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데뷔탕트 (11)
(206/210)
205. 데뷔탕트 (11)
(206/210)
#205. 데뷔탕트 (11)
2023.08.17.
“뭐? 마리나? 너랑 결혼할 사람?”
“…….”
볼튼 경이 자신의 형을 바라보며 난처한 듯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 노아 형. 이쪽이 내가 말한…….”
얼떨떨하게 답하던 제이미 볼튼이 잠시 어색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
그러고는 곧 실수했다고 생각한 듯 마리나 쪽으로 걸어가 몸을 틀며 소개의 방향을 바꾸었다.
“……마리나 양. 이쪽은 제 형님이십니다.”
“…….”
마리나의 불안하고 의심스럽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
볼튼 경은 한동안 어색하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마리나가 의사인 자신의 형 앞에 와있고 얼굴이 좋지 않다는 것이 신경 쓰이는지 이내 걱정스럽게 물었다.
“얼굴이 창백한데……. 혹시 몸이 아직 많이 아픕니까?”
창백한 이유는 조금 전까지 검붉은 물을 토했기 때문이었다.
의사 볼튼은 그의 뒤에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마리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의사 볼튼과 기사 볼튼을 보고 있다가 황급히 다가가 작게 목소리를 낮추어 그의 말을 끊었다.
“나에 대해서 말했어요? 가족한테? 결혼할 사람이라고?”
너무 가까운 거리에 제이미 볼튼이 반사적으로 조금 당황하며 살짝 상체를 뒤로 뺐다.
“……네. 어머님도 아십니다.”
“…….”
마리나의 좋지 못한 표정을 보고 볼튼 경은 긴장하며 친형 앞에서 약혼녀라 소개한 여자에게 적나라한 말로 매섭게 차이는 망신을 각오했다.
하지만 마리나는 ‘그럼 이제 정정하셔야겠네요? 아이는 없으니까요.’ 쏘아붙이지 못했다.
대신 마리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발을 동동 굴렀다.
“뭘 자랑이라고 그걸 벌써 말해요! 나한텐 말도 안 하고!”
마리나는 울상으로 볼튼 경을 붙들고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그녀의 싸늘하지 않은 얼굴을 마주한 볼튼 경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상기되었다.
마리나의 닦달이 이어졌다.
“왜 그걸 벌써 말했어요! 어떻게 될 줄 알고! 나를 믿지도 않으면서 왜……!”
볼튼 경은 혹시라도 임신 이야기가 나올까 봐 뒤에 있는 형이 더 듣지 못하도록 마리나의 말을 막았다.
“그게, 진지하게 결혼 이야기 나누고 있는 사람 있다고만 말했습니다. 부모님을 통해 혼담이…… 다소 적극적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중지하게 하려면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혼에 당신 허락을 못 받았는데 가족에게 먼저 말해 미안합니다.”
“…….”
그리고 볼튼 경은 결심한 듯 마리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마리나를 올려다보았다.
“마리나 양.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짜악!
뒤에서 의사 볼튼이 기사 볼튼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
제이미 볼튼이 울컥 치밀어오르는 화를 누르며 자신의 형을 돌아보았다.
“……형. 중요한 얘기 중이잖아! 무슨 짓이야?”
“…….”
중요한 얘기라는 걸 알아?
내 동생의 청혼 장소가 자선 행사장 내 사무실에서라니.
내 동생이 이렇게 머저리였다니.
누가 청혼을 이딴 식으로 우연히 마주쳐서 반지도 꽃도 없이 해?
노아 볼튼이 굳은 얼굴로 마리나와 제이미 볼튼을 바라보았다.
동생의 약혼녀가 임신 중이고 검붉은 물을 마셨다.
순간적으로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한 그였지만, 둘의 대화에서 최소한 몇 가지 최악의 가능성을 제거할 수 있었던 그는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았다.
“……인사가 늦었네요. 레이디 마리나. 저는 노아 볼튼입니다. 제이미 볼튼 경의 형입니다. 마리나 양에 대해선 결혼하실 분이라고 말씀 들었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그렇게 알고 계시고요. 혹, 레이디를 상대로 있어선 안 되는 일이 있었다면, 제가…….”
마리나가 다급하게 고개를 젓고 의사 볼튼을 바라보았다.
“아뇨, 볼튼 경에게는 잘못이 없어요. 저는 레이디도 아니에요. 그리고 볼튼 경과 결혼은 하지 않을 거예요.”
거기엔 ‘제발 볼튼 경에겐 모른 척해 주세요.’ 하는 간절한 빛도 숨겨져 있었다.
또다시 청혼을 거절당한 기사 볼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제가 책임질 거라고 했잖습니까.”
마리나가 홱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난 당신이랑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요!”
“마리나.”
“각자 갈 길 가요. 경도 저한테 휘둘리면서 동료들한테 폐 끼치는 거, 기사로서 경력에 먹칠 되는 거 싫으시다면서요. 그냥…….”
“……잠깐.”
볼튼의 표정이 굳어지며 창백해졌다.
그리고 스스로 이마를 짚었다.
마리나가 콕 짚은 그 말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 말…….”
“그래요, 들었어요. 당신이 동료 기사들한테 그렇게 말하는 거요.”
“…….”
볼튼이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마리나가 시니컬하게 쏟아냈다.
“‘어쩌다 그런 실수를 했는지 모르겠다. 실수였다. 하필이면 줄리어스의 하녀장이 될 여자를 건드려서.’”
“…….”
“‘곤란하다. 동료들한테 폐를 끼쳐서 미안하다, 아서 경에게 면목이 없다…….’”
기세 좋게 시작했지만 마지막엔 서러움에 울먹이며 목소리가 떨렸다.
자존심과 참담함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스스로도 외면했던 말들이었다.
“…….”
볼튼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 마른세수를 했다.
“……맙소사, 마리나.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요.”
“진심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시다니 참 친절하시네요. 하지만 계속 솔직하셔도 상관없어요. 서로 솔직해야 서로를 위한 결정을 하죠.”
마리나는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고 그를 외면했다.
볼튼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아픈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다른 기사들이 당신을 무시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대할 것 같아서 그런 거였어요. 제가 감싸 봤자, 하룻밤에 구워삶았느니 하는 소리나 할 것 같아서.”
“…….”
“당신한테 반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난 이성적이라고……. 당신이 여우라서가 아니라, 내가 당신한테 넘어가서 그러는 게 아니라, 상황이 그렇다는 식으로 말하는 게 더 존중받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멍청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진심이 아니었어요.”
“…….”
후우. 긴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하는 볼튼의 목덜미가 붉어져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볼튼은 나머지 무릎을 마저 꿇었다.
마리나가 당황해 한걸음 물러났다.
볼튼이 말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준비가 되지 않은 부족한 아버지라서 우리 아이가 빨리 떠났나 봐요. 다 내 잘못입니다.”
“…….”
“용서할 수 없겠지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되겠습니까? 진심이라는 걸, 말이 아니라 앞으로의 행동으로 증명할게요.”
“…….”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
침묵이 흘렀다.
마리나가 물었다.
“……그렇게 미인도 아니고 당신 스타일도 아니라면서 왜 이렇게까지 해요.”
볼튼이 시뻘게진 얼굴로 머뭇거렸다.
“그것도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창피해서…… 그렇게 말한 거 같습니다. 센 척하고 싶었나 봐요. 저도 제가 이렇게 멍청한지 몰랐습니다. 저도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서……. 솔직히 당신 예뻐요.”
“…….”
“……그렇지만 날 좋아하지도 않고 앞날 창창한 여자 사고 쳐서 주저앉혀 놓고, 내 눈에 당신이 예쁘다고 인정하는 건…… 너무 비열해 보이잖아요.”
“…….”
“……아니, 인정 안 하는 쪽도 비겁하긴 마찬가지네요.”
“…….”
볼튼이 마른세수를 하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당신 좋아하는 남자도 있다고 했잖아요.”
마리나가 얼떨떨하게 말했다.
“그건 제가 할 소리거든요? 당신이야말로 옛날 연인을 못 잊었다면서……?”
“그날은…… 여자랑 술 마실 땐 그렇게 말해야…… 있어 보인다고 동료들이 조언해서 그랬던 겁니다. 옛날 연인 같은 건 없어요.”
“…….”
그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작게 중얼거리며 창피해하는 볼튼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당신은 아니죠.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고 했던 말, 진짜잖아요. 나하곤 다르게.”
“…….”
“……당신은 맘에 둔 사람 따로 있는데 하룻밤 실수로 나한테 발목 잡힌 거니까. 그래서……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상황 핑계를 대고 싶었어요.”
“…….”
“센 척해서 미안해요.”
“…….”
“난 당신이…….”
“…….”
볼튼은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져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마리나가 그 뒷말을 기다리는 듯이 바라보고 있자 결국 붉어진 얼굴로 어렵게 말했다.
“……당신이 좋아졌단 말입니다. 마음에 들지도 않는 여자한테 순수하게 책임감 때문에 이렇게 매달리고 자기 바닥 다 보여 주면서 청혼하겠습니까……? 아이도 없는데?”
“…….”
“이미 당신이랑 우리 아이 키우는 상상을 너무 많이 했어요.”
“…….”
“너무 많이 상상해서 이제 다른 아내는 상상이 안 된다고요. 당신이 내 아내가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다고 생각하면 속이 탄단 말입니다.”
“…….”
“…….”
“아이 있어요.”
“……네?”
마리나가 울면서 주저앉았다.
“흐어어엉……. 당신 아이 아직 있다고요.”
* * *
레이나는 하녀와 관련된 일을 케이 경에게 맡긴 것을 후회했다.
이런 일은 내가 직접 하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겪었던 경험이 괜찮았다고, 케이 경에게 맡기고 다 잘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내가 케이 경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는데.
하녀의 마음은 내가 더 잘 알 수 있었을 텐데.
마리나는 결국 누구에게도 마음이 기울지 않는 상황에서 익숙한 상대이고 같은 여자인 크리스티나 아가씨 쪽을 택했다.
그게 최선이 아닐 걸 마리나도 알고 있었으면서.
불안하니까 모험이 아닌 원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택하는 마음을, 레이나는 이미 겪었기에 알 수 있었다.
“마리나. 앞으로는 케이 경 말고 나랑 얘기해.”
“…….”
마리나가 레이나를 바라보며 묵묵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훌쩍 코를 들이켰다.
……그게 안주인의 일이긴 하지.
「난 네가 잘못되지 않았으면 좋겠단 말이야.」
“…….”
마리나는 자신이 있을 곳을 결정했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앞으론 주인 아가씨로 모실게요.”
“뭐?”
레이나는 농담을 들은 듯이 웃었지만 마리나는 진심이었다.
마리나는 진지하고도 새침하게 말했다.
“저한테 주급 주실 분이잖아요. ……앞으론 실수하는 일 없을 거예요. 그동안 제가 많이 삐뚤어져 있었는데……. 앞으로는…….”
그리고 마리나는 조심스럽게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건 그냥 한 번 여쭤보는 건데요.”
“응.”
“……아가씨 쪽 하녀장 자리 비었나요?”
“…….”
레이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 * *
그리고 그날 밤.
완전히 짐을 싸서 옮겨온 마리나는 레이나를 찾아와 말했다.
“드릴 말씀 있어요. 줄리어스 저택이랑 크리스티나 아가씨에 대한 거예요. 줄리어스의 하녀들이 왜 아가씨한테 적대적인지는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마리나가 자신이 아는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