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 데뷔탕트 (7) (202/210)


#201. 데뷔탕트 (7)
2023.08.03.


데뷔탕트 무도회와 전쟁에서 공을 세운 기사들의 작위 수여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아서가 작위를 받을 예정이고, 후작의 선제후 임명식도 함께 거행될 예정이기에 줄리어스의 타운하우스도 분주해졌다.

하녀들 사이에도 은근히 들뜬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적지 않은 수의 하녀들이 기사와 괜찮은 분위기로 만남을 갖고 있었기에 그녀들도 각자 자신의 연인이나 데이트 상대를 위한 축하 선물을 준비했다.

마틸다 줄리어스는 저택으로 상인을 불러주며 하녀들이 따로 선물을 준비할 시간까지 빼 주었다.

오랜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기사와 병사들은 대부분 단란하고 안정된 가정을 꾸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입이 무겁고 일을 쉽게 그만두지 않으며 벌이가 좋은 것으로 정평이 난 줄리어스의 하녀들은 고급스럽고 신뢰할 수 있는 이미지로 평판이 좋았고, 기사들에겐 괜찮은 데이트 상대였다.

대개 귀족 저택에선 하녀들이 연애를 하는 것을 추문으로 여기며 질색했고 마틸다 줄리어스 역시 하녀들에게 매서운 고용주였지만, 웬일인지 그녀는 불쾌해하기는커녕 그런 활동을 하는 하녀를 더 대우해주었다.

특히, 아서의 기사들과 연애하는 하녀들은 크리스티나의 말동무로 삼고 허드렛일에서 해방시키는 것으로 저택 안에서의 신분을 상승시켜 주었다.

너희들도 마리나처럼 기사들을 만나보라는 말에 하녀들이 어색해하며 마님의 눈치를 보던 것은 옛이야기가 되었다.

마리나가 보란 듯이 독실을 배정받으며 크리스티나의 가까운 곳에서 좋은 대우를 받은 것으로 시작해, 몇몇 하녀들이 신분 상승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 하녀들은 어느새 일과 사랑 모두를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를 걱정하는 척하며 줄리어스 저택의 기강에 대한 흠을 잡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줄리어스 후작 부인은 자신의 되찾은 친딸이 하녀로서 일했었다는 것을 내세우며 하녀들에게 너그러운 고용주이자 다정한 안주인으로 어필했다.

연일 후작가의 미담이 신문에 실리며 줄리어스의 이미지가 좋았기에 이런 행동은 파격적인 포용심으로 포장되었다.

하녀들이 얼마나 ‘줄리어스’의 일자리를 선망하는지가 재조명된 것은 물론이었다.

줄리어스에 대한 유려한 극찬으로 점철된 ‘제국 소식지’와 그것을 받아적은 듯한 수많은 비슷한 기사들이 쏟아지는 것을 본 마틸다는 흡족해했다.


‘흥. 하먼 백작의 신문사? 어림없는 소리.’

기득권층 귀족들은 너무 콧대가 높다.

우리를 충분히 존경하지도 않고.

레이나의 말을 듣고 찾아보았지만, 아무래도 그들은 줄리어스를 질시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줄리어스의 위상이 이렇게나 높은데, 하먼 백작의 신문사가 그들에게 할애한 것은 딱 한 지면.

그것도 아서의 귀환 때에만 1면이었고 근래는 1면도 아니었다.

마틸다로서는 황당할 정도로 말을 아끼는 신문사였다.

그것만 봐도 그쪽의 오만한 태도를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신문사’에 대한 흥미가 식었다.

마틸다는 이미 높은 강도의 아첨에 익숙해져 있었다.

수준 높은 귀족의 기사만 품위 있게 다루어 준다는 이유로 이미 한 번 그들을 바람맞힌 하먼 백작에게 먼저 연락을 하고 살랑거리기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줄리어스의 영광을 찬양하고 축하하며 애타게 연락을 기다린다는 기자나 신문사들 가운데서만 골라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딜 내 결정에 입을 대려 들어? 주제에 진짜 줄리어스의 일원이라도 된다고 여기게 됐나.’

레이나, 그 하녀 애는 생각보다 영악하다.

줄리어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신문사를 추천해 주다니.

고위 귀족의 이야기만 다뤄주는 품위 있는 신문사?

그런 말에 내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나?

마틸다는 레이나의 제안을 무시했다.

하녀들이 오가며 소식을 많이 전해 주자 줄리어스에는 아서와 재단의 일정과 계획을 비롯해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었고, 마틸다는 다급하고 초조하던 전보다 마음의 여유를 느꼈다.

마틸다는 내심 역시 내 딸은 능력과 통찰이 대단하다며 만족했다.

하녀들도 이런 데에 쓸모가 있군.


“대저택을 다스리시는 안주인으로서 어려운 점들이 많으실 텐데요.”

제국 소식지의 도노반 기자가 펜을 들고 마틸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일각에선 줄리어스 저택의 그런 너그러움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목소리들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로서는 질시의 목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요. 아, 이 부분은 오프 더 레코드입니다.”

마틸다가 웃었고, 도노반 기자는 더욱 깍듯해진 태도로 능숙하게 펜을 놀렸다.


“규율에 엄격해져야 할 때도 있다며 비판을 하는 분들께 한 말씀 해 주시겠습니까?”

저 정도 열정과 처세술이 있어야 기자를 하지 않겠어?


 

* * *

그리고 마틸다가 외면한 하먼의 신문사 기자는 레이나가 만나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틸다가 이미 마구 인터뷰를 해 신문사들의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마틸다는 히스테릭한 만큼 조심스럽고 신중한 편이었다.

하지만 황후를 만나 충동질 당하고, 아첨에 익숙해진 마틸다가 레이나에게 가진 반감은 레이나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레이나는 줄리어스가 아첨하는 기자들만 만난다는 평판을 얻게 될 것을 무마하기 위해 진땀을 빼며 줄리어스에 대한 언급에 신중하고 비판에도 몸을 사리지 않은 기자들을 불렀다.


“…….”

케이는 태연하게 곁에 서 있었지만 그가 속으로 기나긴 한숨을 내쉬는 것이 레이나에게는 느껴졌다.


‘언론사를 만나시겠다고요?’

‘…….’

‘레이디께서 나서시는 게 좋은 생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제 대답을 예상하실 것 같은데요.’

‘…….’

‘이곳 수도에서 레이디께서 바라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 것 아니었습니까? 최소한의 행사에만 참여하고 사람들과 접점을 많이 만들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요.’

“…….”

케이는 처음엔 반대했지만, 평판이 좋지 않고 노골적으로 아첨의 기사들을 싣던 신문사에서만 기사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아서의 평판이 떨어지는 뻔한 미래가 보이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찬성했다.

레이나가 추린 목록의 신문사들을 만나는 것보다 나은 대처를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보조하겠습니다.’

 

* * *

귀족들이 베푸는 자선행사들이 곳곳에서 시작되었다.

작위 수여식이나 데뷔탕트를 앞둔 귀족들은 가문의 명성을 높이는 좋은 일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순수하게 좋은 뜻에서 기쁨을 나누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어 열리기도 했지만, 실리적으로 자비심과 재력을 드러내며 가문의 평판과 명성을 올리는 데 효과적이어서 열리기도 했다.

좋은 뜻으로 사교의 물꼬를 틀 수도 있어 많은 귀족들이 적당한 행사에 참여해 손을 보태거나 스스로 행사를 열었다.

줄리어스 역시 자신의 이름으로 자선 행사를 열었다.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과 전사자, 상이군인 가정을 지원하고, 사람들에게 따뜻한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제공해주는 행사였다.

취지가 좋았고 참가하는 사람들의 수준이 높을 것으로 기대되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행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에리카 루모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가장 애용하고 있는 상단인 루모스의 일원이었고, 그들 역시 적지 않은 금액을 후원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에리카는 힐긋 주최 측 단상을 곁눈질하며 멀찍이 보이는 두 자매를 바라보았다.


“…….”

에리카 루모스는 얼마 전 보았던 미사에서의 크리스티나 자매의 모습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귀걸이 일……. 아무래도, 크리스티나가 율리아나를 괴롭히는 것 같다는 추측이 들었다.

이젠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따로 사람을 잘 만나주지 않았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달랐다.

이번 사교 시즌, 혼인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줄리어스는 둘째 딸을 내세우는 것이리라.


‘그리고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는 얌전한 척하지 못하는 성미이니 내세우지 않는 거겠지. 난 그 여자 실체를 알아.’

“…….”

에리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감사 인사를 하러 다가온 자선 행사장의 사람들에게 다소곳이 미소를 지었다.

하녀 출신의 레이디, 율리아나는 아직 어울리는 또래 레이디가 없다.

티파티 한 번 못 가 봤겠지.

첫 친구란 각별한 법이다.

크리스티나가 자리를 비웠을 때를 노려야겠어.

에리카는 옆에서 다른 상단 사람들과 인사 중인 오빠를 슬쩍 찔러 속삭였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하녀가 무어라 귓속말을 해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자리를 뜨고, 율리아나 줄리어스는 혼자가 되어 주변 사람들의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일어나. 레이디에게 인사시켜 줄게.”

상단의 후계자인 오빠가 에리카를 에스코트했다.

그리고 그녀, 율리아나의 앞에 도달했을 때.

에리카는 당황스러워 얼어붙었다.

율리아나가 그녀를 보더니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율리아나 줄리어스입니다. 당신이 레이디 에리카? 만나서 반가워요.”

곧은 자세, 살짝 턱을 치켜든 고고한 미소.

초록 눈에 윤기 나는 금발…….

잘 다듬어진 손톱.

살짝 올라간 입매에 일정한 톤의 목소리.


“……!”

무엇보다 그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목소리도, 얼굴도.

기억 속의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와 똑같았다.


 


“……에리카?”

오빠의 부름에 에리카는 흠칫 놀라 자신이 멍하니 인사도 않고 그녀만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다급히 예를 표했다.


“……아, 아. 네. 안녕하세요,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레이디 크리…… 아니, 레이디 율리아나. 루모스 상단의 에리카예요.”

당황한 에리카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 이 사람이 율리아나 줄리어스?

이 정도로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와 닮았다고?

에리카는 혼란에 빠졌다.

내가 예전에 크리스티나를 만난 기억을 강렬하게 느껴서 착각을 하고 있는 건가?

아, 싸, 쌍둥이라고 했나? 그래, 그랬지?

쌍둥이는 아주 닮은 경우가 있으니까…….

……그런데 줄리어스는 이 정도로 자기 딸을 닮았는데, 하녀로 10년 넘게 부리면서 자기들 혈육이라는 걸 몰랐단 말이야?

에리카는 당황해서 준비한 말조차 버벅였다.


“데, 데뷔를 축하드려요. 같은, 같은 해에 데뷔하게 돼서 기뻐요. 이, 이런 뜻깊은 행사에, 힘을 보태게 돼서……. 영광…….”

에리카는 나름대로 가문의 지원을 받아 잘 교육받은 젠트리 레이디였다.

이 정도로 당황하며 말을 더듬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

그녀의 오빠가 여동생이 지나치게 얼어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면서도 도와주었다.


“제 동생이 그간 레이디를 무척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많이 긴장했나 보네요.”

율리아나 줄리어스가 웃었다.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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