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 데뷔탕트 (3) (198/210)


#197. 데뷔탕트 (3)
2023.07.20.


사흘에 걸친 데뷔탕트 알현의 날이 끝나자 황실에서는 공식적으로 ‘귀족들이 그간 보여준 참전 용사들에 대한 엄숙한 경의에 감사를 표하며, 이제는 차가운 장갑을 벗고, 모두가 축복 속에 기쁜 만남을 재개하고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 라고 공포했다.

귀족 금혼령과 사교 모임 금지가 공식 해제된 것이었다.

모두가 경사로 여기며 전쟁이 끝난 것을 축하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귀족들은 섣불리 모임을 주선하거나 사교 행사에 나서지는 않았다.

대신 모두가 주말을 기다렸다.

사교적인 모임으로 이어질 수 있으면서도 사심이 있어 보이지 않고, 참석이 권장되며 품위 있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실에서 지정한 공식 추모 미사였다.

* * *

공식적인 추모 미사는 총사령관인 아서도 당연히 참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자리였고, 지난 오 년 내내 참전한 아서를 위한 위문 기도를 한 것으로 유명해진 ‘레이디 크리스티나’ 역시 참석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자리였다.

레이나는 차분한 어두운 톤의 드레스를 차려입고 언제나 사원의 미사에 참석했던 크리스티나처럼 검은 미사포를 쓰는 것으로 준비를 마쳤다.


“후우…….”

이젠 귀족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앞에 크리스티나로서 나가는구나.


“…….”

단 몇 번의 행사에만 나가면 된다고 스스로를 격려했지만, 레이나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을 떼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저 비현실적인 재난으로만 느껴졌던 개선식의 밤에 나가던 마음과는 전혀 달랐다.

그때는 무력하게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고, 이제는 나의 뜻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레이나는 거울 너머로 자신의 단장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장신구를 하지 않은 허전한 귀가 레이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귀걸이를 크리스티나가 가져간 뒤 돌려받지 못한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조용히 찾아와야 하는데.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그걸 버리지는 않았겠지?

그건 한눈에 봐도 귀한 진주로 만들어진 귀걸이고, 요즘 진주는 어디서나 품귀니까…….


“…….”

레이나는 추모 미사를 앞두고 귀걸이에나 마음을 쓰는 스스로를 마음속으로 꾸짖고 일어섰다.

그녀를 몸단장해주던 브로디가 레이나의 보석함을 평소보다 오래 뒤적이다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아가씨, 그런데 그 귀걸이가 없네요? 선물 받으신 진주 귀걸이요.”

“…….”

“다른 데 두셨어요? 그 귀걸이가 과하지 않아서 지금 입으신 드레스에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아서가 근처에 있을 것이다.

그에게 들릴 수도 있다.

괜히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오해를 사서 마음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브로디, 잠깐만.”

레이나는 브로디에게 살짝 귓속말을 해서 사정을 설명했다.


“그게 사실…….”

이야기를 듣고 눈이 커진 브로디가 발을 동동 굴렀다.


“도, 돌려달라고 하시지! 바로 말하시지!”

레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을 할 타이밍이 안 나왔어.”

브로디가 자기가 더 속상해하며 울상을 지었다.

레이나는 대신 위안받는 것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괜찮아.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니고, 그날 나한테 다른 귀걸이를 해 주시다가 그냥 무심결에 보석함에 넣고 덮으신 거라서……. 별거 아닌 것처럼 기회 봐서 살짝 돌려받으면 돼. 그래도 아서 경이 알진 않았으면 해서…….”

“저도 기회가 생기면 돌려받을 수 있게 해 볼게요. 어 이건 우리 아가씨 거네……! 하고. 아, 마리나한테 말해볼까요?”

레이나가 웃었다.

브로디가 대신 흥분해 주고 그렇게 말해 주니 기운이 났다.

사방팔방 위험이 가득하고 중요한 일들이 줄줄이 있는 상황에 장신구 하나에 연연하는 모습을 하고 싶지 않아서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역시 귀걸이는 빨리 찾아오고 싶었다.

크리스티나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아서를 오해하게 하진 않으면서 평화롭게.

똑똑.


“……아가씨. 저예요.”

브로디가 문을 열어 주자, 외출복을 입은 마리나가 와 있었다.


“……저기…….”

마리나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 오늘 미사 참석하고 나서 마님께 돌아갈게요. 오랫동안 안 돌아갔고, 슬슬 찾으실 것 같아서…….”

“…….”

케이 경과 이야기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후작 저택에서는 먼저 그녀를 찾지 않았지만, 돌아갈 때이기는 했다.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 물어 보았다.


“알았어. 혹시, 뭔가 마음의 결정을 했어?”

마리나가 고개를 숙인 채 가로저었다.


“……아직, 좀 더 고민해 보고 싶어요.”

레이나가 끄덕였다.

마리나는 며칠 레이나 곁에 머물며 몸을 회복하고 꽤 마음의 정리를 했는지 차분하게 진정이 된 상태였다.

어쨌든 그녀는 당장 검붉은 물을 마시겠다고 조바심을 내며 날뛰지는 않았다.

볼튼 경과 대화해 보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괜히 심란하게 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대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알았어. 언제든 돌아와도 돼.”

“…….”

마리나가 우물쭈물하다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브로디가 살짝 와서 귀띔했다.


“고맙다는 말이 차마 안 나오나 봐요. 쟤는 저래.”

마리나의 얼굴이 좀 붉어졌다.


“……단장 도와 드릴게요.”

레이나가 웃었다.

마리나 나름의 고마움의 표현인 걸 알았다.


“오늘은 괜찮아. 거의 다 했으니까. 다음에 부탁할게. 뭐 좀 먹었어?”

“……아뇨, 속이 안 좋아서.”

레이나의 눈빛에 걱정이 스쳤다.

레이나는 마리나의 손을 잡더니 티테이블 앞으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마리나를 앉히고 찻잔에 따뜻한 꿀물을 타 건네주었다.


“이거라도 마시면서 쉬고 있어.”

“…….”

마리나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차마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 * *

아서는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정돈된 모습으로 레이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나가 추모 미사를 위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오자 새삼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

아서의 눈에 웃음기가 어렸다.


“오랜만이네.”

“뭐가요?”

“당신이랑 성당가는 거.”

“…….”

성당?

일전에 성당을 간 일이라면…….

결혼했을 때…….


“…….”

레이나가 민망하고도 찔리는 듯이 그를 바라보자 아서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레이나가 붉어진 얼굴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말했다.


“……양심이 엄청 아프네요.”

“양심?”

“전에는 한 사람에게만 한 거짓말이었는데 이제는 수백 명 앞에서 거짓말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당신까지 거짓말하게 만들고.”

아서가 웃었다.


“그래도 이젠 나한테는 거짓말이 아니잖아.”

레이나가 한숨을 쉬고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까지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으니 더 나빠졌잖아요.”

“…….”

아서가 가만히 그녀를 보다가 미소 지었다.


“언제든 거짓말을 그만두고 싶으면 말해.”

“…….”

레이나는 피식 웃었다.


“제가 거짓말을 그만두면 당신은 어떡하구요?”

아서는 뭐 별거냐는 듯이 대답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레이나 아스타린이랑 사는 거지, 뭐.”

아서가 웃고는 에스코트하는 팔을 내밀었다.


“갈까요, 부인.”

레이나도 웃으며 그의 팔짱을 끼고 말했다.


“네, 여보.”

아서가 당황한 얼굴을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아서의 평소와 조금 다른 얼굴은 레이나를 사뭇 즐겁게 해 주었다.


 

* * *

미사는 신분 제한이 없는 큰 행사였기에 사람들이 많았다.

귀족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평민들도 몰려들어 황족들과 귀족들, 특히 아서와 크리스티나를 보고 싶어 했다.

사고를 막기 위해 기사들과 경비들이 배치되었고, 황족과 선제후 일가의 자리는 분리되었다.

브로디와 마리나가 레이나 옆에 앉았고, 크리스티나 쪽에도 여러 명의 하녀가 붙었다.

눈에 익은 ‘줄리어스’의 하녀들이었다.


“…….”

아가씨가 요즘 하녀들에게 잘 대해 주며 꽤 인망이 좋아졌다더니.

하녀들은 크리스티나를 꽤 살뜰히 챙겨주고 있었다.

‘둘째 아가씨 율리아나’가 가문에서 충분히 귀한 아가씨로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일 만큼.

레이나가 후작가에도 마리나가 아팠다는 이야기를 잘 전해 주어, 마리나는 혼이 나지 않고 크리스티나와 후작 부인 쪽으로 돌아갔다.

후작 부인은 몸은 괜찮냐고 웃으며 반겨주었고, 마리나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그 곁으로 돌아갔다.


“…….”

레이나는 잠시 그쪽에 시선을 두었지만, ‘크리스티나’ 행세를 하기 시작한 자신을 하녀들이 알아볼 것을 생각하니 민망하고 난처한 기분이 들어 그들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했다.

크리스티나가 말을 걸었다.


“내가 선물한 드레스 입었네.”

레이나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응.”

눈이 마주치자 크리스티나가 웃었다.


“어울린다. 입어 줘서 고마워.”

“…….”

레이나는 순간 대답할 말을 잊었다.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브로디도 멈칫한 것이 귀걸이를 알아본 것 같았다.


“…….”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누구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걸 볼 수 있어.

레이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내가 고맙지. 드레스 선물해줘서 고마워.”

그러나 미사가 시작되고, 아서가 행사를 위해 단상으로 간 뒤.

묘하게 크리스티나와 후작 부인 마틸다 편의 하녀들 쪽에서 몇 번인가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면, 눈이 마주치기 전에 하녀가 시선을 피했다.


“…….”

자신을 보고 있던 것 같았다.

알던 하녀가 갑자기 아가씨가 되었으니 묘하게 쳐다볼 만한 상황이긴 했다.


“…….”

하지만 이런 자리에 나오는 줄리어스의 하녀들은 사람들 앞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태연하게 행동하라는 단속을 받았을 텐데.

왠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

레이나는 이런 분위기에 익숙했다.

자신이 하녀들과 어울리지 않고 벽을 세우고 있을 때.

때때로 이런 시선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지 않게 생각하고, 백안시하는 시선…….

그러나 곧 미사가 시작하고, 이상한 시선은 사라졌다.

레이나는 곧 시선에 대해선 잊고 미사에 집중했다.

* * *

미사가 끝난 후.

레이나도 후작 부인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후작 부인의 하녀가 무어라 귀엣말을 전해 주었고, 후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와도 된다는 허락의 말을 전한 뒤 자리에 남았다.

레이나는 단상에서 주교와 황태자, 후작과 대화를 하고 있는 아서를 기다리며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인사하겠다는 사람이 있는 건가?’

얼마 후, 한 사내가 미소를 띠고 후작 부인에게 다가가 모자를 벗고 말을 걸었다.


“후작 부인, 인사드릴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연락드린 ‘제국 소식지’의 대표 기자 도노반입니다.”

‘제국 소식지’의 기자?

레이나가 흠칫 놀라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기자 도노반이라고?

근래는 아서와 후작 가문에 대해 화려한 미사여구로 극찬하며 써 내려가고 있지만, 분위기에 따라 쉽게 의견을 바꾸고 자극적으로 기사를 쓰는 사람이었다.

마틸다가 미소 지으며 우아하게 인사를 받아 주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답장을 어제 드렸지만, 이렇게 바로 인사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는데 금방 마주쳤네요.”

도노반이 사교적으로 미소 지었다.


“실례가 안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정식으로 방문 약속을 잡고 뵙고 싶었지만, 이렇게 바로 곁에 계신 걸 알게 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혹시나 하고 말씀드린 것인데, 허락해 주셔서 기쁜 마음으로 인사 올리러 왔습니다.”

“별말씀을요. 아, 이쪽이 제 딸들입니다. 이쪽이 율리아나.”

그리고 옆에 있던 크리스티나의 팔을 다정하게 안았다.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까닥이며 미소 지어 인사했다.

레이나가 뒤에서 조금 당황한 채 일어났다.

후작 부인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저쪽이…… 레이디 크리스티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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