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4. 독초 타민 (195/210)


#194. 독초 타민
2023.07.09.



“이오나는 교황 성하를 뵈어선 안 됩니다.”

조그만 방안에 올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뭐?”

아그네스가 횃불을 든 채 눈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게 무슨…….”

“…….”

올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오나는…….”

올가가 다시 입을 연 순간이었다.

담요에 감싸여 웅크리고 있던 이오나의 손이 침대 밖으로 움직였다.

스르륵 움직인 손이 올가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음.”

모든 사람들이 대화를 멈추며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이오나가 흐린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

입구에서 비추어진 아그네스의 횃불로 인해 이오나의 모습 위엔 여전히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다만 이오나의 멍한 얼굴이 조금 그림자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그녀는 묘하게 빛이 돌아온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오나의 시선이 놀란 눈빛을 한 아그네스에게 한번 스치고, 그 뒤에 있는 패트리시아에게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자신이 붙잡은 옷자락의 주인인 올가를 올려다보았다.


“……올가.”

“…….”

모두가 멈추어 선 채 이오나를 바라보았다.

놀라움이 찾아와 순간적으로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는 찰나의 침묵이 흐르는 사이.

올가의 옷자락을 쥔 이오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오나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타민을…….”

“…….”

지쳐 있었지만, 전과 달리 이지가 남아 있는 목소리였다.


“…….”

온전하지는 않았으나 올가를 바라보는 이오나의 눈에는 일말의 빛이 돌아와 있었다.

그동안에도 종종 상태가 호전되며 대화가 가능했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지금 그녀는 분명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이 웅얼대며 대화하던 때와 달랐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맑은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던 패트리시아가 중얼거리듯 그녀를 불렀다.


“……이오나?”

“이오나!”

아그네스도 빠른 걸음으로 이오나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정신이 든 거예요? 날 알아보겠어요?”

“…….”

그러나 그것이 한계였던 듯.

잠시 아그네스를 바라보던 이오나는 이내 스르륵 눈을 감으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그네스 공주 전하.

미안해요.

레이나.

우리 아가.

잘 부탁…….

바람 소리로만 달싹인 그 말은 너무 작아서, 아그네스에게만 간신히 들렸다.


 

* * *

이오나 할머니.


“…….”

아그네스는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괸 채 눈을 찌푸렸다.

타민을 왜 찾는 거지?

그 순간 이오나는 마치 자신의 의지로 그걸 마셔 왔던 사람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올가 허스트에게 일어났던 분노와 당혹감은 혼란에 뒤덮여 스러졌다.

마치 올가가 이오나를 보호하거나 도와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가.

독초인 타민을 먹이려던 사람인데…….


“…….”

레이나에 대한 아그네스의 호의를 제외하고서도, 이오나는 어딘지 마음 쓰이게 하는 데가 있는 할머니였다.

이오나가 다정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줄곧 했다.

정신이 온전치 않고, 대화는 쳇바퀴여도 이오나가 그녀의 앞에서 드러내는 본심은 언제나 그랬기 때문이었다.

따뜻한 손길과 미소, 자신을 돌봐 준다는 걸 아는 듯, 고마워요, 미안해요.

띄엄띄엄한 말들과 조심스레 겹쳐 오는 떨리는 손과 온기.

왠지 웃고 있어도 울먹이는 듯이 보이는 사람.


“…….”

종종 사원에 찾아오는 나이 든 신도들 가운데 그런 타입이 있었기에 전혀 낯설지는 않았다.

딱히 죄지은 것도 없고 선하게 사는 데도 죄스러워 하는 듯한 웃음을 짓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인생이 죄인 것처럼 사는 사람들…….

그런 할머니들이야 종종 있으니 그리 새롭진 않았는데…….


“…….”

어째서 내가 누군지 알고 무언가가 미안해서 했던 말인 것 같은 기분이 들지…….

교황 성하는 왜 만나면 안 된다는 거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오나에게 단순히 귀족과의 좋지 못한 인연으로 숨어 살았다는 것 외에도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 *

다음날.

아그네스 일행은 소교황청에 도착했다.

교황을 보필하는 사제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반기며 달려 나왔다.

대부분이 그녀와 안면이 있는 고위 사제들이었다.


“아그네스 님!”

“형제님들.”

귀족들을 대할 때보다 편안한 듯 한결 부드러워진 아그네스가 사제들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생하셨습니다. 가뜩이나 험한 길인데 날씨도 안 좋아서 오신 분들이 모두 얼굴이 말이 아니셨습니다. 오시느라 힘드셨지요?”

아그네스가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이 외진 곳에서 형제님들과 교황 성하께서 고생이시죠. 황실을 위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저희의 기쁨입니다! 아, 먼저 온 전령으로부터 귀부인의 마차에 곤란이 생기셨다 들었습니다. 마차는 저희들이 손보아 드리겠습니다.”

뒤쪽에서 나이 든 세 사람의 노부인이 다가왔다.

그들이 아그네스의 뒤에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 사제들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길. 아그네스 님의 일행분들이시지요? 고생하셨습니다. 숙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같은 숙소로 안내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숙소로 안내해 드릴까요?”

패트리시아가 고맙고도 미안한 듯 미소 지었다.


“제 마차가 망가져 지나가시던 아그네스 님께서 저흴 태워주셨습니다. 공주 전하의 호의에 신세졌을 뿐입니다.”

마차를 얻어 탄 것은 감사하지만 감히 전하의 일행으로 대우받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겸손한 태도였다.

아그네스가 미소 지으며 사제들에게 소개했다.


“줄리어스 후작 대부인과 허스트 부인이세요. 두 사람은 따로 숙소를 안내해 주세요. 이오나는 나와 함께 머물 테니 이쪽으로.”

지난밤, 이오나가 잠든 후.

아그네스는 패트리시아를 들여보낸 뒤 올가를 따로 불러내 물었다.


「……성하께 이오나를 데려가지 말라고 한 이유는?」

올가는 대답을 거절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주 전하.」

「……뭐?」

「대답을 원하신다면 이오나에게 직접 들어 주십시오.」

아그네스가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나를 설득하려는 게 아니었나요? 납득하지 못한 내가 교황 성하에게 이오나를 데려가겠다면 어쩔 셈이죠?」

올가 허스트는 짧은 침묵 후에 포기한 듯 말했다.


「이오나가 원하지 않을 테지만, 제 말을 믿지 않으셔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막을 방법은 없겠지요.」

아그네스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일어나도 당신이나 패트리시아 대부인은 곤란하지 않다는 뜻인가요?」

올가가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대부인께서는 조금 곤란해질 것입니다. 뭔가를 알면서 말하지 않은 하인 하나가 곁에 있었다는 정도의 선에서 곤란해지겠지요.」

「…….」

아그네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올가는 침착했다.


「하지만 이오나는 많이 곤란해할 것입니다.」

아그네스가 피식 내쉰 한숨에 옅은 냉소가 묻어 있었다.


「허스트 부인. 그런 말을 듣고 그냥 넘길 순 없군요. 이오나를 위해 참고 싶어지기는커녕 이오나에게 뭔가 위험한 게 있다고 이간질하려는 속셈인가 싶을 뿐입니다. 난 이미 당신들이 그들에게 뭘 했나 알고 있어요. 내가 당신의 입 무거움에 불쾌감을 느낀다면, 당신 혼자 한 일이라고 주장한들 패트리시아 대부인에게 전혀 피해가 안 갈 거라고 생각합니까?」

올가가 끝내 고개를 숙였다.


「……이오나는 위험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저 어떤 일에 연루된 사람입니다.」

「…….」

「이오나에게 직접 들으시는 게 좋겠다 말씀드린 이유는…… 때론 본인이 말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 만한 일도, 제삼자가 말하면 죄가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믿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다 올가는 너무 많은 말을 했다고 여기는 듯, 입을 다물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뿐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주 전하.」

 

* * *

귀빈용 숙소에 들어서 신뢰하는 사제들과 하인들에게 이오나를 부탁한 후.

아그네스는 친분이 있는 연구 사제의 이름을 대었다.

그는 약초학의 대가로, 평생 연구 사제로 사역하며 아그네스와도 교류가 있는 사람이었다.


“모셔 오겠습니다.”

아그네스는 일어섰다.


“아니, 내가 가지요. 그가 바쁘지 않다면.”

 

* * *



“아그네스 님!”

아그네스가 미소 지었다.


“나 때문에 회의를 빨리 끝냈나요? 방해했다면 미안한데.”

“아닙니다. 마침 끝났던 참입니다. 찾아주시니 기쁩니다. 건강하시지요?”

아그네스는 그와 안부를 나눈 뒤, 사원 안의 정원을 걸으며 물어보았다.


“형제님도 약초학을 연구하셨지요? 어떤 약초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어서 왔어요.”

“네, 아그네스 님!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아그네스가 자신의 질문이 다른 데로 새어 나가질 않길 바란다는 뉘앙스로 사제를 바라보았다.

아그네스와 오랫동안 교류해 그녀에 대해 잘 아는 사제는 눈치 빠르게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끄덕인 뒤 경청했다.


“교단에서 타민을 오랫동안 연구했다고 들었거든요.”

“타민이요? 북부에서 자라는 독초 타민요?”

“네. 교황청과 연구 사제들이 북부의 약초들에 대해 전부 연구하긴 했지만, 타민과 타민 중독에 대해서는 다른 풀들보다 유달리 많은 사제들이 오랫동안 연구했던 게 기억나서.”

아그네스가 말을 이었다.


“의사에게 듣기론, 진통제나 해열제로 쓸 수 있지만, 중독성이 있고 기억에 문제를 일으키는 부작용이 커서 사용의 이득이 없는 풀이라더군요. 그런 것에 비해 관리는 까다로워 잘 안 쓰인다고요.”

사제가 긍정했다.


“아, 그렇지요. 맞습니다. 진통제나 해열제라면 부작용이 적고 관리도 쉬운 다른 약초들이 많으니까요.”

“그렇군요. 한데 왜 그런 가치 없는 독초를 오래 연구했지요? 약초도 아니고.”

“아아…….”

사제가 답했다.


“교단이 한 연구는 해열제로서가 아니라 다른 효능 때문에 타민을 연구한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다른 부작용 때문이라 해야 하나…….”

“다른 부작용?”

“네. 타민은 오래전, 그러니까, 신성 사제들이 있던 시절에 신성력과 관련된 부작용이 있는 독초로 알려져 있었거든요.”

“…….”

아그네스가 멈칫했다.


“뭐 이제는 의미가 없게 된 연구인데……. 타민에는 섭취자의 신성력을 억제하는 작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진통 효과보다 훨씬 크게요. 사실상 그것이 부작용이 아닌 주작용이라 볼 수 있을 정도로…….”

“……신성력을 억제한다고요?”

“예. 독초를 좀 먹었다고 신성력이 억제된다는 게 영 옛 사제들로선 체면이 안 섰던 모양이라 공공연하게 알려지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험한 독초 취급을 하며 못 먹게 했지요. 중독성이 있는 풀인 것도 사실이니까요.”

사제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답했다.


“신성력을 다룰 수 있었던 사제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이 실존하던 시절을 재현하기 위해 저희가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알고 계시지요?”

“…….”

“과거의 영광에 매이는 느낌이 없진 않습니다만…….그 기전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사라져버린 신성력을 돌이키는 방법과도 연관되지 않겠느냐…… 그런 이유로 타민을 꽤 오랫동안 연구했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젠 신성 사제가 없고…….”

“…….”

“연구도 불가능해져서 이래저래 더 이상 다루지 않게 되었지요. 그게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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