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우리 아들도 황후가 될 수 있어요!2020.03.22.
2년 간 라틸은 바쁘게 생활했다. 레안을 가르치던 황태자 교육이 그대로 라틸에게로 옮겨졌으나, 레안 때보다 일정은 빡빡했다. 레안이 어릴 때부터 받아온 교육을 짧은 시간 내에 승계해야 하다 보니 스승들은 더욱 엄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틸은 불만 없이 모든 일정을 제대로 따라갔다. 틀라에게 지고 싶지 않았고, 틀라의 어머니인 아낙차 후궁의 기대를 꺾어버리고 싶었고, 손에 들어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이신스 역시 뜻밖에 도움이 되었다. 그가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건 아니었다. 다만, 조금만 여유가 생겨도 하이신스 생각이 났기 때문에, 라틸은 그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정하던 황제가 황궁 내에서 암살 당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가 암살을 당하다니?”
“얼른 환궁하셔야 합니다, 황태녀님!”
오빠인 레안을 만나기 위해 한 달여간 황궁을 비웠던 라틸은, 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다급히 신전을 떠났다. 서넛 기사단장과 함께 최대한 빠르게 말을 몰아 수도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갑자기 암살로 돌아가셨다니? 급히 전해진 소식은 슬프기보다는 믿기지조차 않았다. 그러나 라틸은 환궁은커녕 수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말을 돌려야 했다.
"도망치셔야 합니다. 틀라 황자가 궁을 사병으로 장악한 후, 황태녀님을 잡으려 합니다."
그나마 예전에 라틸에게 치하받은 위병이 알려준 덕에, 라틸은 틀라 황자에게 잡히지 않고 수도를 떠날 수 있었다. 라틸은 서넛 기사단장의 아버지가 영주로 있는 인근의 멜로시 영지로 우선 대피했다. 그 곳에서 며칠을 지낸 끝에야 라틸은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틀라 황자가 폐하의 시신을 이용해 친황제파의 움직임을 묶고 유언을 조작한 듯합니다."
"영주와 고위 귀족들을 불러 충성 맹세를 받으려 하겠군요."
"예,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됩니다. 황태녀님과 틀라 황자 사이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중립파들이 많지 않습니까. 틀라 황자가 그들을 설득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사태를 뒤집어야 합니다."
총지휘권자가 사라진 이상 황실의 근위기사단과 군대는 아직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다. 라틸이 집결시킬 수 있는 사병의 수는 틀라 황자보다 많은 편이지만, 틀라 황자가 황제의 시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수도 내에서 황위다툼 전쟁을 벌였다가는 국민들의 신뢰도가 뚝 떨어질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틀라 이 개새끼. 내가 언젠가 사고를 칠 줄 알았지.’
라틸은 속으로 욕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가장 세력이 큰 아트락시 공작을 설득해야겠군요.”
* * * 아직 살 날이 창창하리라 여겨졌던 황제가 암살당하자, 귀족들 사이에서도 난리가 났다. 라틸을 지지하는 이들은 분노했고, 틀라를 지지하는 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귀족 중 가장 세력이 큰 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친황제파였다. 가장 혼란에 빠진 이들도 친황제파였다. 황제가 암살당한 충격도 충격이지만, 그들은 당장 결정해야 했다. 누구를 편들어야 할지, 누구를 도와야 할지, 사태를 방관해야 할지. 복수와 진상 조사는 그다음의 일이었다. 나라와 국민에게는 우선 나라의 중심을 잡아줄 새로운 황제가 필요했다. 그러나 양위 시점이 한참 남았다 여겨서, 느긋하게 황태녀의 성장을 지켜보려 했던 친황제파는 갑작스럽게 닥친 소식에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정통성이 없지만 준비된 황자. 정통성은 있지만 준비되지 않은 황태녀. 어느 쪽이 나라에 도움이 될 것인가, 그리고 어느 쪽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귀족들은 바쁘게 주판을 두드렸다. 아트락시 공작의 저택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부인과 이 사태에 대해 한참 의논 중이었다.
“당연히 라트라실 황태녀님을 도와야지요!”
그러나 의외로 공작 부인의 의견은 단호했다. 부인의 단호한 말에 아트락시 공작은 “그렇소?” 하고 자신 없이 물었다.
“그럼요!”
아트락시 공작은 초조하게 방 안을 오가며 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부인. 일단 가만히 두고보는 게 낫지 않겠소? 나라에는 강한 황제가 필요하지 않소. 나도 황태녀님이 오르는 게 심정적으로야 더 좋긴 하지만, 그보다는 황태녀님이 이 난관을 혼자 이겨내시는 걸 보고 싶소."
공작 부인은 혀를 찼다.
“난관을 혼자 이겨내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승기를 잡은 쪽으로 확실하게 갈아타고 싶으신 게 아니고요?”
“솔직히 말하자면…….”
“여보. 이럴 땐 모험이 필요해요. 황태녀님이 난관을 이겨내는 걸 지켜보겠다고요? 그분이 황제 폐하가 되어 잘 나갈 때에도 그저 입만 버리고 지켜보게 될 겁니다. 어려울 때 도와야 황태녀님도 우리를 챙겨 주시지요.”
그래도 아트락시 공작이 별 대응이 없자, 공작부인이 눈을 치켜떴다.
“당신은 틀라 황자가 이대로 황위를 차지해도 상관 없나요? 어째 반응이 밍밍한데?”
“틀라 황자도 황녀님만큼 영민하지. 지나치게 몽상가이긴 하지만, 그거야 실전에 부딪치면 한계를 느끼며 고쳐질 단점이라 생각하오.”
“뭔 소리야. 영민하기야 우리 황태녀님이 아주 똑 부러지시지요.”
“아오. 아는데, 제왕학 교육을 겨우 2년 밖에 안 받았으니 문제 아니오. 세상에. 어느 황제가 2년 밖에 안 배우고 황제 자리에 오른단 말이오.”
공작부인은 남편의 갑갑한 태도에 어휴 어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답답한 사람! 여보. 생각 좀 해 봐요. 우리에겐 아들만 셋입니다.”
“그게 중요하오?”
“중요하지요! 아들이 셋인데, 차남인 펌크슈가 틀라 황자와 머리채를 잡고 싸운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거야 어릴 때 일이고…….”
“어릴 때 싸웠지만 지금도 사이가 나쁘잖아요.”
공작 부인은 콧김을 흥 내뿜고는 아트락시 공작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설명했다.
“틀라 황자가 집권해 봐야, 잘되면 현상 유지이고 잘 안 되면 펌크슈 일로 괜히 사이가 틀어질 겁니다. 하지만 라틸 황태녀님이 집권할 경우를 생각해 봐요.”
“?”
“어휴, 진짜 이 사람이? 당신, 우리 장남 라나문을 생각해 보라구요. 그 애는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타리움 제국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남자잖아요!”
“아!”
공작이 그제야 탄성을 질렀다.
“라틸 황태녀님이 집권한다면, 잘 안 돼도 현상 유지이고, 잘되면 우리 라나문을 국서로 만들 수도 있다 이거예요. 카리센 소식 몰라요? 다가 공작이란 자가 처음엔 헤움 황자를 지지하다가 냉큼 하이신스 황제에게 갈아타 놓고서는, 그 대가로 자기 딸을 황후로 만들었다잖아요. 우리 아들이라고 안 될 게 뭐예요?”
“그런가?”
“그럼요! 우리 아들도 국서가 될 수 있어요!”
* * * 의외로 멜로시 영지로 먼저 사람을 보내온 건 아트락시 공작이었다. 그가 찾아왔을 때, 라틸은 아트락시 공작을 끌어들일 방법이 무엇인지 서넛 기사단장과 한창 의논하던 중이었기에, 놀라서 달려나갔다. 게다가 공작은 수행원을 보내는 정도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찾아와 라틸을 더욱 놀라게 했다. 심지어 회색 로브를 걸친 수려한 남자까지 함께 데려왔는데, 라틸은 보자마자 그가 공작의 장남인 라나문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라나문은 유명했다. 사교계에 나오는 걸 귀찮아해서 대부분의 파티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나올 때마다 가십지를 혼자 도배했고, 그를 짝사랑해서 마음고생 중이라는 영애가 라틸이 알기로 최소 열다섯 명이었다. 어리둥절한 라틸에게 아트락시 공작이 따뜻하게 위로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황태녀 전하.”
“와주어서 고맙습니다, 공작.”
“이 아트락시만 믿으시면 됩니다. 제가 반드시 황태녀 전하의 모든 걸 되찾아드릴 것입니다.”
이 정도로 나한테 사근사근하던 사람이었나? 라틸은 공작이 인자하게 웃으면서 하는 말에 고마워하면서도 어리둥절해졌다. 갑작스레 친근하게 구는 것 같긴 한데. 지금은 아트락시 공작의 도움이 절실했으니까. 아트락시 공작은 그런 라틸을 미래의 며느리 보듯 다정하게 바라보다가, 얼른 손을 들어 아들의 등을 앞으로 떠밀었다. ‘이놈은 좀 눈치껏 나긋나긋하게 굴 것이지, 왜 이러는 거야?’ 하고 속으로 툴툴거리면서.
“여기는 제 아들인 라나문입니다, 황태녀 전하.”
무표정하게 서 있던 라나문은 얼결에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어영부영하는 사이 라틸과 코앞에서 대면하게 된 라나문은, 아버지를 차갑게 쏘아보고는, 라틸에게 마지못해 인사했다.
“……라나문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태녀 전하.”
라나문은 사교계뿐만 아니라 정치 쪽으로도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파티만이 아니어서, 라틸은 궁전 내에서 한 번도 그를 마주친 적이 없었다. 다른 후계자들은 후계자 수업이니 기사단 준비니 하면서 여기저기 쏘다니는데, 유독 라나문은 그런 활동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데 데려왔지? 게다가 왜 저렇게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따라왔어? 라틸은 의아해하면서도 라나문의 인사를 받았다.
“아아, 그래.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라틸과 라나문을 번갈아 보며, 아트락시 공작은 흐뭇하게 감탄했다.
“하하. 전하나 우리 아들이나 둘 다 멋진 흑발이라 그런가, 함께 있는 모습이 한 쌍의 원앙 같습니다.”
“예?”
뜬금없는 원앙 이야기에 라틸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라나문이 공작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뭐야? 왜 저래?’
* * * 서넛 기사단장이 라틸에게 붙으면서, 원래라면 중립을 지켜야 하는 황실 근위기사단도 자연스럽게 라틸의 편에 섰다. 아트락시 공작은 친 황제파를 설득해 주었고, 원래 라틸을 지지하던 이들 역시 멜로시 영지로 모여들었다. 라틸은 상인들을 풀어 수도 내에 ‘틀라 황자가 황태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강제로 황위를 뺏어가려 한다. 황태녀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할 수 있지만, 수도에 사는 국민에게 피해가 갈까 봐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내도록 했다. 하지만 틀라 황자 역시도 이에 빈틈없이 대항해갔으므로, 황궁을 다시 차지하는 게 생각만큼 수월하지는 못했다. 틀라 황자는 라틸의 여론 형성에 똑같이 대응했다. 황제가 원래 황태녀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 한 건 맞지만, 암습을 당한 후 라틸 황태녀의 교육 기간이 짧았던 점을 염려하며 트라탈라 황자를 후계자로 바꾸겠다는 유언을 남겼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렸다.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소문이었지만, 이 소문은 라틸의 짧은 교육 시절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자극했다. 황제가 황태녀를 더 예뻐했다는 걸 인정한 소문이기에 오히려 더 그럴듯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어느 한쪽도 확실하게 우호적인 여론을 선점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제국민들 역시도 술집이나 식당에 모일 때마다 누가 황제 자리에 올라야 하는지에 대한 말다툼을 할 지경이었다. 수도 인근의 평원에서 세 차례에 걸친 소규모 전투가 이루어지며 지지부진하게 경쟁하기를 반년. 라틸은 계략을 내었다.
“다른 나라를 이용해야겠습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외세는 잘못 이용하면 양날의 검이 됩니다.”
“지지 서명만 받을 겁니다.”
“쉽지 않을 텐데…….”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라틸은 인근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경험이 부족한 데다 유약한 군주란 걸 일부러 어필했고, 이 점을 이용해 외국의 지지를 끌어냈다. 외국인들은 강력한 옆 나라 군주를 원하지 않을 거라는 점을 역으로 이용한 전략이었다. 그리고 인근 국가들이 모두 라틸을 지지하면서, 마침내 수도를 다시 수복하고 궁전에 들어가 틀라 황자를 감옥에 가둘 수 있었다. 틀라 황자의 모친인 후궁 아낙차는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나와서 라틸에게 애원했다.
“황태녀 전하, 제발 한 번만 제 아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틀라는 돌아가신 선황께서 어여삐 여기던 아들이었고, 두 분은 같은 아버지를 둔 남매입니다. 제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아서라도 틀라 황자의 목숨만 붙여 주십시오.”
눈물로 엉망이 된 모습은 퍽 가여웠다. 사람들은 라틸이 틀라 황자를 용서하진 못하더라도, 죽이지도 않을 거라 여겼다. 감옥에 함께 갇힌 틀라 황자의 측근들 역시도, 불안에 떠는 황자를 위로했다.
“여자 황제는 인자하기 마련입니다. 심하게 처벌한들 감금 정도로 끝날 터이니 그리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입니다. 어떻게든 살아 계신다면 저희가 훗날의 계책을 마련할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전하.”
“유배된다면 아롱드 탑이나 소스타 성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쪽으로 전하의 사람들을 결집해 두어서 탈출을 준비하겠습니다. 언제든 기회는 올 것입니다.”
“집권 중에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바로 여론을 장악하고 뒤집을 수 있습니다.”
라틸이 우선 아낙차를 원래의 거처로 모시고 가라며 차분하게 명령하자, 라틸의 지지자들 역시도 라틸이 처벌을 무섭게 하진 않을 거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주일 후. 라틸은 고민 끝에 틀라 황자의 처형과 아낙차 후궁의 유폐를 지시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틀라 황자를 시작으로, 주도적으로 황제의 시신을 숨기고 라틸에게 칼을 들이민 이들 역시 처형되거나 신분이 강등되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슬픔에 가득 찬 표정이었으나, 막상 입 밖으로 나오는 명령들은 아주 칼 같았다. 사람들은 뒤늦게 대현자가 레안과 라틸 두 남매에게 했던 예언을 떠올렸다.
- 이 황녀님은 패왕의 자질을 지니고 있으십니다. 만약 황녀님께서 집권하시게 된다면 앞으로 많은 피가 흐르겠지만, 타리움 제국은 더욱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화이력 517년 봄. 틀라 황자의 세력을 정리하고 선황제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식을 치른 라틸은, 마침내 19대 황제로서의 집권 기반을 완전히 다진 후 대관식을 치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