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데뷔탕트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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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데뷔탕트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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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데뷔탕트 (15)
2023.08.31.
“당신은 날 언제부터 사랑하게 됐어요? 처음 만난 그 밤에 우리가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잖아요.”
아서가 다정하게 웃으며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왜 그때는 아니었다고 생각해? 내가 첫눈에 반했을 수도 있잖아.”
레이나가 눈을 흘겼다.
“아닌 거 다 알거든요? 얼굴은 보지도 못했으면서.”
그게 아니어도 태도로 알 수 있었다.
오 년 전의 그는 그냥 자신을 정중하게 대해 주었을 뿐이었다.
사람 대 사람으로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을 뿐.
그건 그저 무심한 친절이었다.
돌아와서 함께 지내며 보여주기 시작한 모습과 확실히 달랐다.
아서도 피식 웃었다.
“다른 데 반했을 수도 있잖아. 목소리라든가.”
레이나는 창피해져서 그를 흘기며 주먹으로 톡 때렸다.
“놀릴 거면 나 돌아갈래요.”
아서가 웃으며 레이나를 잡았다.
“가지 마.”
몸을 돌린 순간 당겨진 몸이 그의 품 안으로 쏙 들어가 갇혔다.
“……당신이 다른 사람이랑 춤추는 시간이 얼마나 긴지 모를걸.”
등 뒤로 껴안는 강도가 딱 기분 좋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도.
레이나가 싫지 않은 빛으로 웃음을 흘리며 그의 팔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부드러운 온기가 편안한 안정감이 되어 흘렀다.
“당신은 안 그럴 것 같으면서 질투가 심하네요.”
“심한 편인가.”
“조금 그런 편 아닌가요? 비교 상대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또록 또로록.
풀벌레 소리가 예쁘게 울렸다.
“음. 지금 그 말 마음에 드네.”
“무슨 말이요?”
“비교 상대가 없다는 말.”
“정말……. 질투가 심한 것 맞다니까요…….”
아서가 미소 지었다.
“그럴지도. 그러니 마음 써 줘.”
레이나가 웃으며 몸을 돌려 그를 마주하고 아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당신은 너무 멋있고, 능력 있고, 책임감 있는 최고의 남자예요.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을 당신처럼 생각한 적 없어요.”
“…….”
레이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짧게 만났다가 헤어졌지만, 당신이 좋은 사람인 걸 알 수 있었고, 기억에 남는 사람이어서 오 년 동안 내내 제 마음에 남아 있었어요.”
“…….”
“언젠가 당신이 이렇게 잘 됐으면 좋겠다고 그때도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레이나가 머리를 쓸던 손을 내려 그의 뺨을 만졌다.
“당신이 다치지 않았으면 했고, 당신이 무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는 달아나도 된다고,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레이나가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당신이 달아나지 않고 맞서고 있다는 소식은 당신이 들려주는 대답인 것 같았어요. 나 잘하고 있다. 나 무사히 잘 있다. 걱정 마라…….”
“…….”
“그렇게 당신 소식을 들으며 오 년 동안 기다렸어요.”
“…….”
시선이 교차했다.
“그러면서 그게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이 된 것 같아요. 당신이 잘됐으면 좋겠다……. 무사했으면 좋겠다.”
“…….”
“나만 아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사랑에 여러 형태가 있다면, 그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땐 당신이 나한테 돌아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레이나가 웃었다.
“이렇게 당신이 돌아와서 다시 만났으니까, 이제는 떠나가지 말아요. 이젠 집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매일 매일.”
“…….”
아서는 한동안 레이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가만히 있었다.
“자주 바라게 될 것 같네. 당신이 마음 써주는 거.”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레이나가 웃었다.
“이런 게 당신한테 힘이 된다면 얼마든지요. 매일 아침저녁으로도 말해줄 수 있어요.”
“…….”
“당신도 가끔 해 주세요.”
“…….”
그리고 레이나가 웃으며 그를 놓아주려고 했을 때, 아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
“날 걱정해 주는 말을 했던 만큼, 당신이 날 가끔은 생각해 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당신이 날 떠올려 줬으면 했고…….”
아서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가 이어졌다.
“……라이언 달튼처럼,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런 뜻이 아니었지. 내가 여기서 잘하고 있으면 당신한테 전해질 거라고, 당신이 의외라는 얼굴을 하고 내 이야기를 전해 듣는 일이 한 번은 있을 거라고. 놀란 당신이랑 언젠가 재회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
“그게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이 된 거겠지.”
아서가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
“그게 사랑이 된 건. 다시 만난 다음부터였지 싶어.”
“…….”
“당신이 억지로 온 것만이 아니라. 내게 진심으로 마음 써 준다는 걸 느끼고서부터, 천천히.”
‘이 사람이 내 사람이었으면…….’
“그래서 다른 남자를 유난히 신경 쓰게 됐던 순간도 있었고. 당신을 보내야 한다고, 당신은 억지로 온 자리였고 내가 마음을 얻을 수는 없을 거라고.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들도 있었어.”
“…….”
아서는 피식 웃으며 딴 데로 시선을 돌렸다.
“뭐, 핑계일 수도 있어. 그냥 독점욕이 있는 게 내 천성인데 변명하는 걸 수도 있겠지.”
“…….”
다시 그녀를 마주 보며 아서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제 못 무르게 됐어. 당신이 선택한 남편이니 이제 운명이려니 받아들여요.”
“…….”
레이나가 눈을 글썽이며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의 어깨 뒤편. 발코니 바깥에 굵은 나뭇가지가 우거져 있었다.
그 앞에 있는 아서를 보니, 비 오던 날, 그가 자신을 찾아왔던 순간이 떠올랐다.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거길 왔을까…….
나는 내게 오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당신을 기다렸다.
이미 그 순간에는 나도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당신이 그동안 내게 마음 써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 년의 동경과 기다림은 이미 그때 그를 더 깊이 생각하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바라보면 애틋해지는 마음으로 변모해 있었다.
헤어질 걸 생각하고 몇 번을 돌아섰지만, 지금 그들은 그때와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장소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숨어있었어도, 거짓과 가식이 있었어도.
그 아래는 통하는 진심이 있었어서.
어려움이 있더라도 함께 가 보자고, 새로운 약속을 하고서.
아서가 레이나의 손등에 키스하며 말했다.
“데뷔 축하해요. 사랑하는 부인.”
* * *
위아래, 양옆 발코니에 나와 숨죽이고 있던 귀족과 젊은 사람들, 펜대를 쥐고 메모지 위에 손을 놀리던 기자들이 감동을 받고 입을 틀어막았다.
* * *
발코니에서 무도회장 홀로 돌아온 아서와 레이나가 두 번째로 춤을 추고 나서, 다가온 렘브란트 클라인이 ‘저 좀 살려 주세요.’ 하는 얼굴로 춤을 청했다.
그의 뒤로 수십 명의 레이디와 귀부인들이 클라인 공자를 노리는 시선을 쏟아내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몇 시간 째 몰려드는 인파 속에서 끝없이 인사를 받고, 인사를 건네고, 끝없이 춤을 청하고 끌려다니고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발코니로 나가서 쉴 틈조차 없었다.
황태자보다 더 심한 것 같았다.
“…….”
레이나는 조금 불쌍해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레이나와 플로어로 나가며 비로소 그는 편안한 상대를 만나 한숨 돌리는 얼굴이 되었다.
“……괜찮으세요?”
“……저 표정 관리 안 되고 있나요?”
“네, 조금…….”
“하하…….”
작게 웃으며 렘브란트가 지친 속내를 조금 내비쳤다.
“……어떻게든 되겠지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끝이 안 나네요. 춤을 청하지 않으면 실망할 사람들이 너무 많이 남았어요.”
“……혹시 결혼하고 싶지 않으세요?”
“……해야죠. 가문을 이어받아야 하니까.”
한숨을 쉬지는 않았지만 느껴졌다.
그는 형제들에게 기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클라인’ 가문의 형제들 중 가주가 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그뿐이다.
게다가 지금 이 상황.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중요한 가문의 아가씨들과 즐겁게 대화하면서도 지나치게 각별하게 여겨질 만한 여지는 두지 않고 희망이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정신노동을 하는 중일 거다.
만만치 않겠지.
황태자 전하처럼 대충하면 이렇게 힘들진 않을 텐데…….
배려하는 성격이라서.
레이나는 진심으로 딱하다고 생각했다.
렘브란트는 설렘이라곤 없이 정말로 지쳐 보였다.
이런 스트레스 받는 환경에선 누군들 눈에 들어올 수가 없을 것 같다.
“……경도 고충이 많으시네요.”
렘브란트는 그냥 웃었다.
“조금 더 천천히 생각할 수도 있었던 일을 급하게 생각하게 된 것뿐이에요. 아무래도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여러 가지 사소한 문제들이 따라오는 건 어쩔 수 없죠.”
레이나가 위로하는 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렘브란트 경은 아직 젊으시잖아요. 부담 갖지 마세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있을 거예요.”
렘브란트가 빙긋 웃었다.
“그럴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하지만 닥쳐야 마음의 준비가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춤이 조금 더 진행된 후에야 렘브란트가 조금 놀라워하며 레이나의 춤에 대해 말했다.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잘하시네요. 굉장히 이런 것에 익숙한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레이디는 정말로 급하게 춤을 배운 사람 같지 않네요.”
레이나가 그의 손을 잡고 돌며 웃었다.
“좋은 선생님이 계셨거든요. 오늘 벌써 여덟 번째라 익숙해졌기도 하고요.”
“소질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사실 이 얘기도 하려고 했는데…….”
렘브란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레이디가 그린 그림이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그림을 본 사람들이 모두 ‘릴리’가 어떤 화가인지 궁금해합니다.”
“……네?”
렘브란트는 정말 이 말을 하고 싶었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 말을 쏟아 놓았다.
“당신이라는 걸 밝힐 수 없는 게 무척 애석했어요. 지금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신상을 밝힐 수 없고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릴 의사가 없는 사람이라 안 될 거라고 말했지만. 유심히 보면서 다른 그림은 없냐고, 혹시 금전적인 문제라면 후원 가능하냐고 관심 갖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말을 한 사람들 가운데 클라인의 예술가 후원 재단 이사장도 포함되어 있고요.”
“…….”
레이나가 그에게 준 완성된 그림은 단 한 장뿐이었다.
시간을 많이 들이지도 못한 그림이었고, 함께 준 몇 장의 그림은 그냥 스케치였다.
그런 걸로 무슨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림을 그린 게 당신이라는 걸 알리면 언제든 입학이 가능할 정도로 모든 예술 학교에서 일관된 호평을 받았어요.”
레이나가 얼떨떨하게 더듬거렸다.
“말도 안 돼……. 시간을 많이 들이지도 못했고, 엄청 거친 그림이었는데요.”
“그러니까 더 가치가 있다는 걸 알아본 거죠.”
렘브란트가 미소 지었다.
“닳고 닳은 기술이나 기교가 느껴지지 않고 신선한데, 감각이랑 눈썰미는 숨겨지지가 않으니까요.”
“…….”
“제가 그랬죠. ‘클라인’의 명예를 걸고 진심이라고.”
렘브란트가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물론 레이디에게 지금 더 중요한 일이 많이 있고, 그림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닌 걸 알지만……. 언젠가 함께 레이디의 전시회를 열고, 그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