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4. 데뷔탕트 (10) (205/210)


#204. 데뷔탕트 (10)
2023.08.13.



“……혹시 내가 쓰러지면 의사 불러 줄래? 볼튼 경한텐 비밀로 해 주라.”

레이나의 눈이 커졌다.

레이나가 마리나의 팔을 붙들고 목소리를 낮춰 소리쳤다.


“어떻게 된 거야, 너, 검붉은 물을 마셨어? 언제?”

“…….”

마리나는 속으로만 태평하게 생각했다.


‘지금 널 내보내고 마실 거야.’

마리나는 팔을 교차시켜 배를 감싸고 허리를 숙였다.


“조금 전에.”

레이나를 내보내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여전히 치마폭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유리병이 숨겨져 있었다.

당황한 레이나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

아마 검붉은 물을 마신 하녀들이 그동안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어, 어떻게 해. 아파?!”

레이나가 놀라서 저를 걱정하는 걸 보자,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마리나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거짓말에 잘 속는 친구를 놀려먹는 기분이라 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레이나를 보니 상대적으로 침착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레이나가 벌떡 일어났다.


“의사 불러올게. 여기서 기다려!”

마리나는 속으로 태평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

레이나가 사라지자 마리나는 웅크린 몸을 폈다.

손에는 치마폭에 감췄던 유리병을 든 채였다.


“…….”

이제 의사가 오기 전까지, 마지막 시간이 생겼다.

그전에 마시면 돼.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어.

레이나가 의사를 데리고 와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안심이 됐다.

이걸 기대하고 내가 이곳에서 레이나를 기다렸나 보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필요한 건 마지막 결단뿐이었다.

아니면 두려울 때 곁에 있어 줄 사람이었을지도.


“…….”

욱신…….

아직 약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정말로 배가 아픈 것 같았다.


“…….”

하지만 조금 속이 쓰릴 뿐,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아가야, 미안.’

다음 생엔 좋은 엄마에게서 태어나길.

이왕이면 돈 많은 집에서.

서로 사랑하는 엄마 아빠 사이에서.


“…….”

‘나한테 나중에 다시 와 달라고는 못 하겠다…….’

미안해.

내 삶을 더 사랑해서.

시간 제한이 생기자 망설임은 사라졌다.

마리나는 머뭇거림 없이 약병을 입에 가져갔다.

오랜 망설임이 허무할 정도로 마리나는 단숨에 그걸 해치웠다.

아니, 해치울 뻔했다.

쨍그랑.

밖으로 뛰쳐나갔던 레이나가 달려오더니 순식간에 그 병을 빼앗았다.


“!”

마리나와 레이나의 손 사이에서 미끄러진 병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레이나의 드레스와 대리석 바닥에 검붉은 액체가 쏟아졌다.

마리나의 눈이 커졌다.


“……!”

마리나가 황망히 바닥에 깨진 유리병을 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짓이야!”

마리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굴렀다.


“내 약! 어떻게 구한 건데! 네가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미안하지만 레이나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너 지금 뭐 마시고 있었던 거야.”

마리나가 울컥했다.


“너 때문에 제대로 마시지도 못했어! 네가 뭔데 말려!”

레이나가 소리쳤다.


“그럼 네가 눈앞에서 독을 먹고 있는데 안 말려?!”

레이나가 소리치는 걸 처음 본 마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곧 앙칼지게 대답했다.


“이런 일로 인생 포기할 생각 없어. 독이라니? 검붉은 물이라고. 다 잘 살려고 이러는 거거든?”

역시.

하지만 쏟아진 검붉은 물의 냄새와 색을 보고 레이나는 확신했다.

자신이 먹었던 검붉은 물과 달랐다.

오래돼서 변한 거야.

동시에 레이나는 마리나의 불안함과 망설임을 알아챘다.

볼튼 경이랑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으면 받자마자 마셨을 거야.

이렇게 약이 오래되지 않았겠지.

내가 마리나를 발견하기 전까지 못 먹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건 진짜 제대로 내린 결정이 아니야.

내내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내가 오니까 그걸 핑계로 스스로를 떠밀어 결정한 거다.

레이나가 마리나를 바라보았다.


“다 잘 살려고 그러는 거라면서 왜 그렇게 망설였는데? 고민됐으면 볼튼 경이나 케이 경하고 상의할 수도 있었잖아. 지금 너 혼자서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 아니야?”

“케이 경?”

마리나는 코웃음 쳤다.

크리스티나 아가씨나 그쪽이나 뭐가 달라.

귀족 기사가 하는 뻔한 소리.

내가 기사들이나 아서 경한테 해를 끼칠 것 같으니까 회유하는 말이잖아.

다 자기들 이득에 따라 이용하려 드는 거지.


“…….”

그 모든 말을 삼키고 마리나가 내뱉었다.


“너랑 상관없잖아.”

“어떻게 상관이 없어! 난……!”

레이나가 짧게 말을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


“난 네가 잘못되지 않았으면 좋겠단 말이야.”

“…….”

“너 같으면 브로디가 의사 불러달라고 하고 몰래 약을 먹고 있었으면 내버려 뒀을 거야?”

“…….”

레이나가 다급하게 마리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단 나와. 늦기 전에 의사 보러 가자. 약을 토해내야 해.”

“…….”

마리나가 움직이지 않았다.

약을 토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레이나가 그냥은 마리나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빠르게 말했다.


“검붉은 물은 시간이 지나면 독성이 강해져. 검붉은 물은 하루 이상 지난 걸 마시면 안 돼. 이거 오래된 거 맞지?”

“…….”

레이나도 테일러에게 들어서 알게 된 것이었다.

마리나의 표정을 보니 확실해졌다.

마리나도 검붉은 물이 오래되면 독성이 강해지는 걸 모르는 거야.

그동안 그걸 아는 사람은 의사밖에 본 적 없었다.


“저거 마시고 죽다 살아난 애들, 전부 오래된 약을 먹어서 그랬던 거야.”

“…….”

“너 그렇게 되고 싶은 거 아니잖아.”

마리나의 눈이 흔들렸다.


 

* * *

의사는 검붉은 물이라는 말에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방 안으로 그들을 데려가 빠르게 대응해 주었다.


“오래된 걸 마셨다고요? 얼마나 오래된 겁니까?”

의사의 목소리가 심각해지자 마리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 사흘 정도요…….”

의사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고, 마리나는 겁을 먹었다.

의사가 눈을 찌푸리고 바로 테이블 위에 약 가방을 내려놓고 뒤적이기 시작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종종 있죠. 차라리 그런 일이 있으면 의사한테 직접 찾아오라고 항상 말을 하고 있는데 자꾸 이런 일이 생기네요. 약만 받아 가서 묵히다가 왜 뒤늦게 독으로 만들어서 먹는 겁니까? 정말이지, 그 뒷수습은 결국 의사 몫인데!”

그리고 마리나에게 약초를 쥐여 준 뒤 욕실로 데려갔다.


“당장 토해야 합니다. 얼마나 삼켰어요?”

의사의 엄포에 겁을 먹은 마리나가 울먹였다.


“저, 저 죽어요? 저 진짜, 거의 입에만 댔는데……. 많이 삼키지 않았는데…….”

의사가 버럭 으름장을 놓았다.


“안 죽게 해 줄 테니 빨리 그거 먹고 게워내요!”

“…….”

약초를 먹으라는 건지 독을 토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마리나는 겁을 먹고 훌쩍였지만, 의사의 말대로 검붉은 물을 토해내려 애쓰기 시작했다.

* * *

얼마 후, 마리나를 안에 남겨두고 나온 의사가 레이나에게 다가왔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런 상태의 환자는 망설이면서 협조가 잘 안 되어 때를 놓치는 경우가 많아서 좀 겁을 줬어요. 상태를 보니 먹은 양이 많지 않아 괜찮을 것 같네요.”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도, 아이 엄마도 괜찮을까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입에만 댔다는 게 사실이라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레이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의사의 표정은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무사한 게 무슨 소용인가 싶네요. 어차피 저 아가씨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상황인 거 같은데…….”

“…….”

의사의 목소리가 조금 체념 조로 이어졌다.


“검붉은 물이 다시 필요해진다면 차라리 저한테 직접 데려오세요. 검붉은 물은 약만 전해주면 안 돼요. 유산도 기본적으로 위험한 일이고 검붉은 물은 약 자체도 위험한 약입니다. 의사가 가까이서 지켜봐야 해요. 별별 일이 다 있거든요.”

의사는 그 부작용에 대해 언급하며 위험한 몇몇 사례를 알려주었다.


“…….”

뒤늦게 옆에 있는 아서가 신경 쓰였다.

그에게 검붉은 물에 대해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저…….”

의사가 레이나와 그 뒤의 아서를 힐긋 바라보았다.

의사도 그들이 아서와 크리스티나라는 것을 알아봤을 것이다.

그들과 검붉은 물을 마신 여자라는 조합이 썩 좋지 않은 추문이 될 거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고.

레이나가 말을 잇기 전에 의사가 먼저 말했다.


“……비밀 지켜달라는 말씀이지요? 입조심은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잠시 망설이듯이 침묵하다가 슬쩍 덧붙였다.


“저…… 이건 그냥 제 입 무거움에 대해서 신경 쓰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제 형제가 아서 경의 군에서 복무하고 있고 저는 기사 집안의 사람입니다. 저희 집안 사람들은 아서 경께 감사하고 있고. ……그러니까 곤란하게 해 드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레이나가 놀랐다.


“……아.”

“늦었지만 인사드리게 돼 영광입니다.”

의사가 웃으며 레이나의 손등에 입 맞추고, 살짝 아서를 향해 경례했다.

소탈하면서도 잘 교육받은 젠트리의 분위기가 풍겼다.

아서가 살짝 웃으며 가볍게 맞경례했다.


“그 기사의 이름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의사가 머쓱해했다.


“……잘 봐달라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아서 말씀드리기 민망하네요.”

그러나 곧 알게 되었다.

의사가 뭔가 발견한 듯 아서와 레이나의 뒤를 보며 조금 놀란 눈을 하고 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 제이미.”

“…….”

레이나와 아서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문이 막 열리며 누가 들어오고 있었다.


“형, 나 할 말이 있…….”

기사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늦게 아서와 레이나를 발견하곤 멈칫했다.


“어……. 각하. ……레이디?”

레이나의 미소 지은 얼굴에 금이 갔다.

아서는 이 사태에서 예상되는 필연적인 결론에 입을 다물었다.


“…….”

의사가 아서와 레이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웃었다.


“아……. 저쪽이 제 동생입니다. 제이미 볼튼…….”

“…….”

그리고 뭘 어떻게 해 볼 새도 없이 안에서 창백해진 마리나가 막 스스로를 추스르고 나오고 있었다.


“……죄송해요, 아가씨, 저 때문에……. 행사장에 돌아가 보셔야…….”

“…….”

그리고 마리나가 입을 벌렸다.

마리나와 볼튼이 서로 눈을 댕그랗게 뜨고 마주 보았다.

볼튼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나 양?”

그리고 의사인 ‘볼튼’ 쪽도 눈을 크게 떴다.


“뭐? 마리나? 너랑 결혼할 사람?”

“…….”

 

 
이미 기사 제이미 볼튼은 결혼할 사람 이름으로 그의 형제에게 마리나의 이름을 알린 후였다.

차였다는 건 아직 말하지 못한 상태였다.

닥터 볼튼이 말문이 막힌 얼굴로 기사 볼튼과 마리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

“…….”

 

* * *



‘……아서 경의 아내? 그 사람이?’

에리카는 멍하니 기둥 뒤에 주저앉아 아서와 레이나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둘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였지만 에리카는 어리둥절해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지?

그 사람이 레이디 크리스티나?

아까 마주쳤던 ‘율리아나’의 모습이 떠오르며 에리카는 혼란에 빠졌다.


“레이디.”

루칸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건넸다.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에리카가 흠칫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네?!”

루칸이 빙긋 미소 지으며 가볍게 경례하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잠깐 이야기 좀 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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