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넌 나중에 대답해2020.03.15.
술김에 사고를 친 상대가 인사를 하자고 다가왔을 땐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그만 눈 피하고. 인사나 합시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결국 아는 척 말을 거는 순간. 라틸은 심장이 뚝 떨어지는 줄 알았다.
“누구십니까.”
근위기사단장이 일어서며 남자를 막아주려 했으나, 남자는 근위기사단장이 막아설 만한 신분이 아니었다.
“클라인 아비시너. 카리센의 황자다.”
라틸은 인상을 구겼다가 얼른 도로 폈다. 속으로 으악 비명이 절로 나왔다. 사고를 친 상대가 심지어 황자였다니! 하이신스 동생이야! 미쳤어! 라틸은 하이신스의 이복동생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듣진 못했다. 그래도 하이신스가 장남인 건 알았다. 하이신스가 결혼을 하거나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선대 황제의 자녀들이 계속 황자와 황녀로 불리니, 저 황자는 분명 하이신스의 동생일 터.
‘미치겠네.’
하이신스가 날 버린 걸 후회하도록, 완전 멋지고 쿨한 모습으로 다녀가도 모자랄 판에, 그 동생이랑 사고를 쳐?
‘미쳤구나 라틸, 네가 진짜 미쳤구나.’
라틸은 열심히 자책했으나 이미 클라인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라틸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자신은 어차피 술에 취해 있었고, 실제로도 기억의 상당 부분이 증발한 상태였다. 사고를 쳤다고 해도 그냥 뭐. 끌어안고 추태를 부린 것뿐이지 않은가. 모른 척하면 된다. 아니, 기억이 없으니 모르는 거나 다름없다. 얼굴 두께를 키운 라틸은 마음을 굳게 먹고 생긋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라트라실 발레르타인입니다. 타리움의 황녀이자, 타리움에서 온 결혼 축하 사절단의 대표이지요.”
습관적으로 악수를 청한 라틸은 그와 인사를 한 후에도 형식적인 미소를 계속 유지했다.
“클라인입니다.”
클라인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라틸을 살폈다. 탐색하는 시선은 노골적이었으나, 라틸은 태연한 척 엉뚱한 말만 꺼냈다.
“카리센은 무척 아름다운 나라로군요.”
“네. 밖에서 자도 얼어 죽지 않을 만큼 따뜻한 나라이기도 하지요.”
클라인의 입꼬리가 삐뚜름해졌다. 기사단장은 그게 무례라 여겨지는지 불쾌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라틸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하하 다시 어색하게 웃고 말을 돌렸다.
“그래요. 그래도 밖에서 자면 곤란하지요. 밤 기온이 내려가니까 감기에 걸릴 수도 있잖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무탈해 보이시는데?”
“……물론입니다. 아. 카리센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은 무엇인가요?”
“술입니다.”
“…….”
라틸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저 남자,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내가 술 먹고 자기랑 사고 친 여자란 걸 기억하고 있다고!’
아니면 굳이 밖에서 자면 얼어 죽는다는 얘기나 술 얘기를 할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갑자기 “아, 그러고 보니 그쪽은!” 하는 건 더 이상했다. 결국 라틸은 과장되게 “후후.” 하는 소리를 내어 웃고서 중얼거렸다.
“농담도 잘하시기는.”
“황녀님? 왜 그러십니까?”
기사단장, 이 눈치 없는 새끼. 안 쓰던 말투를 사용해서인가, 기사단장이 옆에서 이상하다는 듯 물어왔다. 라틸은 기사단장을 향해서도 부드럽고 자애로운 척 웃어 주고서 다시 클라인에게 말했다.
“곧 형님께서 행진하실 것 같은데, 앉아서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다행히 말이 끝나자마자 결혼식이 시작될 거라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인사. 나중에 마저 할 테니 기다려요.”
클라인은 라틸을 향해 단단히 경고조로 말하고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클라인이 멀어지자 기사단장이 다시 물었다.
“황녀님, 저 황자가 마음에 드십니까? 왜 갑자기 그렇게 소름 돋는 말투를 사용하십니까?”
“그런 생각을 했으면 좀 조용히 닥치고 있어 줄 생각은 못 하십니까?”
이제야 정상적인 반응이다 싶은지 기사단장이 안심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라틸은 끙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기사단장은 평소에 날 어떻게 보는 거야?’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다고 해서 괜히 평소 성격 감추고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다 들키면 더 충격적일 겁니다. 황녀님은 거칠 때 가장 매력적이십니다.”
“거칠 때 놀려먹기가 가장 좋은 거겠지.”
“그것도 그렇지만.”
서넛 기사단장은 기사단장이 되기 전에는 레안 황태자의 친구였다. 그러다보니 기사단장들의 평균 나이와 비교할 때 무척이나 젊은 편이었다. 그래서인가. 나이 논란을 반년도 안 되어 쑥 눌러버릴 정도로 검술이나 지도능력이 뛰어났지만, 라틸에게는 그냥 마냥 짓궂은 오빠 친구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귀족 영애들은 이 인간이 뭐가 멋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씩 시원하게 웃고 있는 서넛 기사단장을 째려보며 라틸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물론 객관적으로 잘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눈꼬리가 쭉 올라가서 성격 나빠 보이지 않나?
“그런데 황녀님, 정말로 저 황자가 마음에 드십니까?”
“그럴 리가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별로 안 어울립니다.”
“왜요? 잘생겼잖아요. 내 옆에 서면 완전 그림일 것 같지 않아요?”
“같은 남자끼리는 촉이 옵니다. 저 인간은 딱 보기에도 성격이 더럽습니다. 황녀님과 잘 어울리는 상대는 저런 성격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성격인데요?”
때마침 음악이 꽝 소리와 함께 다시 시작되며 폭죽이 순서대로 날아갔다. 폭죽이 터지자 화려한 색색깔의 빛이 하늘을 비추면서, 은색 종이들이 사방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다들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훤칠한 하이신스가 자신의 키보다도 세 배는 길 듯한 붉은 망토를 두른 채 모습을 드러냈다.
“저런 성격을 말하는 건 아니죠?”
라틸은 하이신스를 착잡한 눈으로 쳐다보며 뚱하게 중얼거렸다.
“절대 아닙니다.”
“그럼요?”
“전 어떠십니까?”
애처롭게 하이신스를 쳐다보고 있던 라틸은 뜬금없는 말에 썩은 표정으로 옆을 쳐다보았다. 서넛 기사단장이 의자에 태연자약하게 기대앉은 채 장난스레 웃고 있었다.
“기분 나쁜 농담도.”
라틸은 딱 잘라 말하고서 팩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 타이밍을 맞춘 건지 우연의 일치인지, 하이신스 황제가 순간 이쪽을 힐긋 바라보았다. 라틸은 하이신스를 향해 세 번째 손가락을 들어 올리려다가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써서 참았다. 대신 목에 힘을 주어서 신부가 입장하는 곳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요정이 하프 선을 밟으며 춤을 추는 듯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바닥을 구름 같은 연기가 채워갔다. 다들 신기해하며 탄성을 지르는 가운데, 마침내 꽃과 보석으로 감싼 하얀 아치문 사이로 신부인 아이니 투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한 금색과 하얀색으로 뒤섞인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이 와중에 슬프게도 참으로 아름다웠다. 다들 숨을 죽이고 그녀의 입장을 바라보았다. 라틸은 쥐어뜯듯 아픈 심장의 고통을 애써 무시하고, 억지로 웃으며 박수쳤다. 자신과 결혼할 거라 확신한 상대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최악이다. 두 사람이 결혼 서약을 하고 반지를 서로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가벼운 입맞춤을 하는 동안, 라틸은 그야말로 온갖 불쾌한 감정을 죄다 느꼈다. 고통스럽고 슬프기도 했지만, 짜증이 나고 열도 받았다. 그야말로 눈 딱 감고 미친 척 깽판을 부리고 싶어서 실제로 손이 움찔거렸다.
“여기서 참지 못하면 100년 간 망신입니다.”
“압니다.”
“표정이 무섭습니다, 황녀님.”
“여기서 웃기까지 하는 건 나도 무리입니다, 서넛 경.”
라틸은 식이 끝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황가의 결혼식이니만큼 식 이후로도 수많은 절차가 남아 있었으나, 그것까지 볼 정신은 아니었다. 결혼 선물도 전했고, 자리도 채워 주었고, 결혼식 내내 박수도 열심히 쳐주었다. 이 정도면 전 여자친구로서는 할 만큼 해 준 거 아닌가? 라틸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씩씩거렸다. 식이 끝난 후 만나자던 클라인 황자의 말은 이미 머릿속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그 과다한 감정이 보기 안쓰러웠는지, 서넛 기사단장은 설탕을 발라 바삭하게 구운 도넛을 직접 가져다주며 물었다. 라틸은 고개를 빠르게 젓고서 도넛 다섯 개를 연달아 먹어치웠다.
“안 괜찮습니다. 분노치가 여기까지 솟았어요.”
라틸은 손바닥 날로 자신의 이마를 가리킨 후 물었다.
“이제 우리는 가도 되는 거죠?”
“의무적으로 참석하는 구간은 지났으니까요. 가도 됩니다.”
“그러면 가요.”
무리하다면 무리한 요구일 수도 있지만, 서넛 기사단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지요. 떠날 준비를 하라 이를까요?”
라틸은 그 태연한 대답에 오히려 맥이 빠져서 정정했다.
“……내일 가요.”
“정말로 지금 가도 됩니다. 본식이 끝나자마자 돌아가는 나라도 있잖습니까.”
“사이가 안 좋은 나라들은 그렇지요.”
“우리도 사이 안 좋은 나라 하면 됩니다. 사유도 충분하고.”
“됐어요. 개인사를 나랏일에 적용하진 않을 겁니다, 서넛 경.”
라틸은 힘없이 중얼거리고서 침대에 털썩 무너지듯 앉았다.
“게다가 지금 당장 가는 건 도망치는 것 같기도 하고. ……내일 갈래요. 내일 아침에, 하이신스 얼굴 보면서 똑바로 말하고 갈 거예요.”
* * * 다음 날 아침, 라틸은 장미잎과 진주가루를 푼 물에 깨끗하게 목욕을 한 후 빳빳하게 다림질한 흰색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옷에 구김 한 점 가지 않도록 확실하게 앞뒤를 점검한 뒤에는, 긴 검은색 머리카락을 높게 묶어 늘어뜨렸다. 라틸은 자신의 그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서넛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멋지십니다.”
“얼마큼요?”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됩니까?”
“네. 진짜 솔직하게 말해줘야 됩니다.”
“청혼하고 싶을 만큼 멋집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라틸은 뿌듯하게 웃고서 의장용 칼을 허리춤에 달았다. 유학 시절, 하이신스는 라틸이 파란색의 풍성한 드레스를 입는 걸 가장 좋아했다. 상아색 피부색과 잘 어울린다며, 강렬한 색상을 입은 라틸은 숲을 뛰어다니는 요정처럼 보인다고 했었다.
‘하이신스가 날 더 잘 보아주었으면 해서 그땐 일주일 내내 파란색 옷만 입고 다녔었지.’
하지만 이제는 하이신스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던 황녀는 없었다. 라틸은 킁 숨을 내뱉고서 문을 열고 나갔다.
“하이신스에게 제대로 보여줄 겁니다. 난 하이신스 따위가 없어도 이렇게 멋진 여자고, 그 새끼는 날 놓친 걸 평생 후회하게 될 거라고요.”
* * * 바로 떠날 거라고, 잘 살라는 말은 못 하겠다고, 하루에 세 번씩 저주할 거란 라틸의 말에 하이신스는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라틸?”
하이신스의 어제 막 결혼한 새신랑의 얼굴이 아니었다. 반짝여야 할 눈가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온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빨리도 후회하는군요, 서넛 기사단장이 작게 중얼거렸지만 하이신스는 아예 라틸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시야 안에는 라틸만이 들어와 있어서 서넛 기사단장은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라틸은 몇 년 동안 사랑하던 남자가 아파하는 모습에 덩달아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어. 이렇게만 해야 해.”
“5년만. 정말 5년만 기다려 줄 수 없을까? 5년 안에 모든 걸 다 정리할 수 있어, 라틸.”
“안 돼.”
“라틸. 너도 황족이니까 이해할 수 있잖아.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알아. 이해해. 말했잖아, 이해한다고. 하지만 널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야.”
“라틸…… 제발.”
“5년. 말이 좋아 5년이지, 그게 그냥 5년이야? 5년 동안 넌 아이니 영애를 시작으로 온갖 후궁들을 받아들이겠지. 짧은 시간 안에 황권을 강화하기에는 제일 좋은 길이잖아?”
“!”
“그러면 난 5년 동안, 네가 다른 여자들과 결혼하는 걸 몇 번을 봐야 하는 거야? 그런데도 널 기다려 달라고?”
하이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온몸으로 그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는 슬퍼하는 순간조차 아름다웠다. 라틸 역시도 심장이 쥐어짜듯 괴로워졌다. 하이신스는 라틸이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였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꿈꾸고 약속하고 확신했던 남자. 라틸이 하이신스에게 한 말, 그를 이해한다고 한 말 역시 진심이었다. 라틸은 하이신스를 이해했다. 말이 좋아 사랑 사랑 사랑 타령이지. 실제로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이신스는 사랑과 황제 자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이성적으로 황제 자리를 선택했다. 어쩌면 하이신스는 정말로 약속을 지킬지도 몰랐다. 그는 영민했고, 자신이 해내고자 하는 일은 모조리 다 해치울 만큼의 결단력과 실행력도 갖추었으니까. 아직까지도 흔들리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이었다. 지금이라도 슬퍼하는 하이신스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고서, 그의 고운 이마 위에 키스를 퍼부으며 기다리겠다 약속하고 싶었다. 슬픔으로 가득 찬 회색 눈동자가 자신의 것이길 원했다. 하지만 라틸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 넌 그럴 수 있어, 하이신스?”
라틸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스스로도 흔들리는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눈가로 열기가 느껴졌다. 젠장. 라틸은 울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며 다시 물었다.
“내가 다른 남자랑 결혼하고 후궁도 줄줄이 받겠다고, 그러면서 너한테 기다려달라고 하면. 넌 날 기다려 줄 수 있겠어?”
“나는…….”
“아니. 잠깐. 대답하지 마.”
무언가 말을 하려 했던 하이신스가 ‘왜 그러냐’는 눈으로 라틸을 바라보았다. 라틸은 억지로 입꼬리에 힘을 주어 웃었다.
“기다려. 그 질문, 내가 나중에 다시 할 테니까. 넌 그때 대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