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전남친의 변명2020.03.08.
하이신스는 애처롭고 달콤한 목소리를 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라틸. 화난 건 알아. 하지만 이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아줘. 제발……. 그동안 속이 미어지는 줄 알았는데. 네가 만나자마자 화를 내면 나는.”
“4분 남았어.”
라틸은 단호하게 그가 주절거리는 걸 끊어버렸다. 하이신스의 목소리는 과거의 추억만큼 듣기 좋았지만, 감미로운 음악도 듣고 싶을 때 들어야 좋은 법. 지금은 하이신스가 천상의 노래를 한다 해도 짜증이 날 타이밍이었다.
“3분 30초.”
“…….”
라틸이 단호하게 남은 시간을 알려주자, 하이신스는 곧 체념 어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말하지. 반란을 일으킨 헤움의 세력이 생각보다 거셌어. 가장 세력이 큰 다가 공작이 헤움을 지지해줬거든.”
“다가 공작?”
뭐야 이 익숙한 이름. 초대장에서 본 가문이잖아? 아이니 투르 라 다가. 그래. 확실하게 초대장에서 본 이름이다. 잊을 리가 없었다. 하이신스와 결혼한다는 여자의 이름이었으니. 다가 가문은 그 여자의 가문이었다. 그런데 하이신스의 예비 신부 집안이 헤움 황자를 지지했다고?
“헤움을 누르기 위해서는 다가 공작이 필요했어. 그래서 그를 회유하려 했고, 다가 공작은 내게 조건을 걸었지. 자기 외동딸인 아이니 투르 라 다가를 황후로 맞이해 달라고.”
“…….”
라틸이 입을 다물고 지그시 쳐다보자 하이신스가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늘 라틸을 감탄하게 만들었던 다양하고 풍부한 표정은 이번에는 슬픔 쪽으로 기울었다.
“라틸.”
한 걸음. 하이신스는 가만히 다가와 라틸을 다시 꽉 자기 품 안에 넣고 힘주어 안았다. 그 열기는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슬플 정도로.
“미안해. 정말 미안해.”
“……됐어. 미안해하지 마. 넌 너 자신과 나. 둘 중 너 자신을 선택했을 뿐이야. 우리 사랑보다 네 영광이 우선이라 생각한 건데. 여기에 대해서 비난하진 않겠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우선으로 생각할 테니까.”
“라틸…….”
하이신스는 흔들리는 눈으로 라틸을 바라보았다. 대범한 말에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라틸은 그사이에 하이신스의 발등을 꽉 찍어버렸다.
“윽.”
하이신스는 새된 소리를 뱉으며 얼른 발을 치웠다. 라틸은 씩씩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럴 땐 하이힐이 필요한데. 여행을 위해 편안한 신발을 신은 게 아쉬웠다. 문 앞에서라도 갈아신고 들어올걸!
“감동받지 마. 널 비난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화가 안 나는 건 아니니까. 네 사정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난 버림받은 거잖아.”
하이신스는 다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라틸……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줘.”
그의 목소리는 절절하게 고통을 호소했다. 라틸은 그 목소리며 표정이 정말 진담처럼 여겨져 괴로워졌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 마? 뭘 말하지 마. 이게 사실인데 뭘 어쩌란 거야. 전쟁 중이라 편지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지 마.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알려줄 수 있었잖아? 내가 결혼식 사절을 통해서 네 결혼 소식을 들어야겠니?”
“라틸. 난 아직 누가 헤움 쪽 잔당인지 몰라. 승리했지만 아직 불안한 자리야.”
“!”
“다가 공작도 마찬가지야. 다른 건 몰라도, 그는 내가 자기 딸을 배신하게 두진 않아. 모든 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어. 첩자가 누구인지조차 몰라. 그런 상황이야. 편지를 쓸 수가 없었어.”
“우리는 이별이다, 이 말을 하는 것도 첩자한테 걸리니? 첩자가 그 사실을 알면 헤움 잔당에게 도움이라도 돼?”
“…….”
“다가 공작? 그 편지를 보면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하지 않을 텐데?”
하이신스는 물기 어린 눈동자로 라틸을 바라보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해, 하는 시선으로. 라틸은 손에 힘을 줘서 그를 밀어냈다. 하이신스에게서 나는 익숙한 향기와 부드러운 살결이 좋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좋아도 밀어내야 하는 사람. 이제 그는 그런 사람일 뿐이니. 다행히 울음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라틸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래. 네가 하고 싶던 말이 변명이었던 걸 잘 알았고…… 가겠어. 잘 살라는 말은 못 하겠다. 나중에, 내가 사절단 대표로서 네게 잘 살라 말하더라도 믿지 마. 빈말이니까.”
라틸은 휙 몸을 돌렸다. 하지만 채 몇 걸음을 걸어가기 전에 하이신스가 라틸을 잡고 매달렸다.
“제발 라틸. 그런 아픈 소리 하지 마. 너와 이별하려 부른 게 아니야.”
“그러면. 사과하려고?”
“사랑해.”
지금 이 자식이 뭐라는 거야? 절절한 하이신스의 고백에 라틸의 눈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사랑?”
“라틸. 내가 사랑하는 건 너 하나뿐이야. 그러니까…… 5년만. 5년만 기다려줘.”
“뭐?”
라틸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5년 기다리면? 상황이 바뀌어?”
빈정거린 건데. 하이신스는 단호하게 수긍했다.
“바뀌어. 5년이면 다가 공작의 세를 꺾고 헤움의 잔당을 전부 쳐낼 수 있어. 확고하게 내 기반을 닦아서 완전한 왕정을 이룰 수 있어.”
그러나 그 단호한 긍정도 라틸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라틸은 여전히 차갑게 쏘아붙이기만 했다.
“그러면? 내가 5년 기다려서 얻는 게 뭔데? 승계 과정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니, 넌 기반을 닦기 위해서 정략적으로 후궁들도 들이겠지. 이번에 네 결혼 소식을 들으며 받은 충격을 5년간 연달아 받아서 내가 얻을 게 뭐냐고!”
“정략적으로 들인 어떤 후궁과도, 그리고 아이니 다가와도 절대로 합방하지 않겠어. 원한다면 신전에서 맹세해도 좋아. 아니, 합방이 뭐야,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있을게. 그러다가 5년 후에. 전부 다 내보낼게.”
이번에는 좀 흔들렸다. 라틸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신전에서 하는 맹세는 아주 신중해야 했다. 신전에서 거짓 맹세를 했다가는 신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신은 자기를 걸고 거짓말하는 걸 싫어했으니.
‘일단 이놈이 거짓말로 둘러대는 건 아니구나.’
하지만 여전히 하이신스의 말에는 구멍이 많았다. 라틸은 한숨을 내쉬면서 그 구멍을 하나하나 지적했다.
“후궁들을 내보내는 거야 그렇다 쳐도. 황후와 이혼은 어쩌려고. 다가 공작은 세력이 크다며. 황후를 배출한 가문이 되면 더 커지겠네. 그런 가문이, 그런 가문 출신 황후가, 네가 5년 있다가 폐위시킨다고 순순히 떠나겠어? 황후 자리에서 손쉽게 떠밀릴 정도로 약해질까?”
하지만 하이신스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충분해.”
“오만이니 자만이니.”
“제발, 라틸. 내가 사랑하는 건 너 하나뿐이야. 내가 미래를 함께하고 싶은 사람도, 가정을 만들고 싶은 사람도 너 하나야. 알잖아?”
멍청하게도 라틸은 대답하지 못했다. 몇 년을 사랑한 남자가 흐느끼며 하는 애원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았다. 이 남자를 위해 기도하며 보낸 세월이 얼마이던가. 게다가 이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었고, 자신 역시 이 남자를 사랑해왔다.
“……안 돼.”
하지만 역시 라틸은 하이신스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라틸.”
하이신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눈으로 라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충격으로 가득 차올랐다.
“날 못 믿어서 그런 거라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러니까 신전에 맹세할게. 정말이야. 그러니 제발…….”
“솔직히 말할까? 나도 아직 널 사랑해. 하지만 5년 후의 넌 완전히 다른 여자의 남자야. 지금은 아이니 영애가 너와 나 사이에 들어온 거지만, 5년 후에는 너와 그 사람이 부부고 내가 남이야.”
“난 그녀를 절대 사랑하지 않아.”
“네가 사랑하지 않아도 네 신부는 그 사람이야. 나는 그냥 옆 나라 황녀고. 헤어지려면 결혼하기 전인 지금 헤어져야지. 결혼을 하고 5년이 지난 후에 버린다고? 그딴 소식을 듣고 내가 기뻐할 것 같아?”
라틸은 단호하게 말하고서 뒷걸음질 쳤다. 일순간 흔들렸지만, 라틸은 이게 옳다고 생각했다. 물론 라틸은 하이신스의 신부가 될 사람이 미웠다. 그 사람의 존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이 미웠다. 몇 년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던 남자를 손쉽게 가져갔는데.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별개로, 아이니 다가가 5년 후 폐위되어 버려져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아이니 다가는 못된 계략으로 하이신스를 뺏어간 게 아니었다. 하이신스는 황제가 되기 위해 그녀와 거래를 한 것이었다. 물론 거래를 하지 않았다면 하이신스가 죽긴 했겠지만. 어쨌든 제 손으로 거래해 놓고서는, 5년 후에 이혼하겠다고?
“라틸, 제발.”
하이신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아름다운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걸 보는 라틸도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네가 날 받아주지 않는다 해도 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어, 라틸. 알잖아. 제발…….”
라틸은 고개를 젓고서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났다. * * *
“황녀님. 괜찮으십니까?”
숙소로 돌아온 라틸이 멍하니 창문 밖만 쳐다보고 있자 근위기사단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요…….”
라틸은 맥없이 대답하고서 병든 병아리처럼 창틀에 이마를 댔다. 창틀은 시원했으나 마음은 아직도 복잡했다. 순수한 분노일 때에는 차라리 나았지. 지금은 여러 감정이 복합적이어서 더 힘들었다. 게다가 자꾸 하이신스의 말이 귓가에 떠오르고, 그때마다 ‘뭐 어때?’ 하고 혹하는 충동이 들었다. 아까는 다가 공작의 영애가 못된 계략으로 하이신스를 뺏어간 게 아니라 확신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애초에 다가 공작이 헤움 황자의 반란을 돕지 않았더라면, 하이신스가 그런 거래를 할 필요도 없었지 않나.
“아냐. 그래도 5년 후는 아니야.”
“예?”
“그런 게 있답니다.”
라틸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고서, 아직까지도 끼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장갑을 벗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신발도 갈아신지 않았고 망토도 벗지 않은 상태였다. 하이신스와 만나고 온 후 정신이 나가 여행복 그대로 입고 있던 것이다.
“옷 갈아입는 걸 도울 하녀를 불러다 드릴까요?”
“그래 줄래요?”
근위기사단장은 잠시만 기다리라며 문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1분도 지나지 않아 근위기사단장은 바로 라틸을 부르며 다시 다가왔다.
“진짜 빨리 왔네. 왜요? 아무도 없어요?”
라틸이 묻자 근위기사단장의 표정에 곤혹스러워하는 빛이 떠올랐다. 단순히 하녀가 안 보이는 문제가 아닌 듯했다. 또 뭔데. 라틸의 표정이 덩달아 어두워졌다.
“왜요?”
“아이니 영애가 문 앞에 있습니다. 황녀님을 뵙고 싶어 하는데, 어찌할까요?”
아이니 영애. 아이니 다가. 전 남자친구의 예비신부? 그런 사람이 날 만나고 싶어 한다고? 왜? 게다가 문 앞에 있어? 라틸은 인상을 구겼다. 안 그래도 하이신스 때문에 심란한데. 굳이 그 사람까지 만나야 하나? 영 내키지 않았다. 그 기색을 눈치챈 근위기사단장이 제안했다.
“황녀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나서겠습니다.”
좋은 제안이었으나 라틸은 거절했다.
“괜찮아요. 사절단 대표로 온 이상 어차피 피할 수만도 없을 테니까. 들어오라 해요.”
근위기사단장은 영 내키지 않는 눈치였으나 “예.” 하고 대답하고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우아하게 붉은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전 남자친구의 예비신부가 예상보다 훨씬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건 상당히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우아하게 드레스 자락을 늘어뜨린 아이니는, 키는 작았으나 자세가 곧고 표정이 다부졌다. 그야말로 잘 배운 영애 느낌이 물씬 나고 있었다.
‘젠장.’
라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신발과 망토. 아직 갈아입지 않았는데.’
라틸은 드레스 대신, 기사들과 비슷하면서도 좀 더 화려한 느낌을 살린 제복을 입고 있었다. 여기저기 금색 솔이 달린 데다 문장도 금으로 만들어 나름 화려한 복장이었으나, 문제는 며칠간 이 옷을 입고 있었단 점. 덕택에 옷은 잔뜩 구겨져 있었고, 바지 밑단에는 아직 흙이 묻어 있었다. 나중에 오라 할 걸 그랬나. 라틸은 속으로 후회했으나 도로 나가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라틸은 감정을 숨기고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아이니 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