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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일단 후궁부터 들이겠다 (8/367)

8화. 일단 후궁부터 들이겠다2020.03.25.

대관식 날. 황제의 예복을 입은 라틸은 거울 앞에 서서 감회에 젖었다.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벅차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16551067089288.png“유모, 생각나? 6년 전 말이야.”

라틸은 털이 보송보송한 빨간 망토 속에서 손을 꿈틀대며 물었다.

16551067089288.png“난 그땐 황후가 되고 싶어 했잖아. 카리센의 황후.”

16551067089298.jpg“아무렴요. 다 기억하고 있지요.”

유모는 라틸을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눈물을 찔끔 흘렸다.

16551067089288.png“좋은 날에 왜 울고 그래, 유모.”

16551067089298.jpg“어휴. 죄송합니다. 주책없이.”

라틸은 다가가서 얼른 유모를 끌어안았다.

16551067089298.jpg“그저 황후 폐하께서 이 모습을 꼭 보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싶어서…….”

16551067089288.png“유모,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이상한 오해하겠어. 어마마마 건강히 잘 계시잖아. 보여드리면 돼.”

라틸은 푸핫 웃음을 터트리며 유모의 등을 토닥거렸다.

16551067089298.jpg“압니다. 대관식을 못 보시니 그렇지요. 대관식은 특별한 날인데…….”

16551067089288.png“음. 대관식 복장을 비슷하게 만들어서 입고 보여드리면 되지 않아?”

16551067089298.jpg“황제 폐하가 되시면 더 바빠지실 터이고, 이제는 행동 하나하나에 제약이 따르실 터인데. 그 먼 신전까지 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16551067089288.png“그래도 한 번은 가봐야지.”

어마마마가 직접 돌아오시면 더 좋겠지만. 라틸은 이루어지기 힘든 소원은 속으로만 삼켰다. 유모는 눈가를 소맷자락으로 쓱쓱 닦으며, 울음을 참느라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16551067089298.jpg“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16551067089288.png“응.”

라틸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16551067089288.png“우리 유모, 예전에는 나보다 훨씬 컸는데. 내가 품 안에 쏙 들어갔잖아. 이젠 유모가 내 품에 쏙 들어와.”

16551067089298.jpg“황녀님…….”

16551067089288.png“고마워. 늘 옆에서 도와주어서.”

유모가 옆에 있으면 라틸이 해이해진단 이유로, 선황제는 라틸이 후계자 수업을 받는 동안 유모를 해고해 버렸다. 이 때문에 유모는 원래의 영지로 돌아가 있었고, 덕택에 틀라 황자가 근 1년간 황궁을 탈취했는데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16551067089288.png“어휴, 눈 빨개지면 안 되는데.”

라틸은 유모를 놓아주고서 찡한 눈가를 닦았다. 오늘은 감동에 겨워도 울면 안 되는 날인데. 유모가 울고 있으니 덩달아 자꾸 눈물이 나왔다. 라틸은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몇 번 두드렸다.

16551067089288.png‘울지 마.’

그래, 울면 안 되지. 자신을 도와주었던 이들과 미심쩍게 보는 이들, 틀라 황자를 돕진 않았으나 속으로는 그를 지지했던 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했다. 누가 황제인지. 자신이 얼마나 위엄에 차 있는지를. 그런데 막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 할 때였다.

1655106711753.png“페하. 레이시안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서넛 기사단장이 레안의 방문을 알려왔다.

16551067089288.png“오빠가?”

라틸은 기뻐서 직접 문을 열고 오빠를 맞이했다. 대관식 날, 레안은 전 황태자였던 자신이 모습을 보이는 건 좋지 않으니 참석하지 않겠다고 불참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이렇게 슬쩍 깜짝 방문을 해주니 기분이 좋았다.

16551067089288.png“마음을 바꾼 거야? 역시 동생 멋진 모습을 보고 싶은 거지?”

그러나 막상 들어온 레안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16551067089288.png“왜 그래?”

라틸이 걱정스레 묻자, 레안은 등받이 없는 붉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16551067146124.png“아예 안 오면 네가 섭섭할 것도 같고. 할 말도 있어서 잠시 온 거야. 공식적으로 온 게 아니니 다시 가볼 거고.”

16551067089288.png“진짜 참석 안 해 줄 거야?”

16551067146124.png“그게 낫다고 생각해. 그보다 라틸. 네가 틀라를 처형시키고 아낙차를 유폐시켰다고 들었는데.”

16551067089288.png“어.”

16551067146124.png“꼭 틀라를 처형시켜야 했어?”

16551067089288.png“할 말이 잔소리였어?”

라틸은 뚱한 얼굴로 레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레안은 한숨을 내쉬고서 라틸의 손을 가져다 잡았다.

16551067146124.png“라틸. 틀라와 우리가 사이가 나쁘긴 했지. 황궁을 탈취하면서 최악으로 멀어졌고. 그래도 걔는 네 오빠야. 내 동생이고. 우리는 한 핏줄이야.”

16551067089288.png“알아.”

16551067146124.png“그런데 꼭 피를 보아야 했을까? 지나치게 피를 보는 건 좋지 않아. 집권 초반에는 인자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

16551067089288.png“오빠는 정통성으로 무장한 황태자였으니까 그렇겠지. 오빠는 반대 세력이 거의 없었잖아.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황태녀 시절 내내 틀라와 오빠, 다른 형제자매들과 비교당했어. 나보다 더 나은 선택지를 찾고자 하는 귀족들이 수백 명이었다고.”

16551067146124.png“!”

16551067089288.png“나는 인자한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었어. 강한 모습이 필요했지. 그리고…….”

몸을 반쯤 일으킨 라틸은 레안의 귀에 대고서 속삭였다.

16551067089288.png“난 내 사람 백 명의 피를 보느니, 적 천 명의 피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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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호하게 말한 라틸은, 무서운 말을 한 것과 달리 해맑게 웃었다. 레안은 한숨을 내쉬고서 이마를 짚었다. 라틸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는단 뜻이었다. 그러나 레안은 더 잔소리를 하진 않았다. 황제가 될 사람은 동생이었고, 고난을 헤쳐온 이도 동생이었다. 자신이 두려워 가지 못한 길을 가려는 동생에게 필요한 건 잔소리가 아니라 신뢰였다. 레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라틸을 품에 꼭 안았다. * * * 레안이 돌아간 후, 더는 주저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라틸은 대관식이 진행될 대연회장으로 나갔다. 대연회장의 가운데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고, 그 주위로 온갖 귀족이며 관리들이 모여 있었다. 한쪽에는 대신전에서 온 신관들이 황제의 관을 둘러싼 채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라틸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이상하게도 긴장감이 사라졌다. 준비를 하는 내내 미치도록 가렵던 혓바닥이 점점 멀쩡해지고 있었다. 커다란 북과 나팔 소리와 함께 라틸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양 옆으로 더욱 물러나자 황제의 자리로 가는 길이 또렷해졌다. 라틸은 귀족들을 쳐다보는 대신, 붉은 융단의 끝에 놓인 황관을 주시했다. 그리고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황관을 향해 걸어갔다. 황관 앞으로 다가와 멈추어 서자, 고위 신관이 조심스럽게 관을 들어 건넸다. 라틸은 황관을 자신의 머리 위에 얹고서 작은 단을 올라갔다. 황관이 삐뚜름하게 써지면 어쩌지, 폼이 안 날 텐데. 유모에게 초조하게 물어대던 황녀는 이곳에 없었다.

16551067089288.png‘내가 황제다.’

라틸은 옥좌 앞에 선 채 충족감에 가득 차서, 낮은 위치에 선 귀족과 대신들을 한 번 주르륵 훑었다. 모인 사람들은 하나둘씩 한쪽 무릎을 꿇고서, 충성의 표시로 머리를 조아렸다. 마침내 모든 이들이 머리를 숙인 순간. 라틸은 척추를 관통하는 희열을 느꼈다. * * * 타리움의 관례에 따라서 라틸은 대관식을 마친 그날 저녁, 첫 번째로 어전회의를 주관했다. 첫 번째 어전회의는 세세한 일들을 짚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자신이 어떤 통치를 보여줄 것인지, 국정 운영의 전반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이었다. 또한, 이날에는 고위 관직자가 새로운 황제 측 사람들로 교체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라틸은 틀라 황자와 연루되어 공석이 된 자리만을 새 사람으로 채우고, 대다수의 장관은 아버지 때와 비슷하게 유지하기로 하였다. 멜로시 영지에서 보낸 세월을 제외하고, 라틸이 황태녀 생활을 한 건 고작 2년이었다. 그 사이에 온전히 자신만의 사람을 만들기도 어려웠을뿐더러, 친 황제파의 대다수가 아트락시 공작을 따라 라틸 자신에게로 붙었기 때문에 굳이 교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측근들은 아직 한창 활동할 나이였다. 다급하게 구시대를 밀어내기보다는, 기존의 뛰어난 경력자들을 그대로 유지해 나가면서 천천히 자신에게 맞춰가려는 게 라틸의 계획이었다. 당연히 반발할 것도 없어서 어전회의는 불만 가진 사람 없이 술술 흘러갔다. 그러나 라틸의 배우자와 후계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졌다. 대신들은 의견이 충돌하기 시작했고, 내내 평화롭던 라틸의 표정은 미약하게 굳어갔다. 황제에게 후계자는 중요하다. 라틸은 그들이 첫날 어전회의에서 후계자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기분이 상한 건 아니었다. 라틸이 기분 나쁜 건, 은근히 그들 사이에서 흐르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16551067089298.jpg“황후는 물론 후궁을 여럿 두고 후계자를 낳을 수 있던 선황제들과 달리, 폐하께서는 한 분의 국서밖에 들이실 수 없지 않습니까.”

16551067089298.jpg“그러니 최대한 빨리 국서를 맞이해 황가의 안정을 꾀해야 합니다.”

16551067089298.jpg“폐하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후계자를 만드는 일을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16551067089298.jpg“조속히 국서를 들이는 일에 치중하소서.”

라틸은 왕홀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면서 대신들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고개를 비틀었다. 이 사람들 말하는 거 좀 보게? 빨리 후계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 자체는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었다. 황제의 가정사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역대 황제들의 어전회의에서도 늘 이 문제는 거론되었다. 성질 더럽기로 유명했던 한 황제는 “내가 종마냐”고 외치면서 왕홀을 집어던진 사례도 있었다. 라틸이 기분이 상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16551067089288.png‘왜 나는 한 명의 국서만 들여야 한다는 거지? 이 사람들 이상하네? 내가 후궁을 못 들인다고, 되게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네?’

하렘을 만들기 위해 황제가 되려던 건 아니었다. 하렘을 만들 걸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황태녀가 된 후로 조금의 쉴 틈도 없이 달려왔기에 이런 쪽은 아예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하이신스를 떠올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황제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코앞에 있는데. 하렘까지 생각할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대신들이 눈앞에서 ‘여자 황제이시니 후궁은 못 들일 것’이라는 전제를 아예 깔아둔 채 국서 이야기를 하고 있자 괜히 오기가 들었다. 라틸은 황태녀 시절에 역대 어전회의 기록을 몇십 번이나 읽었다. 특히 첫날의 어전회의에 관한 부분은 최근까지도 계속 읽어서, 거의 달달 외울 지경이었다. 그 모든 어전회의에 황후와 후계자에 대한 독촉이 나왔고, 후궁 이야기는 그보다 더 많이 나왔다.

16551067089288.png‘그런데 나는 한 명의 국서만 맞이하라고? 여자 황제는 후궁이 없다고?’

대신들이 먼저 후궁 이야기를 꺼냈더라면 좀 달랐을까. 그건 겪지 않아서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당연히 만들지 않을 거라 여기니 꼭 만들고 싶어졌다. 라틸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레안 오빠에게도 미리 이야기했듯, 라틸은 강한 군주가 될 생각이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레안과, 틀라와, 그리고 다른 황족들과 비교할 이들에게 휘둘릴 마음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16551067089288.png‘생각해 보니 괜찮네. 하렘.’

안 될 거 없지 않나? 어차피 지금 당장 국서를 맞이할 마음도 없는데?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째.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라틸은 아직 하이신스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바쁜 일상 덕에 하이신스를 잊을 수 있었지만, 남편이란 말을 듣자마자 바로 하이신스와 그가 준 아픔이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당장 ‘진짜’ 남편을 맞이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이유 둘째. 자신의 기반을 확실하게 닦기 전에 국서에게로 권력이 분산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완전히 아무도 들이지 않는다면, 국정을 이끌기는커녕 매일같이 후계자 이야기로 닦달을 당할 터. 하렘을 만들어 후궁들을 몇 명 들인다면, 그들이 최소한 후계자 문제에 관해서는 훌륭한 방파제가 되어 줄 것이다. 생각을 마친 라틸은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16551067089288.png“경들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였다.”

라틸이 입을 열자, 주위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라틸은 문득 쾌감을 느꼈다. 자신의 한마디에 온갖 장관이며 대신, 고위 귀족들이 조용해지는 건 야릇한 느낌이었다. 하이신스…… 그래. 이 느낌 때문에 너는 날 버린 걸까?

16551067089288.png“경들의 말이 옳아. 황가의 안정은 탄탄한 후계자들에게서 오는 법. 빨리 국서를 맞이하라는 경들의 말, 충분히 이해해.”

라틸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트락시 공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일찍이 라틸을 지지하면서 황제의 공신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그는, 아마 라틸의 입에서 자기 아들 라나문 이야기가 나올 거라 생각할 것이다. 조금 전까지 대신들이 수시로 언급하던 유력한 국서 후보 역시 라나문이었다. 외모며 가문, 아트락시 공작의 업적, 나이대까지. 라나문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완벽한 국서감이었으니까. 라틸은 아트락시 공작의 입가에 슬며시 떠오른 미소를 보았다.

16551067089288.png‘공작한텐 좀 미안해지네. 많이 도움을 받았는데.’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16551067089288.png“그래서, 우선 후궁들을 들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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