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데뷔탕트 (12)
(207/210)
206. 데뷔탕트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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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데뷔탕트 (12)
2023.08.20.
귀족들은 저마다 집 앞에 배달된 소식지를 집어 들고 사교계의 동향을 살폈다.
【 줄리어스 자선 행사 성황리에 마쳐 】
【 클라인의 자선 미술 전시회 화제, 기부금 역대 최고 규모 】
귀족들은 자신이 참석한 행사가 괜찮은 평가를 얻었는지, 명망 있는 귀족이 어디에 참석했는지 살펴보며 앞으로는 어떤 행사에 참석을 하고 어디와 인연을 만들어가야 가문을 위해 도움이 될지를 타진했다.
그들에게도 각자 어울리며 가십을 나누고 정보를 교환하는 사교 모임이 형성되고 있었지만, 신문을 살피며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신문에서 말하는 내용이 일치하는지를 비교해 보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 외에도 어느 행사에 어느 가문들이 참석했느니, 모 영애가 드레스 코드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실수를 범했느니, 동행인 없이 젊은 남녀가 정원에서 단둘이 있다가 발각되는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느니 하는 가십들이 중요한 일처럼 신문에 실렸고 많이 읽혔다.
데뷔탕트의 아가씨들은 어떤 행동을 하면 추문이 되는지, 어떤 사람들과 교류해야 도움이 되는지를 학습했고, 부모님과 샤프롱, 가문 어른들의 조언을 들었다.
【 데뷔탕트의 레이디들이 뽑은 결혼하고 싶은 남성 순위 】
【 무도회 에티켓 ― 데뷔탕트의 무도회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 5가지 】
【 제국 소식지 단독 특종 : 줄리어스 후작 부인, 줄리어스 영애의 인터뷰 】
궁금증을 일으키는 헤드라인을 건 신문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리고 레이나가 각오했던 가십도 이름을 숨기고 여기저기 실려 있었다.
― 사이가 좋은 것으로 알려진 모 명문가의 자매가 귀걸이 하나를 두고 아귀다툼을 벌여……
― 쇼윈도 부부에 이어 쇼윈도 자매?
― 사교계의 유구한 쇼윈도 전통 또다시 이어지나……
― 유가족에게 소식을 전하며 눈물 흘리고 데뷔탕트의 아가씨에겐 꽃을 건네주지만, 동생에게는 가혹한 레이디의 실체는?
― 자선 행사에서 그녀가 먼저 사라진 이유는?
― 자매가 서로 누가 끝까지 행사장에 남을지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다가, 참을성 없는 쪽이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는 목격담이……
“…….”
크리스티나가 술을 마시고 드레스를 망친 것을 보았다거나, 둘의 다툼을 보았다거나 하는 낭설이 돌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마음의 각오는 했지만 실제로 소식지에 과장되고 왜곡된 이야기가 버젓이 실린 모습을 보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부분의 가십은 줄리어스의 위세가 두려워 직접적인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크리스티나와 율리아나의 이야기라는 걸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었다.
“……레이디는 무도회 준비에만 신경을 쓰세요. 제가 만나보겠습니다.”
레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하지 마세요.”
케이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
“그냥 두세요. 해명하는 기사가 지면으로 나오면 더 수상하게 보일 거예요. 보는 눈이 많으니 입막음했다고 여겨질 거고요.”
그리고 명망 있는 고위 귀족들이 주로 소식을 싣는 ‘재미없는’ 신문에 처음으로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직접적인 발언을 담은 기사가 실렸다.
판매 부수가 높은 인기 신문은 아니었지만, 많은 신문사들이 하루 늦게 베껴서 후속 기사를 내놓는 발원지가 되는 신문사였다.
신문사의 발간 텀이 긴 편이었기에 일전에 했던 레이나의 인터뷰가 뒤늦게 실린 것이었다.
【 참전 용사 재단 발족, ‘제대한 군인들에게 새로운 소속감을 주고, 그들의 상실감을 치유하며 영웅들이 일상의 품으로 돌아가는 데에 도움을 줄 것’ 】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참전 용사 재단’에 대해 인터뷰한 기사는 꽤 괜찮은 지면을 받았다.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인터뷰라는 점은 강조되지 않았다.
헤드라인에 그녀의 이름조차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누구나 그것이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인터뷰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녀가 시시한 가십에 개의치 않으며 자신의 의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는 진실성 있게 느껴졌다.
크리스티나의 침묵과 자매의 불화에 대한 추측성 기사들을 쏟아낸 가십지들은 머쓱해졌고, 그녀와 ‘참전 용사 재단’에 관한 후속 기사를 앞다투어 내놓았다.
이례적으로 ‘재미없는’ 신문의 판매 부수가 조금 올랐다.
【 역대 최대 규모의 데뷔탕트, 황궁 앞 인파 통제 예고 】
그리고 급한 사람들이 찾을 수 있을 드레스 수선 숍, 부티크의 이야기가 모든 신문 곳곳에 실리며, 데뷔탕트 무도회의 날이 다가왔다.
* * *
무도회의 날이 밝았다.
수도에 모인 모든 귀족들이 기다리던 행사의 날이었다.
궁전이 개방되며 초대장을 받은 수백 명의 귀족들이 마차를 타고 모여들었다.
데뷔탕트의 레이디들이 설레고 긴장한 얼굴들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하인들은 데뷔탕트의 초대장을 확인하고 귀족들을 궁전에 입장시켰다.
젊은 레이디들과 그들의 보호자들, 신사들이 황궁의 무도회 홀로 들어섰다.
초대장이 궁정 하인의 앞 테이블에 높이 쌓이고, 매년 열리던 데뷔탕트 무도회의 다섯 배에 달하는 인파가 홀을 채웠다.
황제와 황후 부부, 그리고 카일 황태자가 위층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자리에 앉았다.
줄리어스를 비롯해 선제후 가문의 사람들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아서와 레이나가 황제 부부와 황태자에게 예를 표해 인사한 후 황실 식구 바로 아래의 상석에 앉았다.
데뷔탕트 무도회의 첫 춤을 시작할 가장 중요한 귀빈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황제 부부의 앞에서, 목소리가 좋은 궁정 하인이 앞으로 나섰다.
궁정백으로부터 연설문을 받아든 하인이 두루마리를 펼치고 전쟁의 승리와 되찾은 평화, 제국의 미래에 대한 연설을 차분하게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공을 귀족들에게 돌렸다.
“……긴 시간 고귀한 여러분이 보여주신 기다림과 명예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날의 영광이 모두 여러분의 지지 위에 있음을, 황실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즐겨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귀족들의 긴 박수가 홀을 메웠다.
“…….”
끊기지 않은 박수 속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당연한 이름이라, 오프닝 댄스를 하는 두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는 일은 생략되었다.
자연스럽게 다음 순서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아서는 자신의 레이디를 에스코트해 일어났다.
“…….”
침착하게 그를 따라 일어났지만, 레이나는 그 어떤 때보다도 심하게 긴장했다.
아서는 레이나의 손이 긴장으로 차가워진 것을 느꼈다.
아서가 함께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며 물었다.
“레이디.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여하신 소감은?”
레이나가 작게 떨리는 숨을 뱉으며 대답했다.
“……제가 이런 걸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여태까지 한 것 중에 제일 긴장되네요.”
아서가 미소 지으며 작게 속삭였다.
“잘하고 있어. 체질인 것 같은데.”
레이나가 걱정으로 굳은 얼굴로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머릿속이 하얘요.”
그 많은 연습들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아서는 너무 바빴고, 레이나와의 춤 연습에 시간을 거의 할애하지 못했다.
마지막엔 레이나조차 바빴고…….
이 사람이랑 춤 연습을 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면 좋았을걸.
연습한 만큼 할 수 있을까?
너무 긴장돼.
케이 경은 아서 경의 춤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서가 레이나의 손등에 입 맞추며 웃었다.
“나만 생각해.”
레이나가 처음으로 웃었다.
“그거 굉장히 어려우면서도…… 쉬운 주문이네요.”
제가 당신을 위해 이 모든 걸 하고 있는 걸 알아요?
레이나는 아서와 걸음을 맞추어 손을 잡고 중앙으로 걸어갔다.
비어 있는 중앙 홀에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홀 중앙에 도착하자, 둘은 잠시 잡은 손을 놓고 떨어지며 서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서로를 마주 보고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 사람들이 가만히 소리를 낮추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
잠시 그렇게 마주 보고 있다가, 둘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아서의 손이 레이나의 등허리에 스치듯이 닿았다.
레이나는 살짝 떨며 심호흡하고 아서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시선이 교차하고, 음악의 전주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
레이나는 막 첫 번째 스텝을 밟으려다 조금 당황했다.
내내 연습했던 곡과 시작부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단 두 마디의 전주 이후 시작되었던 연습곡과 달리 훨씬 긴 정식 전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
아서는 물끄러미 레이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레이나가 살짝 눈을 감았다.
연습한 것과는 달랐지만, 레이나는 아서의 팔 위에 손을 얹은 채 음악에 몸을 맡긴 듯이 하늘하늘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아서를 신뢰하는 듯 눈 감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당황해서 멀뚱히 굳어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지만, 음악이 시작되기 전에 눈을 감고 긴장을 풀며 흐름에 몸을 맡기는 모습은 음악에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전주가 이어지는 동안, 산책하는 것처럼 치맛자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바람에 반투명한 커튼이 햇살을 받아 흔들리는 것처럼 옅은 춤이었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고요한 음악 속에 잔잔히 흔들리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허리에 가볍게 손을 대고 있는 아서는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꽃 한 송이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
긴 전주는 음악의 감성을 더욱 고조시켰다.
전주가 끝나 본 곡에 들어가기 직전.
눈을 뜬 레이나는 왠지 울컥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실수하면 수습해 주세요.”
아서가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내가 부탁해야 할 것 같은데.”
레이나가 왼손으로 그의 어깨를 다시 짚고, 오른손은 아서가 잡아 올렸다.
동시에 둘이 연습한 첫 스텝을 떼었다.
아서 팔을 잡고 두 번째, 세 번째 스텝을 밟으며 레이나는 아서와 함께 가야 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
가장 많이 연습한 춤이었다.
실수했을 경우의 대처까지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로.
레이나는 차분하게 미소 지은 채 아서의 리드에 기대어 음악을 따라 움직였다.
시선은 어떤 다른 곳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호기심과 평가의 의도를 가지고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서서히 분위기에 녹아들며 감탄으로 변모했다.
순수한 호의. 그리고 격려.
전쟁이 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에 나간 가족과 친구를 기다렸던 경험이 있었다.
이어지는 비보와 비판이 사라지길 기다렸고,
전쟁의 불길이 본국까지 침범해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시간이 끝나길 기다렸다.
떠난 사람들의 빈자리가 채워지길 기다렸고.
평화를 기다렸다.
그건 모두의 마음이었다.
멀어졌다가, 자신의 공간에서 춤춘 뒤 다가오고.
다시 손을 잡고 서로 올려다보며 미소 짓는 과정 안에 그 모든 시간이 녹아 있었다.
아서는 전쟁을 끝낸 영웅이었다.
그는 자신의 복잡한 입지에도 황태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것은 다시 보답받았다.
그의 신부는 자신의 자리를 오 년 동안 지켰고.
자신의 신부에게 돌아온 그는 그녀의 데뷔탕트를 축하해주며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첫 춤을 추고 있었다.
“…….”
레이나가 그의 팔을 살짝 잡고 턴하고, 반대 방향으로 다시 몇 걸음 떠나갔다가 금방 다시 그에게 돌아갔다.
아서가 턴하고 돌아온 그녀에게 다시 손 내밀고 춤을 이어갔다.
지금은 모두가 그를 존경하고 있었지만, 오 년 전에 그는 무시당하던 신분이었다.
오 년 전엔 그에게 가족이 없었지만, 지금 그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끔찍한 평판을 가진 황실의 사생아로 시작해, 모두가 선망하는 사내가 된 사람이었다.
클라이맥스로 달려가며 벅차오르는 음악과 춤의 타이밍이 딱딱 맞아떨어지며 분위기가 몰입되었다.
아서가 레이나를 붙들어 공중에 한 바퀴 살짝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숨죽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레이나가 그 순간에 잠시 긴장했다가, 성공시켰다는 것이 기쁜 듯 수줍게 웃고 다시 춤을 이어갔다.
세상에 둘 뿐인 듯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과 긴장된 미소에, 평가하는 시선들이 흩어졌다.
백사장에 그려진 낙서가 파도 한 번에 휩쓸리듯.
둘 사이에 대해 속삭여지던 모든 가십이 깨끗하게 지워졌다.
둘이 서로를 마주 보고 미소 지으며 춤추는 순간에 그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음악 소리 위에 바닥을 딛는 사뿐사뿐 소리와, 흔들리며 치맛자락이 나풀거리는 소리, 사람들의 숨소리 모두 음악의 일부가 되며 섞여들었다.
아서와 레이나 사이로 음악이 감겨들었다.
음악이 막바지로 접어들며, 둘이 살짝 떨어졌다.
그리고 춤의 마지막 동작인 것처럼 미소 지으며 서로를 향해 정중하게 절했다.
사람들은 그 후에야 이 춤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
겨우 2분 남짓하게 이어진 사교계를 여는 첫 춤이었다.
하지만 둘의 춤은 전쟁이 끝났고, 전쟁에 다녀온 가족들이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아서와 레이나는 아주 잘 어울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레이나는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다.
‘잘하네.’ 목소리를 낮추며 속닥이는 사람들도 우호적인 미소를 짓고 박수를 보냈다.
댄스 홀로 수십 쌍의 커플들이 손을 잡고 들어오며, 군무를 함께하는 두 번째 곡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