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8. 데뷔탕트 (14) (209/210)


#208. 데뷔탕트 (14)
2023.08.27.


레이디 크리스티나는 약혼자를 기다리는 지고지순함과 베일 너머로 엿보이는 것만으로도 소문이 자자한 아름다운 외모, 대륙 최대 부호의 외동딸이라는 좋은 조건으로 현 사교계 최고의 신붓감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하지만 대화 자체를 해 주지 않는 크리스티나의 성격에 대한 나쁜 소문도 많았던 데다가 ‘줄리어스’는 품위와 교양에 있어선 나쁜 방면으로 이름이 높았고.

그녀 자신이 사교 무대에 나온 적도 없었기에 춤이나 예법, 예술적 소양 등 진짜 교양 있는 레이디의 자질은 막상 꺼내 놓으면 금방 바닥을 드러내는 것 아니냐고 내심 기대하는 시선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명망 높은 정통파 귀족부터 자유로운 영혼의 용병 출신까지 모든 기사들의 춤 신청을 기분 좋게 받아 주면서도 멋진 모습을 보였고 품위를 잃지 않았다.

게다가 몰락 귀족이든 평민이든 그녀를 상대로 춤을 신청하며 꺼리는 태도가 없다는 것은 기사들이 그녀의 인격을 믿는다는 뜻으로 보였다.


‘인사도 잘 안 받아 주는 레이디라며?’

‘의외로 소탈한데?’

‘보기 좋네요.’

귀족들이 소곤거렸다.


‘……기사들이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꽤 좋아하나 봐요.’

‘쇼윈도 부부라고 그러던데.’

‘그런 황색 보도를 믿었어요? 난 저럴 줄 알았지.’

‘아서 경이랑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실제로 본 사람들 중에 그들이 쇼윈도라는 말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요.’

귀족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부실 보급으로 병사들이 화가 나 있다는 건 진짜 같던데요? 저도 들은 얘기가 많은데.’

‘그건 아마 사실일걸요. 하지만 레이디 크리스티나에 대해선 입장이 다를 수 있죠.’

‘저 기사 리오넬 잭슨이잖아요? 소문에 후작하곤 꽤 안 좋았던 모양이던데. 레이디에게 가장 먼저 춤을 청했어요.’

‘기사들이 그녀는 제 울타리 안의 사람으로 받아들였나 보네요.’

‘아. 아버지랑 선을 긋는군.’

잠정적인 판단이 내려지고 있었다.

젊은 귀족들이 무도회 홀에 나가 춤을 추는 사이, 중견 귀족들은 황실의 시선과 권력자들의 엇갈림을 관찰했다.

속닥이는 소리들은 어렵지 않게 들려왔다.


‘저렇게 보니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사교 교류를 안 하는 거 말이야.’

‘역시 그런 것 같죠? 부실 보급 문제랑 자기 아버지가 리오넬 경에게 실수한 게 부끄러운 줄을 알고 있으니 절제하는 거군요. 기사들하고는 분위기 좋네요.’

‘자기 인터뷰에서도 조용히 참전 용사 재단 이야기만 했던데.’

‘젊은 레이디가 저런 상황에서 아버지랑 남편 사이에 껴서 잘해 나가기 쉽지 않을 텐데. 기특해라. 기사들 마음을 얻었나 봐요.’

줄리어스 후작과 마틸다가 레이나의 출생의 비밀 문제와 데뷔탕트, 선제후 회의에 집중하느라 간과한 것은 병사들에게 후하게 보상하겠다는 약속으로 묻어둔 ‘부실 보급’ 문제를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문제는 경험자와 목격자가 많았기에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되어 귀족들의 판단에 근거가 되고 있었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가십과 달리 확실하게 몸집을 불리며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보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레이나는 기자들에게 부실 보급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에게 아첨하는 기자만 부른 마틸다는 부실 보급에 대한 말은 일언반구도 듣지 못했다.

귀족들 사이에서 ‘줄리어스’ 성을 쓰는 사람들의 부류가 둘로 나뉘며 그들의 평판이 나눠지기 시작했다.

아서와 크리스티나.

후작과 후작 부인과 율리아나.

아서와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줄리어스가 베푸는 자선 행사장에 예의상 참석은 했지만, 아서와 함께 조금 더 빨리 일어났고 그들이 직접 꾸린 ‘참전 용사 재단’에 더 집중했다는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는 해석들이 속삭여졌다.

* * *



“…….”

후작은 자신에게 이런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는 걸 생각지도 못한 채 발포주를 홀짝였다.

그동안 후작은 두 딸을 과시할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팔아먹어야 하는 딸은 적당히 무난한 귀족들이랑 춤추며 잘하고 있고.

잘된 딸 쪽은……. 내가 춤을 한 번 췄으면 보기에 좋았을걸.


‘에잉. 쯧.’

황태자의 다음 순서를 잡았어야 했는데.

딸내미랑 춤 한번 추기 이리 힘들어서야.

리오넬 잭슨은 따귀 사건이 순간 신경 쓰여서 끼어들지 못했다.

케이 포드는 그냥 왠지 불편해서 끼어들지 못했고.

그다음엔 레이나가 평민 기사들과 춤추기 시작하자 급이 안 맞다는 생각이 들어 후작이 끼어들기가 애매해졌다.

내가 그래도 선제후에다가 저 애 아버지인데 아서의 부하들 사이에, 그것도 평민들의 사이에 끼는 건 애매하지 않은가.

계산하다가 기회를 놓쳤다.

후작은 이젠 자신의 친딸로 입적된 된 제 이복 누이의 딸과 춤추며 그 애에 대한 자신의 기대와 내적 친밀감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나는 아서를 보호하라는 황제의 명을 수행하는 중이다, 나는 아서와 너의 편이다.

황후와 마틸다가 편을 먹고 널 견제할 테니 조심하라는 말도 슬쩍 해 줄 생각이었다.

그동안 못 챙겨 준 이복 누이의 딸에게 황제의 그림자를 드리워 주는 든든한 아버지 역할을 할 생각이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틸다는 다가오는 귀족들과 사교적으로 대화하며 무도회 홀을 바라보았다.

레이나는 한참 동안 상대가 바뀌며 춤을 추고 있었고 실수하지 않는 듯했지만, 케이 포드 외엔 눈에 띄는 이들이 아니었고 모두 아서의 기사들이었다.

레이나가 평민들과 춤을 추는 걸 보고 마틸다는 실소를 흘렸다.

비웃지 않기 위해 얼른 시선을 돌리고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는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춤을 추는 횟수가 아니라 춤을 추는 상대가 중요한 건데, 바보 같긴!

크리스티나는 띄엄띄엄 춤을 추고 있었지만 적잖은 귀족 자제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었다.

마틸다는 크리스티나가 직접 거절할 필요가 없도록 도도하게 나서서 귀족들을 가려 받았다.


“아, 영광이지요. 제 딸이 말씀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어머나,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딸이 춤 신청을 많이 받아서 조금 피곤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마틸다는 바쁘게 귀족들을 상대했다.

크리스티나의 데뷔는 괜찮아 보였다.


 

* * *

한편, 크리스티나를 도와주러 온 하녀들은 무도회장 구석에서 레이나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와……. 진짜 보통 아니다.”

“쟤는 진짜 겉과 속이 달라. 하긴 저 정도는 돼야 하녀가 모시는 아가씨를 밀어내고 가문 맏딸 자리를 차지하나?”

브로디가 슬그머니 하녀들 사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차라리 겉과 속이 같은 우리 아가씨가 낫지. 쟤는 착한 척하면서 동료들 뒤통수나 치고…….”

“우리 뭐 할 수 없어? 확 가서 포도주나 엎어 줄까.”

“…….”

브로디는 마리나가 레이나에게 이야기해 준 것을 떠올렸다.

·
·
·



「아가씨 혹시. ‘하녀 장부’라는 게 있는 거, 아세요?」

「……못 들어 보셨어요?」

「괴담처럼 그런 게 있다고 살짝 소문만 있던 건데요.」

마리나가 목소리를 낮추며 레이나에게 물었다.


「아가씨, 하녀 다락에서 가끔 뭐 쓰시던 거 있잖아요.」

「왜, 뭐 하냐고 물어보면 애들 잘 안 보여주시고 감추시던 거…….」

마리나가 레이나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그거…… 뭐였어요?」

「하녀들 이야기 쓰신 거…… 아니죠?」

「마님이나 허스트 부인한테 하녀들 개인 사정이나 비밀 보고하거나 하신 거, 아니죠?」

레이나가 대답하기 전에 먼저 브로디가 놀라서 버럭 했다.


「야!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사람을 뭘로 보고!」

레이나가 브로디를 저지하고 마리나에게 물었다.


「……계속 말해줄래?」

마리나가 끄덕이고 답했다.


「줄리어스 저택에 ‘하녀 장부’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하녀들 비밀이나, 꼼짝 못 할 약점 같은 거, 개인 사정 같은 거 적어 놓고, ‘좀 그런’ 일 시킬 때나 입막음시킬 때 써먹는…… 뭐 그런 비밀 장부요.」

「그리고 하녀들 사이에서 그걸 아가씨가 썼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어요.」

「아가씨가 몰래 하녀들 약점 같은 걸 모아서 마님이나 허스트 부인한테 갖다 바쳤다고요.」

브로디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마리나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거기에 하녀들 얘기만이 아니라 밝혀졌다간 큰일 날 가문 비리도 많이 적혀 있어서, 아가씨가 후작가 약점을 잡아 크리스티나 아가씨 자리를 빼앗는 데에 그걸 써먹었다고요.」

「그동안은 하녀들을 팔아먹었고, 아서 경이 오고 나선 후작가를 통째로 팔아먹었다 이거죠.」

「그동안 아가씨가 밤마다 뭘 몰래 쓰고 책자 비슷한 걸 만드는 걸 본 하녀들이 많아서 하녀들이 그 말을 믿고 있고요.」

「솔직히 전, 아가씨 여기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옆에서 봤으니까 안 믿었는데요.」

마리나가 머뭇거리며 레이나를 보고 말했다.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남편이랑 자기 자리랑 이름까지 내준 채로 가만히 묵인하고 있는 이 상황이 이상하게 보이는 건 사실이라서.」

「그리고 아가씨가 하녀들이랑 잘 안 어울리고, 뭘 혼자 몰래 쓰는 건 꽤 여러 명이 봤잖아요.」

「……그러니까 어느새 적지 않은 애들이 믿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하녀들이 아가씨를…… 그렇게 보고 있는 거예요.」

브로디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노발대발했다.


「그걸 믿어? 아가씨가 모은 건 신문이지 하녀들 얘기가 아니었다고!」

「아가씨가 하녀들 첩자를 할 거였으면 하녀들이랑 더 친하게 지냈겠지!」

「그리고 하녀들 이야기를 보고했대도, 일러바친 사람보단 그걸 빌미로 협박하는 사람이 나쁜 거 아니야?」

「마님한테 붙어 있는 건 자기들이면서 왜 아가씨를 욕하는데?」

마리나가 대답했다.


「마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거지. 놀랍지도 않은 일이잖아.」

「하지만 같은 처지에 있던 하녀가 그랬다는 건 배신감이 든다 이거야.」

「처음엔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더라도 이제는 결혼해서 다른 저택으로 가 버린 아가씨를 편들 이유도 없는 데다가, 내 정보까지 팔았을 수도 있는데 옹호하면 바보 되는 분위기인 거지.」

「마침 질투도 나겠다, 요새 들어 잘해 주는 아가씨도 피해자 같고 동질감 느껴지겠다. 크리스티나 아가씨한테 충성하는 척 레이나 아가씨를 흉보는 거, 마음 편하고 정의로워 보이잖아.」

 

* * *

발코니에 바람이 불어왔다.

레이나는 무심결에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몫을 해내는 동안, 말없이 그 곁을 지킨 아서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조용히 그 귓가에 정리해 주었다.

레이나가 미소 지었다.


“아서.”

“응. 부인.”

나는 폭로전이 벌어지길 바라지 않아요.

하지만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시작될 수도 있을 것 같고,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말들 대신 레이나는 물었다.


“당신은 날 언제부터 사랑하게 됐어요? 처음 만난 그 밤에 우리가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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