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2. 데뷔탕트 (8) (203/210)


#202. 데뷔탕트 (8)
2023.08.06.


상단 루모스의 후계자는 자신의 여동생, 에리카를 내려다보았다.

에리카는 상대의 신분과 재력이 높을수록 실수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대체로 상단의 사업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나쁜 인상을 남기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에리카는 굳은 표정으로 ‘율리아나’, 즉 크리스티나를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고, 이상하게 불온해진 눈빛을 풀려고 애썼다.

에리카의 태도가 이상하자, 그는 적당한 타이밍에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만남을 끊은 뒤 동생을 데리고 물러났다.


“에리카, 왜 그래?”

“…….”

그가 더욱 목소리를 낮춰 다그쳤다.


“줄리어스야. 중요한 상대라고, 알잖아!”

그는 여동생을 나무랐다.

그리고 힐끔거리며 크리스티나 쪽 분위기를 살폈다.

상단 루모스의 후계자는 ‘레이디 율리아나’ 즉, ‘진짜 크리스티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는 크리스티나가 결코 너그럽지 않고 그녀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학습한 상태였다.

크리스티나는 무엇 하나 쉽게 봐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크리스티나의 앞에서 루모스의 후계자는 이미 몇 번이나 큰 실수를 했다.

처음엔 아서의 정부를 그녀로 착각해 아서와 잘 어울리느니 무척 아름답다느니 입을 잘못 놀렸고, 그다음에는 크리스티나가 입단속 시켰던 내용을 펄 공작 부인의 압박에 슬그머니 털어놓았다가 싸늘해진 크리스티나에게 완전히 버려질 뻔했다.

그녀가 앞으로는 자신이 ‘레이디 율리아나’가 될 거라는 것을 알려주며 ‘아서의 정부’에 대해 암시했을 때는, 너무 경악한 나머지 허둥지둥하다가 주제넘은 질문을 해 또 그녀의 심기를 거스를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그녀의 비위를 맞추는 데 성공해 지금은 상단 루모스가 엄청난 이득을 보고 있었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루모스의 후계자는 꽤나 진땀을 빼며 자신의 실수를 만회해야 했다.

그 과정에는 루모스 상단의 비자금 은닉과 자금 세탁에 대한 비밀, 그리고 도박과 마약, 밀수가 연루된 불편한 진실들을 크리스티나에게 약점 잡히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는 언제든 루모스와의 관계를 끊어 버리거나 그를 심각한 곤경에 빠뜨릴 수 있었다.

가문의 기둥으로 치켜세워지고 있는 그는 여동생은 물론이고 아버지에게도 그 사정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


‘오라버니, 저. 후작 영애한테 인사하고 싶어요.’

동생이 그렇게 청했을 때 후계자는 자신의 첫 번째 실수를 떠올리며 긴장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한테 인사하고 싶다는 거야?

그쪽은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아니라 아서 경의 정부야.

레이디 크리스티나 앞에서 그 정부한테 가서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뵙는다며 인사하는 모습을 보였다가 무슨 꼴을 보려고…….

어차피 실세는 저쪽이란 말이야.


「음…… 에리카. 너도 보고 있다시피, 레이디 크리스티나는 오늘은 개인적인 소개를 거의 안 받고 있어서.」

「알아요. 그쪽 말고 동생 쪽이요.」

「아.」

그건 가능하지.

어차피 앞으로는 ‘율리아나’와 지속적으로 줄리어스의 거래를 이어가기로 되어 있으니 그편이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

그는 동생에게 당부했다.


「……레이디 율리아나 앞에서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너무 칭찬하지 말고. 아니, 아예 그쪽은 말하지 말고. 혹시 말 나오면 보태지 말고 웃기만 해. 언니 소개받고 싶어 하는 티 내지 말고.」

「네.」

「과거에 어쨌든 지금은 그분도 집안에서 레이디 크리스티나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귀한 딸이니까 충분히 존중하고 존경하는 태도로 말해야 해. 하녀 취급은 절대 안 돼. 사연을 궁금해하는 티 내지도 말고. 그냥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 반갑다고만…….」

「오라버니, 난 그 정도로 눈치 없지 않아요.」

동생은 대체로 그 자신보다 잘 처신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걱정을 하지 않았다.


“…….”

그런데 여동생이 썩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을 것 같다.


“기껏 소개해 달라더니 왜 그런 거야? 이상해 보일 뻔했잖아.”

에리카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오빠, 우리 방금 인사한 사람 레이디 율리아나 맞지? 레이디 크리스티나였던 거 아니지?”

“……뭐?”

그가 멈칫하고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

에리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쉬었다 올게.”

 

 

* * *

마리나는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 입고 앉은 채 가방을 열었다.


“…….”

가방 안에는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검붉은 물’이 유리병 안에 담겨 놓여있었다.


「유감이네.」

 
퍽이나 애석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크리스티나가 남긴 말은 딱 두 가지였다.


「내 집안에서는 안 돼. 이유는 알지?」

 


“…….”

아가씨에게 이걸 받았을 땐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이젠 살았다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정작 마리나는 이걸 입 안에 털어 넣기가 힘들어 며칠째 주저하고 있었다.


“…….”

마리나는 유리병을 움켜쥐었다.

……마셔야 돼.

늦으면 안 돼.

낳을 것도 아니잖아.

늦을수록 더 위험하다고.

줄리어스 저택에선 안 된다.

하지만 볼튼이 있는 그 집에서는 더더욱 안 될 것 같았다.

마리나는 결국 짐을 싼 뒤 자선 행사가 열리는 이곳으로 들어와 약병을 열었다.

이곳에는 의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혹시 이걸 마시고 내가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더라도, 죽지는 않을 수 있을 테니까…….


“…….”

하지만 병을 들어 올리는 손은 멈칫하고, 다시 내려놓고, 다시 들어 올리고, 다시 멈칫하길 반복했다.

이걸 마셨던 그녀의 룸메이트는 일 년 동안 머리가 절반 이상 빠졌다.

피를 토한 애도 있었고.

한 달 동안 하혈을 하고 죽다 살아난 하녀도 있었고.

완전히 불임이 된 하녀도 있었다.

그 모든 부작용이 무서워서 멈칫하고 내려갔던 손은,

볼튼의 무표정한 얼굴과, 기사들의 싸늘한 분위기, 그 사이에서 난처해하며 침묵하는 볼튼을 생각하자 다시 입가로 올라갔다.


“…….”

하지만 또 다시 떠오른 볼튼의 얼굴과 목소리가 다시 마리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당신이 날 좋아하게 노력할게요.」

 


“…….”

마리나는 조건이 좋은 남자를 좋아하는 편이었고, 하녀장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런 자신이 출세욕 있고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영악하다 흉보지만, 뭐 어떤가.

딱히 영악하다는 소릴 부정하려는 생각도 안 들었다.

똑똑한 거랑 영악한 게 크게 다르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조건이 좋은 남자랑 결혼해 신분이 바뀔 수만 있다면 나쁜 여자가 되더라도 삶을 걸어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런 기회가 안 와서 그렇지.

하지만 당장 신분 상승을 비롯한 그 모든 일이 실현될 가능성이 눈앞에 닥치자, 마리나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원했던 것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이건 내 인생을 망칠 거야.

난 그냥 좀 더 낫게 살고 싶을 뿐이었어.


“…….”

하녀장 자리를 약속받고 신분 좋은 남자랑 결혼한다고 더 나은 삶이 되는 게 아니었다.

마리나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손 안에 있었다.

병을 다시 입가로 들어 올리자,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을 때 볼튼의 상처받은 얼굴이 떠올랐다.

근래 가장 자주 생각나는 얼굴이었다.


“…….”

헛된 망상이다.

부작용이 무서우니까, 자꾸 말도 안 되는 희망을 잡고 싶어 하는 거야.

아마도 진심은 내 앞에서 했던 말이 아니라 기사들 앞에서 했던 말일 것이다.

마리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에 유리병을 댔다.


“마리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마리나가 흠칫 유리병을 입에서 떼고 치마폭에 숨기며 뒤를 보았다.

레이나가 미소 지은 얼굴로 뒤에 서 있었다.


“레이……”

그녀의 이름을 말하려던 마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여긴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마리나는 조심스럽게 호칭을 고쳤다.


“레이디…… 크리스티나 아가씨.”

레이나가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소리를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만 벙긋거리며 말했다.


‘사람 없어.’

레이나는 비밀 이야기라도 한 듯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로 그녀 옆자리에 앉고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왔는지 몰랐어.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

“몸 좀 괜찮아?”

“…….”

레이나가 갑자기 가깝게 느껴졌다.

마리나는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괜찮아.”

“…….”

그리고 치마폭에 숨겨져 있는 유리병을 내려다보았다.

레이나는 아직 그녀의 치마폭에 감싸인 병을 보지 못한 듯, 그녀의 눈을 보고 물어보았다.


“어떻게 하기로 했어? 케이 경이랑 상의한 거, 너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곤 들었는데…….”

마리나가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

말하면 덜 무서울 것 같아서였을까, 입이 맘대로 움직였다.


“……혹시 내가 쓰러지면 의사 불러 줄래? 많이 위험하면 검붉은 물 마셨다고 의사한테만…….”

자신의 표정이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다.

레이나의 눈이 커졌다.


“뭐?”

“기사들이나 볼튼 경한텐 비밀로 해 주라.”

 

* * *

에리카는 휴게실이 있는 위층으로 걸어가며 입술을 깨물었다.

뭐야. 바보 같아.

뭘 그렇게 움츠러드는 거야?

그냥 자매의 외모가 닮은 것뿐이잖아?

이렇게 얼어 버리거나 당황할 일이 아니었는데.


“…….”

에리카는 심호흡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율리아나 줄리어스’를 만나서 이상해 보였을 자신의 첫인상을 정정할 계획을 세웠다.


‘제가 아까 너무 놀라서 당황하셨죠. 미안해요…….’

‘말로만 들었지, 완전히 똑같이 생긴 쌍둥이는 처음 봐서 놀랐어요.’

그래……. 그렇게 은근히 내가 네 언니를 안다는 얘기를 암시하면서…….


“…….”

율리아나를 티파티에 따로 초대하는 데에 성공하면, 사실 그렇게 놀랐던 이유가 네 언니랑 안 좋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길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에리카는 크리스티나에게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드는 스스로에게도 화가 나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에리카는 휴게실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한 남자를 발견하고 멈칫 멈추었다.

거의 동시에, 그도 저를 발견하고 돌아보았다.


“…….”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시간이 멈추는 미모에 에리카는 멍하니 멈춰 섰다.

그 옛날의 감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단 한 번 마주쳤던 기억으로 그녀를 몇 년을 상사병에 앓게 했던, 그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다.


“……아, 아서 경?”

“…….”

 

 
아서는 무표정하게 그녀 쪽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까닥이며 경례했다.


“네, 레이디.”

아서는 자기를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는 레이디에게 최소한의 예를 표했을 뿐이었지만 오랫동안 상사병을 앓았던 소녀의 마음은 쿵 내려앉았다.

에리카는 완전히 굳어버렸다.


“저, 저를 기억하세요?”

“……?”

아서가 멈추었다.


“…….”

아서에겐 저런 눈빛을 하는 레이디가 처음이 아니었다.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이런 경우 그는 거의 일관된 대응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장소와 상황이 그를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줄리어스’의 이름으로 열린 자선 행사에 참석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참석한 레이디가 자신을 알아보고 기억하냐고 묻는다.


“…….”

평소 같으면 좀 더 여지없이 대답했겠지만, 아서는 최소한 예의가 될 만큼의 침묵을 두고 좀 덜 매몰차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기억해서 인사드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를 아시는 것 같기에.”

“…….”

멍하던 에리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서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희 가문의 자선 행사에 참석해 주신 분이신데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성함을 여쭙고 싶지만, 아내와 함께 인사드려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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