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이번엔 네가 아플 차례야2020.03.29.
라틸이 다음 말을 하는 순간, 아트락시 공작의 표정이 그대로 얼어버렸다.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쨍’ 하고 부서질 만큼. 라틸은 애써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트락시 공작에겐 정말로 미안했다. 그러나 주위의 다른 사람들 역시 아트락시 공작과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다들 뜨악한 얼굴로 라틸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라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라틸은 그들을 위해 친절하게 풀어서 다시 한번 말해주었다.
“우선은…… 한 다섯 명 정도만 들이지.”
쥐 죽은 듯 조용하던 홀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웅성거리는 소리 중간중간 ‘다섯’이란 단어와 ‘하렘’이란 단어가 섞여 나왔다. 아트락시 공작은 뒤늦게 제정신을 차리고서 경악해 외쳤다.
“말도 안 됩니다, 폐하! 지금까지 여황제들이 몇 있으셨지만, 다들 국서 한 분만을 두셨습니다. 암암리에 정부라 소문난 남자들은 많았지만 대놓고 후궁을 들인 분은 아무도 없으셨는데, 어찌하여-.”
‘와. 짖지 않고도 개소리를 낼 수 있다니, 대단한데?’
“지고지순한 순정파라 이름난 5대 황제 트라시슈는 후궁이 다섯 명 있었고, 11대 황제 아인트라는 후궁이 여섯 명 있었소, 아트락시 공작. 기타 등등은 평균 열다섯 명의 후궁을 두었지. 좀 바람기 있다 싶은 역대 황제들은 스무 명 이상의 후궁들을 두었네만.”
“하지만…….”
“다들 두는 후궁을 왜 나는 못 둔단 말이오. 나도 역대 황제였던 분들처럼 최소 다섯 명 이상은 후궁으로 두어야겠소.”
라틸이 ‘나도 좀 순정파라’ 하고 덧붙이며 찡긋 웃자, 대신들의 입이 주먹만큼 벌어졌다. 그들은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라틸은 경악이 번진 귀족들의 얼굴을 한 번 주르륵 훑어보고서 한쪽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황제가 황후 하나만 두면 외척세력이 지나치게 힘을 키우니, 힘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다른 후궁들을 받아야 한다 주장하는 건 늘 대신들이 아니었소?”
라틸의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 바로 선황 때에만 해도 저 논리를 펼쳐서 아버지의 곁에 온갖 여자들을 떠다 밀던 이들이 실제로 저 인간들이었다. 이건 기억이 나는지, 대신들은 대번에 조용해졌다. 라틸은 장난치듯 눈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경들 역시 내가 후궁을 여럿 두는 편이 좋을 텐데? 그래야 황제 며느리를 둘 경쟁이라도 해 볼 수 있지 않겠소?”
지금까지 내내 통일되게 경악스러웠던 귀족들의 표정에 처음으로 차이가 나타났다. 아트락시 공작의 얼굴은 더욱 구겨졌다. 반대로 아트락시 공작을 제외한 다른 이들, 심지어 아트락시 공작의 일파들조차도 솔깃한 내색을 보였다. 나름대로 심각한 상황인데. 라틸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 다들 어쩌면 이렇게 속이 빤히 보일까.
“미혼이라면 경들이 직접 자원해도 좋소.”
라틸은 반은 장난으로, 하지만 일부러 표정은 근엄하게 하고서 말했다. 의도와 달리 받아들이는 쪽들은 무척 진지해 보였지만.
‘진짜로 자원하는 거 아냐?’
대신들은 한마디도 못 하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라틸은 턱에 힘을 꽉 주어 웃음을 참고서 이 일을 진행할 담당자들을 지정해주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어전회의가 끝난 후. 회의실 옥좌 뒤쪽으로 난 문을 통해 나가려다가, 라틸은 근처 책상에 앉은 서기관을 발견했다. 오늘 회의가 퍽 재미났나. 서기관은 눈을 빛내며 회의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다 라틸이 다가가자, 서기관은 기록하던 걸 멈추고서 놀라 벌떡 일어났다. 자기가 실실 웃던 걸 라틸에게 들켰을까 봐 겁먹은 얼굴이었다.
‘그게 뭐 겁낼 일이라고.’
“아, 서기관.”
“예, 예, 황제 폐하!”
“미리 말해두는데. 나중에 짐이 후궁을 다섯 명만 두거든, 꼭 이렇게 기록해 두시오.”
“예?”
“라트라실 황제는 ‘고작’ 후궁이 다섯 명뿐이었다. 뭐. 나중에 국서와 사이가 퍽 좋은 것 같거든, 순애보라 기록해도 좋고.”
“예?”
서기관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한 라틸은 몸을 돌려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라틸은 배를 잡고 주저앉았다. 대신들의 그 당혹스러워하던 표정이 떠올라서 더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
“폐하께서 내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단 말이오!”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아트락시 공작은 버럭 소리 지르며 예복을 거칠게 벗어 던졌다. 하녀들은 겁먹은 얼굴로 재빨리 그가 벗어둔 옷가지를 주워들었다. 대관식에는 참여했으나 어전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던 공작부인은 얼른 공작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전회의는 어땠나요? 폐하께서는 회의를 잘 주관 하시던가요?”
“아주 잘하시더군. 지나치게 잘하시오.”
“잘하면 잘하는 거지, 지나치게 잘하는 건 무슨 말이에요?”
“첫날부터 대신들을 손바닥 위에 펼치고 노시더란 말이오.”
“그 정도인가요?”
공작부인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트락시 공작은 콘솔 위에 놓인 독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니, 이 사람이. 술만 마시지 말고 뭔 일이 있었는지 말을 해 주셔야지요. 폐하께서 당신에게 박하게 굴던가요? 당신이 폐하를 도와주신 공로를 싹 잊어버리고 대하신다거나…….”
“거기에 대한 치하와 보상은 확실하게 약속해 주셨소.”
“그럼 뭐가 문제인 건가요? 말을 뱉어야지요. 입에 뭘 넣지만 말고.”
공작부인은 부드럽게 질문하면서 동시에 공작이 쥔 술병을 빠르게 낚아챘다. 아트락시 공작은 황망한 시선으로 공작부인을 쳐다보았으나, 그녀의 눈꼬리가 점점 매섭게 올라가는 걸 보고는 엉거주춤 붕 떠 있던 손을 내렸다.
“폐하께서는 아직 국서를 들일 마음이 없으시다더군.”
“그것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요?”
공작부인이 혀를 찼다.
“내년이든 후년이든, 그 문제는 천천히 진행해도 괜찮잖아요. 어차피 대신들은 내내 후계자 문제로 폐하를 쪼아댈 테고, 결국 몇 년 못 가 마음을 돌리실 텐데.”
“그것뿐이면 그렇겠지.”
“뭐가 더 있나요?”
“후궁을 들이시겠다고 하셨소, 후궁을!”
“…….”
이번에는 공작부인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며 나무 인형처럼 서 있었다. 후궁…… 후궁……?
“후궁이라고요?”
뒤늦게 공작부인이 기겁해 외치자, 아트락시 공작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황제 며느리 운운하시는 걸 보니, 후궁 중에서 국서를 뽑을 생각이신 듯하더군.”
“세상에. 여자 황제 중에 후궁을 들이겠다 하신 분은…….”
“없으셨지.”
공작부인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라나문을 생각하면 속상한 일이기는 한데. 개인적으로는 좀 재밌네요.”
“이게 재밌소?”
“그럼요. 최초로 남자 후궁들이 탄생하는 거잖아요.”
공작부인은 본인의 말처럼 감정이 복잡한 듯, 우는지 웃는지 알기 힘든 얼굴이었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됐으니 우리 라나문이 국서가 되긴 힘들겠군요.”
“그렇겠지.”
공작은 아들의 고고하고 오만한 성품을 떠올리고서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존심 강한 성격에 하렘에 들어가려 들진 않을 테니.”
* * * 황제가 된 후 처음으로 맞는 아침이었다. 라틸은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고서, 아침 햇살을 온몸으로 맞았다. 약간 촉촉하면서도 신선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꿈을 꿨다. 하이신스가 5년만 기다리라며 자신을 버리고 간 그날의 꿈을. 종종 라틸을 괴롭게 하던 그 꿈은 황제라는 신분으로도 물리칠 수 없나 보다.
‘하필 황제가 되고 처음 꾸는 꿈이 하이신스라니…….’
라틸은 속으로 구시렁거렸으나, 평소와 달리 꿈의 후유증이 크진 않았다. 어제의 대관식 덕분이다.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서 가슴 한구석을 설레게 했다. 하렘을 선언한 일 역시도 뒤늦게 가슴에 이상한 바람을 불게 했다. 여러 감정적 정치적 목적으로 선언을 하긴 했는데. 어쨌든 최소 다섯 명은 자신의 남자가 된다는 말 아니던가.
‘어색할 것 같기도…….’
라틸은 머쓱하게 이마를 긁적이다가 순간 멈칫했다. 하이신스. 그래…… 하이신스. 라틸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뒤틀렸다. 어쩌면 오늘 하이신스의 꿈을 꾼 건, 이제 복수의 기회가 다가왔다는 신호 아닐까? 아주 적절하게도 잠시 잊고 있었던 엿 같은 일화도 기억났다. 라틸이 황태녀일 시절. 카리센에서 하이신스 황제의 후궁을 보내 달라는 사절단이 찾아왔었다. 말이야 나라 간의 교류가 어쩌고 친목이 어쩌고 서로를 위한 어쩌고 구구절절하였으나, 중요한 건 하이신스가 감히 자신이 있는 나라로 그런 사절단을 보냈다는 것. 강대국 간에 볼모 겸 후궁을 주고받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지만, 라틸로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라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그땐 그냥 이만 갈았는데.
“어쩌냐 하이신스. 똑같이 되돌려 줄 수 있게 됐네.”
* * *
“조세 제도는 개편이 약간 필요합니다. 비록 반년일 뿐이지만 수도 부근의 물자가 그 기간에 제대로 유통되지 않은데다 인근에서 소규모 전투가 연달아 계속된 터라, 다른 지방에 비해 수도의 물가가 기형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수도만 세금을 낮추자니 다른 곳에서 반발이 심할 테고. 덩달아 낮추면 멀쩡한 지방에서 들어오는 조세가 낮아질 테고. 다른 지방 수준에 맞추자니 수도에 사는 국민에게 부담이 되겠군.”
“예.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으셔야 할 듯합니다.”
“물가가 잡히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일이 걸리겠소?”
“폐하의 즉위식을 전후로 하여 방문객과 외국 상단과의 거래량이 급증하였습니다. 유통은 이미 활발해졌으니 물가가 잡히는 데에도 오래 걸리지 않을 듯합니다.”
“경들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세금을 낮추면 당장 평민들의 지지도는 올릴 수 있겠지만, 이후 세금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과정에서부터 불만이 나올 겁니다. 경기는 빠르게 회복될 수 있으니 차라리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게 낫다 여겨집니다.”
“하지만 폐하, 현 상태를 유지하는 건 평민들에게 부담이 갑니다. 빠르게 회복이 될 거라 한들, 최소 한두 달은 힘들 터인데. 무리한 요구를 지속했다가는 오히려 불만이 당장 일어날 것입니다.”
라틸이 틀라 황자와 충돌한 기간은, 사실 평균적인 황위 쟁탈전과 비교하면 그리 긴 기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싸움이 수도에 집중되어 일어났나 보니, 그 영향력을 받은 곳도 거의 수도뿐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 탓에 균일한 정책을 펼치기가 힘들었다. 라틸은 자기들끼리도 의견이 갈라진 재무부 관련자들 사이에서 첫날부터 골머리를 앓았다.
‘확실히 실무는 다르구나.’
책에서 볼 때와 달리 변수가 많다. 옳고 그른 답이 정해지지 않단 점도 책임감을 한층 막중하게 만들었다. 황태녀 시절에는 오답을 짚으면 부황이든 재상이든 스승이든 오답이라 알려주었지만, 이젠 그 과정이 없지 않던가. 라틸이 오답을 짚으면 그게 곧 백성의 미래였다. 거의 다섯 시간에 걸쳐 이 문제를 논의한 후. 라틸이 완전히 진이 빠져서 책상에 뻗자, 내내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시종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많이 피곤하신가 봅니다.”
“생각보다 골치 아프네.”
라틸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폐하께서는 잘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다음으로 라틸이 결정해야 할 일은 대관식에 선언한 하렘 문제였지만, 다행히 이 사안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대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렘 문제를 전담한 관리가 들어와서 이것저것 서류를 보여주며 설명하는 사이, 라틸은 편안하게 웃고만 있었다.
“후궁으로 들어오기 전에 보통 이 서류에 사인을 시킵니다. 표준 양식은 이것이지만 따로 폐하께서 원하는 조건을 추가하실 수도 있습니다.”
관리가 서류를 내려놓자, 라틸은 짓궂은 미소를 굳이 감추지 않고서 내내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아. 따로 더 추가할 건 없네. 그보다…… 다양성을 위해서, 그리고 국교를 위해서 다른 나라의 후궁도 두고 싶은데.”
“예, 폐하. 말씀하신다면 사절단을 보내겠습니다. 어느 나라로 보낼까요?”
라틸의 속내를 모르는 관리는 두 손을 모으고서 라틸의 명령을 기다렸다. 라틸은 책상에 팔을 괴고서 발랄하게 지시했다.
“카리센으로 보내시오. 하이신스 황제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