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네가 황태녀가 될 거다2020.03.18.
모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내내 화창했다. 라틸은 말 위에서 멍하니 ‘다각다각’ 말굽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조금 전 내가 하고 온 게 이별인가. 혹시 꿈을 꾼 건가. 머리가 몽롱해져서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대로 당장 돌아가기만 하면 다시 하이신스를 볼 수 있을 것 같았고, 마주보고 웃으면 모든 게 없던 일이 될 것만 같았다. 국경 끝자락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곳 사람들이 하이신스 황제의 결혼을 두고서 떠들었다.
“아이니 영애라면 최고지! 옛날부터 인품은 유명했잖는가.”
“그래. 영민한데다 별다른 사고도 안 치고. 매일같이 가십지에 실리는 또래 귀족 자제들하곤 다르지.”
“좋은 황후가 되실 거야.”
“가문도 탄탄하니 문제 될 여지도 없겠고.”
라틸은 그들이 흥분해서 떠드는 소리를 듣고서야 깨달았다. 젠장, 현실이구나. 하이신스는 정말로 결혼한 거였다.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이 와중에 카리센의 국민들은 대체로 이 결혼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날 밤, 라틸은 뒤늦게 엉엉 맨정신으로 울며 이불을 두드렸다.
“하이신스 이 개새끼야! 멍멍 짖어버려라 이 배신자! 내 기도 돌려줘!”
* * * 비슷한 시각. 역시 잠을 못 이루고 이불을 두드리는 남자가 있었다.
‘내가 분명 다시 만나자고 했는데.’
클라인 황자였다.
클라인은 술을 홀짝거리다 말고 잔을 한 손으로 콱 쥐었다. 손안에서 잔이 잘게 부서지며 후두두 아래로 떨어졌다. 클라인은 손에서 스며 나오는 핏방울과 유리 조각을 툭툭 털어 내고서 하인을 불러다 탁자를 치우게 지시했다. 태연한 척. 하지만 하인 둘이 탁자 위의 유리 조각들을 치우고 나가자, 클라인은 이번엔 이불을 움켜쥐여 이를 또 갈았다.
“제기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존심이 상했다. 그 여자가 술에 취해 자신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옷에 눈물 콧물 묻히는 것까지 못 본 척 위로해주었는데. 온몸으로 좋아한다고 부딪쳐오기에 등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제가 먼저 접근한 거라면 이렇게 억울하지라도 않다. 하지만 먼저 왔지 않나. 자기 입으로 사랑한다고, 떠나지 말라고 매달려 놓고서는. 아침에는 몰래 튀어버리고, 그다음에는 개무시를 하고, 그다음에는 또 튀었다. 이다음에 만나면 또 개무시 할 차례인가? 클라인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찌 보면 별거 아닌데. 그냥 이상한 여자를 만났구나, 하고 넘어가기에는 그의 성질머리가 너무 더러웠다. 클라인의 드높은 자존심은 1분 1초마다 자꾸만 이마에 열이 오르게 했다. 더 화가 나는 건, 자신이 그 여자를 보기 위해 결혼식 후 피로연까지 참석해 여기저기 찾아다녔단 것이었다. 언제부터 나를 짝사랑한 거냐고 진지하게 물어볼 생각을 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황녀라면 뭐 결혼까지도 할 수 있겠네, 혼자서 계산해본 건 쪽팔려서 어디다 말도 할 수 없었다. 클라인은 씩씩거리다가 결국 다시 침대에 매단 종을 잡아당겼다.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이 오자마자 그는 이를 갈며 열일곱 번째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정말 타리움 사절단이 돌아간 게 맞느냐?”
“예. 아침에 황제 폐하께 간단하게 인사를 올린 후 돌아갔다 합니다.”
같은 대답을 하도 많이 반복한 탓에, 수행원이 좀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클라인은 손을 저어 수행원을 물린 후, 다시 침대에 누워 씩씩거리다가 ‘후우’ 크게 숨을 토해냈다.
‘됐다. 잊자. 잊어. 어차피 날 좋아하는 건 그 여자지 내가 아니잖아? 그렇게 떠나면 결국 자기 손해지. 난 상관없어.’
* * * 사절단의 대표인지라 라틸은 오랫동안 슬퍼할 수는 없었다. 비록 다음날 눈이 팅팅 부어버려서 영 꼴이 말이 아니었으나, 라틸은 꿋꿋하게 식사를 한 후 사절단들을 챙겨 완전히 카리센의 국경을 넘었다. 이후에는 몸이 지쳐갔으므로 마음의 상처를 돌보지 않아도 되어 차라리 나았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곯아떨어졌으므로, 라틸은 그래도 이게 낫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모국에 도착해서 익숙한 건축물과 옷차림을 보았을 때, 라틸은 깊은 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여전히 하이신스를 생각하면 괴로웠고 속이 비틀렸지만, 일단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족들과 유모의 애정을 받으며 몇 달 지내면 그래도 괜찮아지지 않을까?
‘오랫동안 아프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럼 내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
그러나 황궁으로 돌아온 라틸을 기다리는 건 따뜻한 가족의 품이 아니라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예? 오빠가 황태자 자리에서 내려간다 했다고요?”
어떤 의미로는 소원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하이신스는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으니까. 라틸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해준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귀로 들은 소식인데 믿기지 않았다. 황태자가, 레안 오빠가 황태자 자리를 거부한다니?
“오자마자 이런 소식부터 듣게 해서 미안하구나, 라틸.”
황제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 자리는 라틸이 사절단 대표로서, 그리고 딸로서 카리센에서의 일을 보고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보고를 듣기도 전에 이런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준 게 미안한 눈치였다.
“카리센에서는 어땠니?”
“아바마마와 한 약속은 지켰어요.”
“발등? 꽉 밟았어?”
“네. 하이신스도 잘 결혼했구요. 그런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오빠가 황태자 자리에서 내려오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황후 소생의 자식은 레안 황태자와 라틸, 둘뿐이었다. 그런데 오빠가 황태자 자리를 그만둔다면…….
“설마, 틀라가 다음 황태자가 되는 건 아니죠?”
라틸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최우선으로 황태자 자리에 오르는 건 황후 소생의 황자였다. 황후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황후 소생의 딸이나 후궁 소생의 아들이 그 뒤를 이었는데, 라틸이 알기론 후궁 소생의 아들이 황태자가 된 사례가 더 많았다. 이복남매인 틀라는 후궁 소생의 차남이었고 제법 머리가 좋단 평가를 받았다. 인정하기는 싫으나, 황태자 자리가 빈다면 귀족들은 그를 다음 황태자로 추대할 가능성이 컸다.
“라틸. 오빠 이름을 막 부르다니, 못써.”
황제가 인상을 찡그렸으나 라틸은 오히려 더 인상을 썼다. 어쩔 수 없었다. 라틸은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저런 말에는 절대로 호응할 수 없으니. 황가의 많은 이복형제자매가 그렇듯 라틸 역시 틀라와 사이가 나빴다. 어떤 뚜렷한 계기가 있어서 사이가 나빠진 건 아니었다. 그냥 그 존재 자체가 싫었다. 틀라의 어머니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었고, 그 존재만으로도 라틸의 어머니를 속상하게 했다. 황제가 틀라의 어머니에게 사랑이 담긴 선물을 보낼 때마다, 그녀와 함께 산책을 즐기고 연극을 관람할 때마다 어머니는 몹시 속상해했다. 라틸은 그래서 틀라가 싫었다. 틀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황후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걸 늘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 분노는 자연스럽게 라틸과 레안을 향했다. 이렇듯 전형적으로 사이 나쁜 이복남매인데, 그 빌어먹을 틀라가 황태자 자리에 오르는 걸 봐야 한다고? 라틸로서는 당연히 열이 나는 일이었다.
“난 틀라가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라틸은 아버지에게 혼이 날 걸 각오하고서 딱 잘라 말했다. 사적인 감정도 감정이지만, 객관적으로도 틀라는 황태자 감이 못 되었다. 그런데 황제는 꾸짖지 않았다. 피식 입꼬리를 올려 웃기만 했다.
‘웬일로 화를 안 내시네?’
라틸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황제는 틀라의 어머니인 아낙차 후궁을 가장 총애했지만, 자녀 중에서는 황후 소생인 레안과 라틸을 가장 총애했다. 하지만 그런 황제라도 절대 웃으며 넘어가지 않는 게, 이렇게 라틸이 대놓고 틀라에게 반감을 표시할 때였다. 그런데 혼내지 않고 웃으시다니? 뜻밖의 반응에 어리둥절해 있자, 황제가 손가락으로 라틸을 가리켰다.
“너다, 라틸.”
라틸은 눈을 깜빡거렸다. 아버지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네가 황태녀가 될 거다.”
아버지가 거듭 말한 후에야 라틸은 완전히 얼어버렸다. 그 모습을 본 황제는 태연히 물었다.
“왜. 자신없니? 자신 없다면 미리 말하거라.”
명백한 도발이었다. 라틸도 이걸 알았으나, 그 말을 듣자마자 발끈해서 대번에 외쳤다.
“할 수 있어요! 할게요! 황태녀.”
시원스러운 대답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라틸은 대답부터 한 후에야 ‘내가 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답은 바로 나왔다. 못 할 거 뭐가 있어? 하이신스 그 새끼도 했는데? 하이신스를 사랑해서 그의 황후가 되려 했지만, 이제 그 꿈은 물 건너갔다. 하이신스를 만나기 전에 황제 자리를 욕심내지 않은 건, 오빠인 레안 황태자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빠가 자발적으로 물러났고, 기존의 꿈은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 이젠 새로운 꿈이 필요하다. 그리고 황제 자리는 새로운 꿈이 되기에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아니, 황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자마자, 어디에 숨어 있던건지 호승심이 솟아났다.
‘황녀로 태어났으면 황제 자리엔 올라 봐야지. 암!’
황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너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
그의 눈동자에 딸을 향한 애정이 차올랐다. 그러나 잠시 만족스럽게 라틸을 바라보던 황제는 돌연 표정을 엄하게 했다.
“하지만 그 대답에 따라올 무게는 아주 무거울 거다, 라틸. 앞으로는 온갖 교육을 다 받아야 할 테니까.”
“할 수 있어요.”
라틸은 눈을 빛내며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할 수 있었다. 황제. 그 단어 하나가 하이신스와 고통으로 가득 차버린 심장을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얼굴을 뜨끈하게 만들었다. 라틸은 쇄골 아래를 누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의문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데 오빠는 갑자기 왜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난단 거예요?”
황제가 되란 말에 놀라서 이걸 까먹었다.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는데. 황제는 수심에 잠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현자가 되고 싶으신단다.”
“예?”
* * *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라틸을 황태녀로 강력하게 추천한 건 오빠인 레안이라 했다. 레안이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단 선언을 하면서, 아예 다음 후계자로 라틸을 지목했다는 것이다. 라틸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레안을 지지하던 이들 중 상당수가 그 덕에 라틸을 황태녀로 책봉하겠다는 황제의 말에 그러려니 수긍했으니. 황후가 낳은 단 둘 뿐인 동복남매였기에 지지세력이 비슷하단 점도 도움이 되었다. 황후 측 사람들이야, 레안이 황제 자리에 오르든 라틸이 황제 자리에 오르든 사실 별 차이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발 없이 후계자가 되었던 레안 때와 달리, 라틸에겐 반대세력도 지지세력만큼 컸다.
“무슨 소리? 다음 황태자는 당연히 트라탈라 황자님이어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라트라실 황녀님께서는 성인이 될 때까지 제왕학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황태녀로 모시다니요!”
“절대로 라트라실 황녀님께 사감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하오나 폐하, 선대의 사례를 살펴보아도 이 경우에는 트라탈라 황자님께서 황태자 자리에 오르는 게 옳습니다.”
“그럼요! 트라탈라 황자님께서는 스승들이 놀랄 정도로 영민한데다 진취적이십니다. 타리움 제국을 더욱 강하게 부흥시킬 것입니다.”
몇몇 대신과 아낙차 후궁의 친인척들, 평소에 틀라 황자를 따르던 이들은 이때다 싶어서 의견을 모아 황제에게 반박했다. 라틸은 서넛 기사단장을 통해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이를 갈았다.
“나쁜 자식들! 나도 제왕학 공부라면 했어! ……독학이라 그렇지.”
그래도 무슨 상관인가. 현재 황제인 아버지가 건강한데다 나이가 많지 않으니, 지금부터라도 정식으로 배우면 되는 거 아닌가? 시간은 충분했다. 게다가 틀라가 영민하고 진취적인 건 인정하지만, 그놈은 동시에 현실감 떨어지는 이상주의자이기도 했다. 라틸이 보기엔 그가 주장하는 안건들 중 절반 이상은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진짜로 나쁜 자식들!”
생각하면 할수록 분해서 라틸은 주먹으로 책상을 쾅쾅쾅 내리쳤다. 레안이 황태자일 때에는 찍소리도 못하던 틀라의 지지자들이, 아주 이때다 싶어 목소리를 내는 게 언짢았다.
“괜찮습니다. 황녀님은 다 눌러버릴 수 있잖습니까?”
그럴 때마다 서넛 기사단장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웃으면서 라틸을 달랬다.
“당연하지. 누구든 내 앞길을 막으면 다 치워버리겠어.”
라틸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