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데뷔탕트 (9)
(204/210)
203. 데뷔탕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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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데뷔탕트 (9)
2023.08.10.
“저희 가문의 자선 행사에 참석해 주신 분이신데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성함을 여쭙고 싶지만, 아내와 함께 인사드려도 되겠습니까?”
“……!”
에리카는 얼굴을 굳혔다.
그가 정중히 선을 그었다는 걸 알아채고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말을 듣고 크리스티나와 관련된 굴욕적인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에리카는 난간을 쥐고 주춤 뒷걸음쳤다.
·
·
·
「줄리어스의 손님?」
얼굴 위에 베일을 드리운 화려한 소녀가 미소 지었다.
「내가 줄리어스인데…….」
상대는 웃으며 베일 너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 손님이라고?」
에리카는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다.
크리스티나가 아닌 그 누구일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이 줄리어스라 말하지 않았어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저렇게 순도 높은 루비가 수백 개씩 박힌 드레스를 입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부채와 모자, 장갑, 구두, 심지어 얼굴에 드리운 베일에까지 똑같은 색깔, 똑같은 종류로 통일된 최고급 루비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과한 느낌이라곤 없었다.
보석으로 빚은 하나의 예술 작품 같을 뿐이었다.
모두 머리 장식의 영롱한 중심 루비를 위해, 그리고 저 화려한 소녀를 위해 디자인된 드레스 같았다.
“…….”
에리카는 부유함과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형상화한 것 같은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모습을 보고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저렇게 입고 있을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저 보석들의 색과 순도가 모두 일치하는 거야?
저 모든 루비가 하나의 원석에서 나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럼 어떤 보석은 필연적으로 더 큰 원석을 희생해야 했을 텐데.
멋진 최상급 보석 하나나 둘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균일하고 크기가 큰 최상급 보석들 수십, 수백 개를 한데 모아 색을 맞추고 하나의 세트처럼 보이도록 세공하고 세팅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자신도 부의 중심지인 줄리어스에 온다고 꽤나 잘 차려입고 온 상황이었지만, 상대의 옷차림은 에리카가 그동안 상상해온 사치의 범위를 초월했다.
그녀의 장갑 한쪽이 에리카의 드레스보다도 비쌀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나름대로 멋지게 꾸몄다고 생각한 스스로가 조금 창피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에리카는 향상심으로 무장했다.
질투가 없지는 않았지만 크리스티나가 신기하고, 크리스티나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호감은 본능이었고, 에리카는 상업으로 성공한 가문의 딸로서, 상업에 관여하면 황제에게 초대받을 수 없게 되는 ‘레이디’로서 그녀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고충도, 기쁨도, 또 데뷔탕트를 앞둔 레이디로서의 고민도…….
「안녕하세요. 레이디 크리스티나시군요. 이렇게 처음 뵙네요. 저는 레이디 에리카입니다.」
「…….」
바라보는 시선에는 조금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채, 베일 아래로 드러난 소녀의 입매가 매끄럽게 휘어졌다.
「가문은?」
에리카는 건넨 인사에 대해 이렇게 짧은 반문이 돌아오는 일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개성 있는 성격이라 생각했고,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까탈스럽고 콧대 높다는 소문은 이런 개성 때문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반감을 갖지 않았다.
「맥네어 남작가입니다.」
「맥네어?」
크리스티나의 입매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얼굴은 웃고 있지 않았고, 눈을 한 번도 깜박이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은 어딘지 서늘했다.
「버나드 맥네어가 작위를 팔았나?」
「…….」
에리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에리카는 버나드 맥네어라는 이름을 몰랐다.
하지만 맥락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그 작위를 샀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네가 몰락 귀족에게 작위를 샀다는 걸 알고 있다는 그런 종류의 비웃음.
넌 내가 모를 줄 알고 그 이름을 댔겠지만, 나는 그 작위의 원래 주인과 그들의 몰락까지도 알고 있다는 비웃음이었다.
“…….”
성공한 자본가가 작위를 사는 것을 뒤에서 조롱하는 귀족들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걸 눈앞에서 대놓고 지적당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에리카는 귀족 사회의 인정을 받는 레이디가 되기 위해 고귀함과 성품, 품위와 지성에 대해 교육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배운 적 없었다.
후작 영애의 미소 띤 눈이 가늘어졌다.
「가까이.」
「…….」
우호적인 느낌이 드는 부름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와 시선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
에리카는 당혹감 속에서 자신이 뭘 잘못 들은 건지, 자신의 행동에 뭔가 오해를 살 소지가 있었는지 생각하며 후작 영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베일 너머로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화려한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그녀가 표정 변화 없는 얼굴 그대로 입을 열었다.
「값비싼 목걸이를 했지만 귀걸이는 세트가 아니고. 구두는 모조품. 심지어 드레스에선 불쾌한 생선 비린내가 나네.」
「…….」
에리카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뭐라고…….」
크리스티나가 웃는 얼굴 그대로 말했다.
「맥네어는 내륙 영지인데. 네 본가는 항구 근처인 모양이지. 바닷일에 직접 종사하는 것도 아닐 텐데 드레스에 생선 냄새라니 심하구나.」
에리카의 입이 벌어졌다.
에리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가 어떤 대처도 하지 못하는 사이, 평온한 얼굴을 한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태연하게 이어졌다.
「혹시 그런 냄새를 좋아하는 취향인가? 얼굴에 바른 펄도 생선 비늘 가루보단 진주 가루가 나을 텐데.」
「진주 대신 생선 비늘로 만든 화장품은 가격이 싸지. 그런 걸 쓰는 사람도 있다는 건 들은 적이 있어.」
「내 하녀들조차도 그런 수준 떨어지는 건 써 본 적 없지만.」
크리스티나의 목소리는 태연하게 이어졌다.
「나름대로 비싸고 귀하다는 물건들을 이것저것 달았구나.」
「하지만 통일성이라곤 없고 역사도 품위도 함축된 의미도 레이디다운 기품도 없어.」
「그래서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며 허영심을 채우나?」
「내가 보기엔 내 하녀들보다 나을 것도 없는데.」
에리카는 이런 모욕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상단의 일꾼들이 하는 욕설이나 싸움은 들어 본 적이 있었지만 그건 자신을 상대로 한 말이 아니었다.
뚫어져라 바라보며 웃으며 이어지는 폭언은 여지없이 에리카를 짓밟았다.
「돈에는 관심이 많아 상단의 후계자가 되는 걸 포기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귀족 사교계에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욕심도 놓지 못하고 있나 보네.」
「어머니처럼 가문에 얽매여 사는 건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도 원하지 않는 재고가 되는 건 싫고, 돈은 좋지만 ‘상인’ 취급받으며 데뷔탕트에 초대받지 못하는 건 싫다고 생각하나?」
그녀는 그저 입만 벌린 채 그 어떤 항의도 하지 못했다.
에리카의 입술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르는군.」
크리스티나의 표정에 딱하다는 듯 동정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조그만 촌구석 상단 안에서야 주인 마님네 아가씨라고 목에 힘깨나 주었겠지만, 예법과 투자된 꼴을 보아하니 제대로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던 모양이고. 돈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도 모르고.」
「지금 네 꼴을 보니 네 부친도 썩 너한테 레이디로서 기대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안목이 없어서 그런 건 모르나?」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턱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매만지며 웃었다.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노선을 확실히 정하는 게 어떨까…….」
「상단의 후계자 경쟁에 뛰어들든, 레이디가 돼서 귀족들의 경쟁에 참가하든.」
크리스티나가 손을 떨어뜨려 무릎 위에 우아하게 교차시키며 웃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자기 객관화는 해 보는 게 좋을 거야.」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당신네 상단 같은 건 이곳에선 졸부 축에도 들지 못하거든.」
「외모로도 센스로도 내 하녀가 될 수 있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법부터 배우는 게 좋을 거야.」
* * *
“…….”
에리카는 앞에 있는 사람의 발치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는지, 제 말이 어떻게 들렸는진 알 수 없지만, 아서가 선을 그은 거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서의 정중한 거절 자체는 조금 부끄럽고 말 정도의 일이었지만, 이대로 크리스티나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에리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뇨, 아닙니다. 죄송해요. 예전에 로아스에서 뵌 적이 있어서……. 저를 아시는 줄 알았어요. 다른 뜻은…….”
“…….”
아서가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기색으로 영혼 없이 침묵하고서야, 에리카는 자신이 저도 모르게 여지를 두는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서가 ‘로아스’에서 언제 어떻게 우리가 만났었냐고 되물어 주길 바란 것이다.
그러나 아서의 잠잠한 듯 냉정한 눈빛은 그녀가 여지처럼 남긴 추파를 수습할 기회를 주고 있었다.
에리카는 최소한 예의를 아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 얼른 덧붙여 말했다.
“레, 레이디 크리스티나께 인사드리진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를 기약할게요. 사람을 만나지 않으신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 뵈려던 건 아니었으니까요. 폐가 될 것 같네요.”
긴말로 변명하며 어렵게 물러서자 아서는 그제야 정중한 어조로 답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이 더 창피해서 에리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닙니다. 그럼, 이만…….”
에리카는 계단 옆의 난간을 짚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간신히 계단을 끝까지 내려온 뒤 코너를 돌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는 혹평했지만 에리카는 그 옛날에도 인기가 있는 편이었고, 이를 악물고 스스로를 갈고 닦은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에리카 자신이 가장 좋은 혼처를 찾기 위해 응하지 않았을 뿐.
사교 금지 기간에도 금혼령이 끝난 이후의 미래를 기약하고 싶어 하는 은근한 구혼들이 많았다.
그런 남자들을 꽤 여럿 만나 보며, 에리카는 칼 같은 남자란 생각보다 드물다는 것을 알았다.
“…….”
하지만 아서 줄리어스는…….
속이 쓰릴 정도로 칼 같은 남자네.
사업상의 관계나 입장 따위는 생각도 안 하나?
하지만 솔직히 결혼한다면 저런 사람과 하고 싶었다.
“…….”
에리카는 진정하기 위해 거듭 숨을 몰아쉬었다.
에리카는 한동안 억울하고 수치스러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부인.”
“아서.”
그러나 위쪽에서 소리가 들려 에리카는 기겁하며 입을 틀어막고 시선을 올렸다.
위에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있는 거야?
진짜 마주칠 뻔했잖아!
에리카는 발견되고 싶지 않아 허겁지겁 벽을 짚고 일어나서 주변을 살피고 건물의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위에서 무어라 목소리를 낮춘 말소리가 들렸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이쪽으로 내려오는 몇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하녀가……. 의사를…….
뭔가 목소리를 낮춘 다급한 이야기가 들렸다.
그리고 서두르는 움직임.
숨어있는 에리카에게도 다급함과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뭐지?
“…….”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뭔가 감추고 있다.
에리카는 자신이 있는 위치를 살폈다.
어두운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에리카는 몸을 기둥 뒤에 감춘 채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