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데뷔탕트 (13)
(208/210)
207. 데뷔탕트 (13)
(208/210)
#207. 데뷔탕트 (13)
2023.08.24.
군무가 끝난 후, 무도회 홀에 선 아서와 레이나에게 카일 황태자가 다가왔다.
웃는 눈엔 여전히 장난기가 엿보였지만, 황태자로서 완벽하게 차려입은 카일은 사뭇 위엄있는 모습이었다.
“…….”
아서는 얼핏 보기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벌써부터 두통이 오는 듯한 눈빛이었다.
레이나는 속으로만 웃었다.
카일이 가슴에 손을 올리고 레이나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한 곡 함께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아서의 레이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의 다음 춤 상대가 카일 황태자일 거라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실망시킬 생각은 없었다.
레이나가 그의 손을 잡았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가 레이나의 손을 받으며 눈을 찡긋했다.
“정말 그래도 되나요? 아서가 날 죽일 것 같은데.”
“…….”
레이나는 딱히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는 황태자의 거침없는 단어 선택에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서가 피식 웃으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내가 춤을 오래 추는 데에 익숙하지 않으니 짧게 부탁드립니다.”
“그래? 나보다 잘하시는 것 같은데.”
당황한 레이나가 민망한 듯 웃었다.
“그럴 리가요. 방금 실수하지 않은 건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제가 전하의 발을 밟으면 일부러 그랬다는 오해를 살까 두렵네요.”
아서와 카일이 동시에 말했다.
“밟아도 괜찮아요, 부인.”
“자주 없는 기회입니다. 황태자 밟기.”
“…….”
레이나는 눈이 동그래졌다가 결국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진짜 밟으면 내가 뭐가 돼요.
그래도 덕분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레이나는 황태자의 손을 잡고 홀로 나갔고, 악단은 다음 무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수백 쌍의 남녀가 홀로 걸어 나오며 자신의 파트너에게 예를 표하고 미소 지었다.
카일이 말했다.
“지은 죄가 많아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튼튼한 구두를 신고 왔습니다. 편하게 밟으세요.”
레이나가 웃었다.
“혹시 정말 밟더라도 고의는 아니에요, 아시죠?”
레이나도 첫 스텝을 떼었다.
레이나에게 내내 사교춤을 가르친 교사였던 케이 포드와 이사벨 포드는 레이나에게 여러 차례 주의를 주었다.
아서 경과 관계가 중요한 사람이면 거절하면 안 되고, 정치적으로 아군 관계에 있는 사람을 견제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신청하는 춤은 주의 깊게 받아야 한다고.
아서나 레이나가 그들과 모종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게 될 가능성이 높고,
그녀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누구와 춤을 추었는가는 정치적인 제스처로 해석되니까.
그들의 조언은 모두 사실이었고 레이나도 같은 의견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황태자의 손을 잡는 과정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아서 다음엔 나하고 춰요. 사정 모르는 사람들하고 춤추는 건 최대한 피하는 게 좋겠죠?」
레이나가 춤을 연습할 때 찾아왔던 카일 황태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는 아서 다음에 그와 춤을 추게 될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해 넘겼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카일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건 진심이 담긴 배려였다.
아서를 진정으로 아껴주고 미안해하며 안타까워하는 그의 형제.
귀족의 정점에 있는데도 누구보다도 솔직한 사람.
그에게는 그런 정치적 제스처에 대한 계산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결국은 같은 행동이 된다는 것이 묘했다.
황태자 전하에게는 그런 계산이 없었을 텐데.
「부러워 죽겠네.」
「한잔만 하자, 이 자식아.」
「넌 아쉽지도 않냐?」
“…….”
레이나는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계산된 모습과 진심이 만나는 지점에 대해 생각했다.
귀족들의 말과 행동은 마음에 없는 꾸밈과 허례허식으로 가득하다.
그래도 그사이 어딘가에는 가식과 진심이 만나지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서 앞에서 내세웠던 거짓된 이름의 가짜 혼인.
그 사이 어딘가에도, 일말의 진심이 닿는 지점이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고마워요.”
“네?”
황태자의 목소리에 레이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가요?”
카일이 웃었다.
“나와 아서를 위해 레이디가 해 준 모든 것들.”
“…….”
황태자 전하가 아서 경을 구해 준 걸로 가짜 보도를 하면 어떠냐는 의견을 냈던…… 그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도 그런 거창한 말을 들을 정도로 한 것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레이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
자신이 받은 용서와 보호가 훨씬 감사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되었기에 염치가 없었다.
레이나가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카일이 말했다.
“춤 연습 정말 열심히 했네요.”
스텝과 박자가 딱딱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솔직히 이 정도로 잘하실 줄 몰랐습니다.”
“…….”
레이나가 작게 웃었다.
“네, 두 분 위해서 열심히 연습했어요.”
카일이 특유의 장난스러운 눈빛에 조금은 진심을 담아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아서를 기다려 준 것, 아서의 가족이 되어 준 것도 고마워요.”
“…….”
레이나가 입을 다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일이 웃었다.
“아서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장난기 어린 눈매로 툭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제가 아서를 책임진 적은 없지만요. 말하고 싶었어요.”
“…….”
카일의 마지막 말과 함께 곡이 끝났다.
레이나는 조금 울컥해서 예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네.”
레이나가 황태자의 에스코트를 받아 아서의 곁으로 돌아왔다.
아서는 다른 사람과 춤추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각하. 아까부터 딜로아 변경백께서 각하를 바라보고 계신데요…….”
트리스탄이 작게 묻고 있었다.
“변경백 각하의 따님 중 한 분께 춤을 청해 주시면 변경백께서 기뻐하실 텐데…….”
딜로아 변경백은 딸이 셋이나 있는 백전노장으로, 전쟁에서 든든하게 아서의 등을 지켜준 전우였다.
아서가 트리스탄에게 뭐라 귓속말했다.
“…….”
트리스탄의 복잡미묘한 표정을 보니 왠지 아서는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
혹시 전혀 안 추려는 건 아니겠지?
변경백은 아서에게 황태자만큼이나 중요한 전우였다.
레이나는 아서에게 슬쩍 춤추지 않으실 거냐고 물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기회는 없었다.
놀랍게도, 크리스티나와 가장 먼저 춤춘 줄리어스 후작이 활짝 미소를 지은 채 인파를 헤치고 레이나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아버지가 딸과 춤추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민망한 일이라 여기는 아버지들이 많았기에, 그것은 보통은 딸 바보라 소문이 나는 것을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행보였다.
하지만 사랑과 애정을 장전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후작이 레이나 앞에 도달하기 전에, 슥 다가온 기사가 후작과 레이나 사이에 섰다.
리오넬 잭슨이었다.
“레이디. 제가 한 곡 청해도 되겠습니까?”
“…….”
레이나가 조금 놀라 그를 올려다 보았다.
리오넬은 사실상 레이나의 가장 밀접한 호위 노릇을 해 준 사람이었다.
기사가 존경하는 상관의 아내에게 춤을 신청하는 것은 아름다운 미덕으로 여겨지는 데다 일상적인 일이었고.
레이나는 마음속으로 고마워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주었다.
“물론이죠. 영광입니다, 리오넬 경.”
리오넬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그는 몰락 귀족 출신이었지만, 춤은 익숙한 듯했다.
레이나는 무도회에 오랜만에 나섰을 아서의 기사를 민망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실수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러나 오히려 리오넬 쪽이 리드하며 군무에서 방향을 틀리는 작은 실수를 했고, 레이나는 익숙하게 그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틀린 것을 무마해 주었다.
그는 민망한 듯 조금 얼굴을 붉히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춤은 오랜만이라.”
“아니에요.”
레이나가 웃으며 그를 이끌었다.
무사히 춤이 끝났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저야말로요, 리오넬 경.”
리오넬의 에스코트를 받아 돌아오자 다음 순서로 기다리고 있었던 듯 케이가 다가왔다.
자신의 여동생인 아멜리아 포드와 첫 번째 춤을 추고 돌아온 케이는 피식 웃었다.
“리오넬 경에게 선수를 빼앗겼네요. 세 번째는 저일 줄 알았는데. 한 곡 청해도 되겠습니까, 레이디?”
당연히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어느 정도 추게 될 거라고 예상한 상대이기도 했다.
레이나가 웃으며 그의 손을 받았다.
“물론이죠, 케이 경.”
케이와의 춤은 익숙했다.
레이나는 이사벨 포드를 제외하고는 그와 가장 많이 춤 연습을 했으니까.
레이나는 익숙하게 그의 팔에 손을 얹고 홀로 나갔다.
춤이 시작되자, 케이는 입을 열었다.
“마리나 양 일,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했습니다.”
레이나가 미소 지었다.
“아뇨,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처음부터 제 일이었는데 제 부족한 부분을 도와주신 걸요.”
“……줄리어스 저택 하녀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들, 마리나 양이 이야기해 준 것에 대해서도.”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레이나가 차분하게 웃었다.
“해결할 수 있어요.”
케이의 표정이 조금 평소와 다르게 보였다.
“……적어도 저택의 일에 대해선, 제가 레이디의 선생님 역할에서 물러날 때가 된 것 같네요.”
“네?”
케이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에게서 본 적 없는 미소였다.
“아멜리아가 생각보다 많이 컸더군요. 저는 아주 어릴 적의 그 아이를 기억해서 언제까지고 물가에 내놓은 아이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
케이가 조금 미안한 듯 웃었다.
“안주인으로서 레이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제 예상보다 훨씬 빠르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 말과 동시에 곡이 끝났다.
레이나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돌아가며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케이 경. 그래도 아직 배울 점이 많아요. 곁에 있어 주세요.”
“네. 곁에 있겠습니다.”
케이 경이 웃었다.
돌아왔을 때, 놀랍게도 트리스탄이 머쓱하게 다가왔다.
레이나는 놀라워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크흠. 한 곡 받아주시겠습니까?”
트리스탄 경이 춤을?
레이나가 얼떨떨하게 반문했다.
“……정말요?”
트리스탄이 비장하게 답했다.
“폐는 끼치지 않겠습니다. 나름대로 연습했습니다. 아내도 허락했고.”
그리고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레이나가 웃었다.
“영광입니다, 트리스탄 경.”
트리스탄은 아주 긴장했다.
레이나는 자신의 모습이 이랬을까 생각하며 그를 리드했다.
트리스탄의 춤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정말 잘하시네요. 아내 분과 연습하신 거예요?”
“……크흠. 네. 소녀 같은 사람이라. 남작 부인이 된다고 나름대로 혼자 열심히 연습했더군요……. 저에게 상대해 달라고 해서요.”
레이나가 미소 지었다.
“괜찮으시면 다음에 부인과 아드님 같이 뵙고 싶어요.”
“……아내가 기뻐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트리스탄과 춤이 끝났을 때, 나머지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듯.
‘설마……. 설마?’ 하는 얼굴로 기사들이 쳐다보았다.
심지어 아서까지도 놀란 눈빛이었다.
루칸이 뻔뻔하게 레이나 앞으로 와서 턱을 쳐들었다.
“왜요? 저만 거절하시게요?”
“…….”
루칸이 당당하게 손을 내민 채 대단히 서운하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트리스탄 경도 받아줬으면서! 저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뭐 대단히 어렵지는 않아 보이는데요?”
리오넬과 케이가 하얗게 질린 이마와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주변 귀족들이 당황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다시 타이밍을 놓쳐 버린 후작이 당황하여 바라보았지만, 이미 레이나는 완전히 그의 존재를 잊었다.
레이나가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대답했다.
“거절할 리가 있나요! 영광입니다. 루칸 경.”
루칸이 기분 좋은 듯 씨익 웃었다.
“하하. 잘 부탁드립니다!”
“…….”
아서는 피식 웃고는 레이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