
“…….”
하이신스 황제는 편지의 봉인을 이제 막 해제하고 있었다. 황제의 눈동자가 연한 금빛이 도는 고급스러운 종이 위를 샅샅이 훑었다. 브레타 백작은 두 손을 꼭 모아 쥐었다. 라트라실 황제 폐하께서 제발 좋은 말로만 편지를 쓰셨기를. 어느 고사처럼 편지 안에 ‘이걸 가져간 사람을 죽여라’ 이런 말은 없기를. 그러나 편지를 읽는 내내 하이신스 황제는 무표정해서 속을 알 수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하이신스 황제가 한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하이신스 황제의 표정을 확인한 브레타 백작은 헉 숨을 들이쉬었다. 도대체 편지에 뭐라고 쓰셨기에……? 하이신스 황제는 당장에라도 백작을 찢어 죽이고 싶단 얼굴이었다. * * * - 내 하렘에 들일 남자가 필요해. 내 취향 알지? 맞춰서 보내줘. 나 얼굴 봐. 그렇다고 성격을 안 보는 것도 아니야. 하렘에 들일 거니까 머리 좋을 필요는 없어. 하지만 대화가 가능한 수준은 됐으면 좋겠네. 갈색 머리에 회색 눈동자 조합은 피해줘. 네 생각 나서 기분 나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