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전 남친의 결혼식2020.03.04.
“사절단이?”
하이신스다. 분명 하이신스의 편지야! 라틸은 기대감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하지만 곧 불안한 마음이 기대감을 덮었다. 작별 편지면 어쩌지? 라틸은 마른침을 삼키고서 편지 겉봉을 뜯었다. 편지지를 꺼내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그 사이 글자가 달아나 버릴까 두려울 정도로. 라틸은 간질거리는 혓바닥을 씹으며 편지를 읽었다.
“뭐라고 쓰여 있나요?”
그 시간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유모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서 초조하게 물었다.
“변명인가요?”
“아니.”
“아니라고요?”
유모는 도끼눈을 떴으나 라틸은 아무런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편지지만 가만히 더 내려다볼 뿐. 그러다가 한숨을 내쉬더니 종이를 박박 찢어버렸다.
“황녀님?”
“카리센으로 와 달래.”
“예?”
“편지에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뭔 개, 헛소리랍니까? 팔이라도 다쳤답니까? 몇 자 이상은 쓸 수 없게 다쳤대요? 아니, 팔을 다쳐도 대신 써줄 사람이 하나둘이 아닐 텐데?”
유모가 짜증스럽게 화를 내자, 라틸은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유모. 나 어떻게 해야 해?”
“어쩌긴 뭘 어쩝니까. 황녀님도 편지를 쓰셔야지요.”
“뭐라고. 뭐라고 써?”
“지조 없는 자식아, 너 같은 게 황제가 되다니 너네 나라 국민들이 불쌍하다.”
유모가 내는 거친 목소리에 라틸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점차 말라가다가 완전히 멈추었다. 라틸이 완전히 무표정하게 변하자 유모는 더욱 걱정이 되어 물었다.
“편지를 안 쓰실 건가요?”
“모르겠어. 생각 중이야. 결정이 어렵네.”
라틸이 결정을 내린 건 그로부터 세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 * *
“아바마마. 저 카리센에 다녀오겠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 라틸이 식사를 하다 말고서 갑자기 심각하게 던진 말에, 황제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딜 다녀와?”
“카리센에 다녀올래요.”
딸의 말은 거의 통보에 가까웠다. 황제는 당황해서 시종장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시종장이라고 해서 라틸의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시종장이 ‘저도 모릅니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자, 황제는 침착하게 딸에게 물었다.
“갑자기 카리센엔 왜 가려는 게냐?”
“…….”
라틸은 머뭇거렸다. 남자 때문에 간다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이신스가 독신이라면 얼마든지 그런 이유를 댈 수 있다. 하지만 오늘 낮에 하이신스의 결혼 사절단이 다녀가지 않았던가.
“혹시 하이신스를 만나러 가는 거니?”
그러나 뜻밖에도 황제가 먼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도 나와 하이신스의 사이를 아시나? 라틸은 놀라 부황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황제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이신스는 좋은 청년이지. 하지만 너와 어울리는 청년은 아닌 것 같구나.”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바마마…….”
“끊어질 인연, 굳이 미련 둘 필요 없다.”
“전…….”
“아비는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한단다.”
황제는 홀짝이던 차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라틸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두 팔을 벌려 딸을 꼭 끌어안았다.
“그자와 결혼한다면 먼 타국으로 가야겠지. 아버지는 내 딸이 곁에 오래도록 있었으면 좋겠다. 내 눈에 보이는 곳에서, 내 권력과 힘이 닿는 곳에서 사랑만 받으며 살았으면 좋겠어.”
“저는…….”
“후궁이 되어서라도 하이신스와 결혼하고 싶단 말은 하지 마라.”
딱 잘라 말하는 부황의 말에 라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어요.”
“그래.”
“하지만 카리센에는 다녀올래요.”
황제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서, 다부진 표정을 하고 있는 딸을 보았다. 라틸은 이미 단단히 결심한 바가 있는 듯 입매가 굳어 있었다.
“라틸. 내 딸. 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남자를 굳이 왜 찾아가려는 게냐. 욕을 퍼부어주겠단 거라면 보내주마.”
“물어보고 싶어요. 왜 그런 건지.”
“의미가 있니?”
“마음이 편해지겠지요. 지금보다는.”
라틸의 꾹 다문 입술을 고집스럽게 보였다. 황제는 혀를 찼다. 그는 딸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누구도 뜻을 꺾을 수 없단 걸 잘 알고 있었다.
“누구를 닮아 이리 고집이 셀까…….”
황제는 라틸의 머리카락을 힘을 주어 퍽퍽 문지르고는, 다시 의자로 가 앉았다. 그러나 나오는 말은 단호했다.
“개인적으론 갈 수 없다.”
보내줄 분위기더니, 왜? 라틸은 울상을 지으며 외쳤다.
“아바마마!”
하지만 바로 뒤에 반전이 있었다.
“두 가지 조건을 맞춘다면 보내주마.”
“말씀해보세요. 다 맞출게요.”
라틸은 눈을 부릅뜨고 아버지를 보았다. 어떻게 해서든 꼭 카리센에 가고 싶었기에, 아버지가 어떤 조건을 내밀더라도 해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한 말은 라틸이 예상한 그런 조건이 아니었다.
“첫째. 하이신스를 보거든 녀석의 발등을 꽉 밟아주어라. 왜 이러냐 묻거든 내가 시켰다고 해도 좋다!”
라틸은 눈을 커다랗게 떴지만 곧 웃으면서 “네!” 하고 외쳤다.
“그리고 둘째는요?”
“결혼식 사절단 대표로 가거라.”
“그건!”
“개인적으로는 보낼 수 없어. 내 딸이 우스운 꼴이 될 테니. 결혼식 대표로 가서, 그놈 낯짝을 구겨주거라. ‘너 같은 놈 신경쓰지도 않는다!’는 표시를 하고 와야지.”
흥 콧김을 뿜은 황제는, 이럴 줄 알았더라면 하이신스의 유학을 허락하지 않았을 거라고 툴툴거리면서 시종장에게 물었다.
“안 그렇느냐?”
“예, 저도 폐하와 같은 생각입니다.”
시종장은 입가에 자상한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라틸은 가만히 서서 아버지와 시종장을 번갈아 보다가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그러면 그렇게 할게요.”
* * * 그로부터 약 3주간. 라틸은 결혼 축하 사절단의 대표로서 여러 가지 일을 지시했다.
‘약혼자가 다른 여자랑 결혼한다는데. 내 손으로 왜 이런 걸 준비하고 있지?’
물론 평탄하지는 않았다. 일하다가도 종종 울화가 치솟았다. 하이신스에게 주기 위해 준비한 선물은, 볼 때마다 바닥에 패대기쳐 밟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화목한 부부를 상징한다는 나무 선물은 정말로 반쯤 부숴버릴 뻔했다. 화목은 얼어죽을 화목. 하지만 라틸은 그 모든 충동을 잘 참아내는 데 성공했다.
‘진정하자. 나는 하이신스를 위한 사절단으로 가는 게 아니야, 이건 제국의 대표가, 다른 나라의 대표에게 보내는 사절단이지. 그런 짓을 해봤자 통쾌한 건 잠시야. 나중에 뒷감당하느라 돈만 더 들 뿐이라고.’
그리고 제법 침착하게 일을 주도하는 라틸의 그 모습을, 황제는 먼발치에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라틸은 결혼하더라도 역시 먼 곳으로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군.”
“예. 폐하의 곁에서 많이 배우다가 타리움 제국의 기둥으로 당당히 성장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라틸의 인내를 침착하게 바라본 건 아니었다.
“너무 잔인한 일이에요, 아버지. 전 약혼자 결혼식에 애를 보내다니요!”
동생과 하이신스의 사이를 아는 또 다른 사람, 황태자 레안은 아버지에게 몇 번이나 항의했다. 라틸을 결혼식 대표로 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그 작은 반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다면 한 번 제 눈으로 보고 오는 게 나을 거다. 몇 년을 좋아하고 거기에 그리움까지 더해진 상대야. 하이신스 그 자식이 무사하길 빌면서 신전에 꼬박꼬박 2년을 다녔어. 확실하게 끝을 내게 해 주어야지.”
그리고 마침내 결혼 사절단이 카리센으로 떠날 날이 다가왔다. 라틸은 자신의 하얀 백마 위에 올라타며 말 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해 각종 무술을 익히며 다녔던 터라, 라틸은 승마에도 익숙했다. 커다란 백마 위에서도 위풍당당한 황녀의 모습을, 사절단은 뿌듯하게 올려다보았다.
“다녀올게요.”
가족들에게 인사를 한 후 라틸은 일행에게 출발 신호를 보냈다. 그로부터 장장 15일에 이르는 긴 여정 동안 일행은 순조롭게 길을 갔다. 커다란 행렬이었기 때문에 산적이나 도적도 나타나지 않았고, 능력 있는 관리가 거리 계산을 완벽하게 해 둔 덕에 야영하는 일도 없었다. 일행은 빠른 속도로 평화롭게 카리센을 향해 나아갔다. * * * 마침내 카리센의 수도에 도착했을 때, 라틸은 벅찬 슬픔을 느꼈다. 언젠가 이곳으로 오게 될 줄은 알았지만 이런 형태일 줄은 몰랐는데. 카리센의 수도에는 당연히 하이신스와 결혼하기 위해 올 줄 알았다. 화려한 결혼 사절단 속에서 황금색 마차를 타고, 카리센 국민의 환호를 들으며 올 줄 알았다.
‘하이신스…….’
하지만 이젠 완전히 변해버렸다. 결혼 사절단과 온 건 맞았지만, 그녀의 결혼이 아니었다. 남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이지. 마차 안에 가득한 선물들은 자신을 위해 아버지가 준비한 선물이 아니라, 하이신스의 신부가 될 사람을 위해 라틸이 고른 선물들이었다. 심장이 미어지는 기분에 라틸은 잠시 말고삐를 꼭 쥐고 이를 우드득 갈았다.
“황녀님. 괜찮으십니까?”
행렬의 호위를 맡은 기사단장이 걱정스레 물었으나, 대답할 여력도 없었다. 지금 대답하게 되면 보나 마나 쌍욕이 나올 터.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난 기사단장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라틸은 한참을 그러고 서 있다가, 숨을 크게 토해낸 후 두 손으로 뺨을 툭 치고 지시했다.
“괜찮습니다. 이제 가지요.”
물론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황궁에 도착해 타리움 제국의 사절 대표로서 카리센의 책임자와 인사를 나누었으나,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황녀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책임자가 친절하게 웃으면서 하는 말조차도 다 시비로 들려서, 애꿎은 상대의 멱살을 잡고 다그칠 뻔했다. ‘왜? 신랑의 전 애인인 내가 결혼식 사절로 와서 당혹스러우냐?’라고.
‘그러면 안 돼. 저 사람들은 내가 하이신스와 연애했다는 것도 모를 건데.’
라틸은 자꾸만 꿈틀거리는 주먹을 통제했고, 다행히 성공했다.
"하이신스 폐하와는 타리움 제국에서부터 알고 지냈거든. 내가 직접 오는 걸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네."
"물론입니다. 황녀님께서 사절단 대표로 오셨다는 걸 알면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개소리.’
카리센의 책임자는 사절단 대표인 라틸을 비롯해 몇몇 이들만을 하이신스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이끌었고, 나머지 일행들은 짐과 사람들을 챙기기로 하고서 다른 방향으로 갔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각국에서 사절단들이 도착하고 있어서 무척 정신없답니다. 하지만 외국 귀빈들이 지내기에는 그편이 오히려 나을 겁니다. 은혜궁은 보통 황량할 정도로 비어 있는데, 지금은 손님들로 가득하니까요."
노란 회랑을 걸어가는 내내 카리센의 책임자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 주었으나, 라틸은 반만 듣고 반은 흘려들으며 마른침만 삼켜댔다.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발이 무거워졌다. 갑자기 이곳에 온 게 후회되고, 하이신스를 만나서 뭐라고 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축하해? 근데 왜 멋대로 마음을 바꿨어? 마음을 바꿀 거면 내가 오랫동안 기다리기 전에 바꾸지 그랬어? 너랑 보낸 시간이 아깝다? 일단 부황이 말한 대로 발등은 꼭 찍어야지. 속으로 다짐하며 라틸은 카리센 책임자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마침내 책임자는 어느 방문 앞에서 멈추어섰다.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던지, 책임자는 문을 두드리는 대신 바로 슬쩍 열어주었다.
“고맙네.”
라틸은 어깨를 세우고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알현실 용도로 사용하는 듯한 방이었다. 옥좌가 방의 상석 위치에 있고 그 아래로 길쭉한 탁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알현실과 달리 좀 더 사적인 느낌이 났다. 방 안을 둘러볼 만큼 다 둘러본 라틸은, 이제는 더 시간을 끌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언제부터였을까. 하이신스가 멍하니 선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그에게 달려가 안길 뻔했으나 라틸은 참아냈다. 자신을 버리고 간 남자에게 미련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라틸…… 와 줬구나.”
그러나 문이 닫히자마자 하이신스가 먼저 달려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커다란 두 팔 안에, 단단한 품 안에 익숙하게 묻힌 채 라틸은 굳어버렸다. 멍청하게도 미약한 희망이 솟아났다. 하지만 라틸은 손을 들어올려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하이신스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려는 걸, 딱 끊어내며 말했다.
“지금부터 5분. 시간을 주겠어. 설명해. 나더러 왜 와달라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