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데뷔탕트 (4)
(199/210)
198. 데뷔탕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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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데뷔탕트 (4)
2023.07.23.
후작 부인은 율리아나의 곁에 다정하게 선 채 레이나는 건성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폭탄 같은 기자가 그런 그들 사이에서 웃으며 레이나를 향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
단박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후작 부인은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내세워 조명받게 하고 싶어 하는구나.
‘알현의 날’에 아가씨가 충분히 드러나지 못한 것에 불만을 느낀 거야.
그래서 아가씨의 이야기를 좀 더 다루어 줄 언론에 접촉한 것이다.
지금 줄리어스 후작가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적극적으로 우호적인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제국 소식지’를 고른 거고…….
하지만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제국 소식지’의 도노반 기자는 쉽게 이야기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고 드라마틱한 걸 좋아한다.
사람들을 흥분하게 만들고, 소식지를 팔리게 하기 위해 같은 이야기도 과하게 적는다.
좋은 이야기는 더 과장해서 더 좋게, 나쁜 이야기는 더 과장해서 더 나쁘게.
좋았던 평판이 나빠지는 경우는 충격적인 배신이나 추락인 것처럼 쓰고, 나빴던 평판이 좋아지는 경우는 호들갑을 떨며 헛바람을 가득 넣는다.
비록 도노반과 ‘제국 소식지’만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과한 극찬이 마틸다의 눈에 띄어 인터뷰 상대로 낙점을 받을 정도로 그는 기사를 강렬하게 쓰는 데가 있었다.
작위 수여식을 앞두고 몸을 사려야 하는 아서 경과 찔리는 것이 많은 줄리어스가 선택하기엔 좋지 않았다.
아무리 인기 소식지라도 레이나로서는 피하고 싶었다.
아가씨와 아서 경의 계약으로 우리는 모두 같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그걸 함께 숨겨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하지만 그걸 걱정하고 있는 건 나뿐인 것 같고, 후작 부인에겐 이미 다른 것이 더 중요해진 것 같았다.
초조하여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지만, 눈이 마주치자 세상 모르는 일처럼 태연자약하게 미소를 지을 뿐인 아가씨에게선 아무런 위기감도 느낄 수 없었다.
레이나는 미소 아래서 식은땀을 흘렸다.
후작 부인 마틸다로부터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정식으로 소개받은 기자, 도노반은 기자로서 자신에게 닥친 행운에 기뻐하며 눈을 빛냈다.
제국 모두가 아서와 크리스티나의 이야기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서 보는 이런 상황에, 단독 인터뷰는커녕 베일 벗은 얼굴 한 번 직접 보기도 어렵다는 ‘크리스티나’를 처음으로 영접하다니!
기자 인생에서 잡기 힘든 크나큰 기회임에 틀림없었다.
그간 소식지의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며 지문이 닳도록 찬사를 보낸 보람이 있었다.
도노반이 모자를 가슴에 댄 채 예를 표하며 인사를 건넸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제국 소식지’의 도노반 레드펜입니다.”
그는 호기심 많은 기자의 눈빛은 능숙하게 감춘 채 얼굴 가득 예의 바르고 기쁜 기색을 띄웠다.
“그간 레이디를 존경하고 흠모하는 마음을 지면으로만 드러낼 수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뵙고 인사드리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아마도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
레이나가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제국 소식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줄리어스 가문과, 또 저와 남편에 대해, 과분한 칭찬으로 적어주신 기사 보았습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도노반이 살짝 놀랐다가 뒤이어 감동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의 진심이 줄리어스와 레이디에게 닿았다니 민망하면서도 기쁘네요.”
“…….”
레이나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
자신이 쓴 기사를 보았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도노반의 마음엔 ‘예전에 썼던 기사도 봤을까?’ 하는 걱정이 스쳤다.
하지만 상대를 높여주는 레이디의 화법과 부드러운 미소에선 조금도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노반은 곧 그녀가 자신이 근래 쓴 기사만 봤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줄리어스 후작 부인이 날 부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을 테니까.
뭐, 설령 예전 기사를 몇 개 봤더라도, 기자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진 않을 거다.
보통 기사를 쓴 사람 이름 같은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데다가, 그땐 나만이 아니라 다들 그렇게 썼는걸.
게다가 지금은 나에게 인터뷰하고 내 기사를 받고 싶으니 날 부른 거 아닌가.
“…….”
도노반 레드펜이 크리스티나와의 대화를 더 반기며 다시 대화를 시작할 낌새를 보이자, 후작 부인이 율리아나의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인상적인 기사들이었어요. 몹시 잘 와닿았죠. 그러니 우리 아이의 마음도 움직였을 거고.”
도노반이 고개를 돌리자 후작 부인이 미소 지으며 안쓰러운 듯 딸을 바라보고 말했다.
“사실 우리 아이가 그렇게 주목을 끄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데도, 이분이라면 대화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해 주었답니다. 그래서 제가 도노반 경께 연락을 드리게 된 거예요.”
마틸다의 표정은 우아했지만, 레이나는 후작 부인이 그에게 ‘율리아나’에 대해서 어필하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레이나에게는 ‘빨리 눈치껏 빠지지 못해?’ 하는 마틸다의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도노반은 율리아나 덕에 자신이 후작 부인에게 불려왔다는 말에 얼른 그쪽으로 감사해하는 시선을 돌렸다.
“아, 그러셨군요!”
“…….”
후작 부인의 표정은 더더욱 우아해졌고, 레이나는 마음이 바싹 탔다.
후작 부인의 마음은 이해가 갔지만, 인터뷰를 하실 기자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제가 적합한 상대를 골라드리겠다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자기를 극찬하는 언론사만 따로 연락해서 인터뷰를 한다니.
자신에게 아첨하는 언론을 선별적으로 좋아하는 모습으로 비칠 것이 아닌가.
신문사에 대해 조금만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텐데…….
마틸다는 슬프고도 고마운 표정을 지으며 율리아나의 어깨를 감싸고 말을 이었다.
“다들 우리 집안의 사정을 아셔서, 작은 아이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쏠리지 않도록 배려해 주셨던 점이 무척 고마웠어요. 덕분에 저희가 빨리 가족의 저력을 회복할 수 있었답니다.”
“그것 참 기쁜 일이네요!”
“이제는 기쁜 일이 있는 크리스티나만이 아니라, 우리 율리아나도 어엿한 가족의 일원으로 모두가 여겨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실 겁니다.”
하녀로 살다가 출생의 비밀이 드러났다는 둘째 딸 역시 관심이 가는 화제이기는 했기에, 도노반이 마틸다의 말에 공감의 표정을 지으며 경청하기 시작했다.
“…….”
레이나는 초조하게 손을 만지작거렸다.
레이나는 막고 싶은데, 마틸다는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충격이 컸던 마음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기쁘게 생각한답니다. 딸을 위해 다시 한번 좋은 엄마가 될 기회가 생겨서 고맙고요. 겹경사라고 생각하려고 해요.”
마틸다에게 맞장구를 치는 도노반의 친절한 미소가 율리아나에게로 향했다.
레이나는 초조하게 시선을 돌렸다.
마침 루칸이 보였다.
레이나는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 * *
도노반의 입장에선 한참 이야기가 재미있어지려는 무렵.
붉은 머리의 기사가 다가와 작게 귓속말로 크리스티나에게 무언가 일정을 일러주었다.
기사의 속삭임 속에 얼핏 아서와 황태자라는 단어가 들렸다.
그녀는 짧게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노반 경. 손님께서 인사를 오셨는데 먼저 일어나는 무례를 용서하세요.”
“별말씀을요.”
그리고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저, 어머니도……. 아버지께서 같이 부르시는 것 같아서요.”
“아, 그러니?”
도노반은 흔쾌히 물러났다.
“개의치 마십시오. 오늘은 인사만 드리러 온 것입니다. 저에겐 다음 기회도 있을 테니까요.”
마틸다가 아쉬워하며 율리아나를 안은 손을 떼고 도노반의 손등 키스를 받아 주었다.
“그래요. 반가웠어요. 다음 기회에 더 길게 만나요.”
“…….”
레이나는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어머니의 손님일 뿐이라는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그녀의 미안해하는 듯 아름다운 미소와 부드럽고 깔끔한 예법은 충분히 좋은 교육을 받은 레이디라는 느낌이 들게 해 주었다.
* * *
“……흐음.”
도노반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원에서 마주해도 말 한마디 섞어 주지 않는 도도한 얼음 공주라는 지난 5년 간의 소문과, 유가족의 뒤에서 남몰래 눈물 훔치던 상냥한 레이디였다는 최근의 평판 사이에서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울까 기대했는데.
한눈에 도노반은 그녀가 화끈한 기삿거리로 삼기에는 재미없는 상대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내가 생각한 건 이런 것이 아닌데…….’
약혼자를 오 년 기다린 지고지순한 레이디 이야기가 뭐가 새롭고 재밌겠느냔 말이다.
이미 다들 아는 뻔한 얘긴데.
차라리 동생 쪽 사연이 기삿거리로는 재미있어 보였다.
아니, 딱히 그렇지도 않은가?
“…….”
도노반이 기대한 건 사실 그런 것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일편단심의 절개로 약혼자를 기다린 척하고 있지만 사실 아서 경이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사원’에서 자기를 과시하며 사교계의 높은 평판을 얻은 것이다.
아서 경이 큰 전공을 세우며 태도를 바꾼 것이라 둘 사이는 쇼윈도 부부다.
사실 ‘율리아나’는 뒤늦게 드러난 후작의 사생아인데, 막 선제후 자리에 오른 이런 상황에 후작가가 사생활에서 잡음을 만들 순 없으니, 후작 부인이 잃어버린 딸인 척 입적한 것이다.
덕분에 날마다 후작과 부부 싸움을 하고 있으며, 후작 부인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속을 끓이고 있다.
“…….”
하지만 막상 만나 보니 어느 쪽도 아닌 것 같았다.
크리스티나는 예의 바르고 온화한 레이디로 보였다.
레이디 율리아나는 정말 후작 부인이 애지중지 아끼는 딸 같았고, 남편의 사생아를 친딸로 위장시켜 놓고 예뻐하는 척하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두 자매가 모두 대단한 미인이긴 한데…….’
어째 소문들이랑 매치가 안 되는걸.
레이디 크리스티나는 오해를 많이 받는 타입인가?
뭐, 다소 시시한 결과이긴 해도, ‘줄리어스’의 레이디들에 대한 최초의 공식 보도라는 자체로 가치 있는 기사이긴 하다.
“…….”
비록 자신이 기대한 그림과 조금 달라도 도노반은 수 많은 기자들을 제치고 자신을 선택해 준 줄리어스 후작 부인에게 고마움을 느꼈기에 기꺼이 호의적인 기사를 써줄 마음을 먹었다.
어쨌든 내가 줄리어스의 첫 번째인 거잖아?
“…….”
후작 안토니오가 ‘줄리어스의 첫 번째, 두 번째, 몇 번째’에 무척이나 비싼 가치를 매겨 두어 상단들을 줄 세우고 폭리를 취했는데, 딸인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아버지가 배제했던 ‘루모스’ 상단에 갑자기 접촉해 그 리스트를 단박에 뒤집어엎어서 상단들이 꽤 배신감을 느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도 첫 번째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뒤통수 맞는 건 아니겠지? 나야 뭐 대단한 손해를 감수한 투자를 한 건 아니지만…….’
도노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들을 머릿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분위기상 지금 눈치 없이 나올 때가 아니기에 고이 가지고 있는, 기사에는 한 글자도 적지 않은 정보들이었다.
후작가의 부실 보급 사건, 후작의 기사 폭행 사건.
그리고 후작가가 가끔 하녀를 납치하거나 쓱싹해 버리면서 숨기는 비밀스러운 일들이 있는 것 같다는 제보.
‘줄리어스의 하녀들’이 특별히 입이 무거운 이유에 대한 추측들.
그리고 후작 부인에게 있는 모종의 외도 의혹.
이런저런 정보들이 대체로 ‘후작가 콩가루’설을 지지하게 만들고 있었기에, 도노반에겐 내심 ‘모두가 칭송하는 세기의 신부의 실체는 이러했다’는 식의 발칙한 서사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다.
‘충격 실태! 그 누구도 몰랐던 비밀!’
‘모두 여기를 봐 주세요! 이게 진짜 진실입니다!’
이런 파급력 높고 재미있는 기사 말이다.
그는 언제나 무언가 남들은 모르던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하고, 사람들이 자신이 쓴 글을 흥분해 읽게 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일은 왠지 꼭 그런 일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는데.
어째 영 새로울 것도 없고 시시했다.
하긴…….
내가 비밀을 캐서 알아낸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먼저 인터뷰를 하겠다고 접촉해 온 거니까.
상대의 뜻대로 만났을 땐 그런 식으로 기사를 쓸 거리가 나올 리 없긴 하지.
“…….”
도노반은 헛기침을 하고 슬그머니 그들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뭐, 다른 의도는 없고.
어쩌다 보니 나도 마침 가야 하는 방향이 저쪽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