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숨겨져 있던 것들
(194/210)
193. 숨겨져 있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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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숨겨져 있던 것들
2023.07.06.
아그네스가 말이 없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그네스가 17세의 황녀였던 시절, 마흔을 목전에 둔 패트리시아 줄리어스는 사교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부인이었다.
로널드 줄리어스를 망나니에서 인간으로 재탄생시켰고,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난 후에도 후계자인 아들과 함께 가문과 영지를 훌륭하게 경영해 하녀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귀족들로부터도 모두의 귀감이라 찬사를 받았던 최고의 귀부인.
그때로부터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 아그네스는 50대의 귀부인이, 패트리시아는 70대의 노부인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사교계와 거리를 두고 조용히 살아가는 이들이 되어 있었지만, 그 사이에 두 사람의 인생에도 굴곡이 있었다.
북부 공국의 지배자였던 펄 공작과 혼인한 아그네스는 후계자 없이 남편을 잃었고, 거친 북부에서 펄 공작 부인이라는 이름을 지키며 30여 년을 살아왔다.
북부를 탐내며 그녀의 옆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녀가 북부를 다스리며 조용히 살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강인하게 견뎌냈음을 의미했다.
패트리시아는 20여 년 전, 아들인 지금의 후작을 혼인시킨 후, 요양을 핑계로 조용히 사교계에서 은퇴하고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시간이 지난 후, 사람들은 패트리시아가 아들과의 갈등으로 조용히 줄리어스를 떠났던 것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가문과 영지를 위해 대외적으로 갈등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을 지킨 것이었다.
패트리시아가 집을 떠나고 후작이 멋대로 굴기 시작하고서도 후작 가문의 평판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후작 부인이 남겨 둔 세 사람, 하녀장 올가 허스트, 집사장 짐, 주치의 앨빈 로렌슨이 사명감을 가지고 줄리어스 가문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오와 마틸다는 가끔 사고를 치긴 했지만, 존경받는 대부인의 후광을 등지고 있는 세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패트리시아가 만들어둔 ‘입 무거운 하녀들의 문화’는 줄리어스 후작 가문의 나쁘지 않은 이미지를 유지시켜 주었다.
결과적으로 가문의 품위는 과하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뿐인 딸을 걸고 벌인 황실과의 결혼 계약과 일련의 사건들 이후, ‘줄리어스’는 선제후가 되었다.
아그네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뚝뚝한 그녀에겐 드문 일이었다.
“옆에 계신 분이 누구냐 물을 법한데……. 두 사람 다 묻지 않네요?”
패트리시아와 올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그네스가 이오나를 소개하는 말을 이었다.
“나의 시녀입니다. 내가 돌보는 이의 가족이고.”
“…….”
시녀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한눈에 봐도 일흔 노파인 이오나는 한창때의 아그네스를 시중들 상태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아그네스가 그녀를 보살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의도적으로 이오나를 곁에 앉힌 채 두 사람을 태우고 그들에게 그녀를 보여 주었다.
자신이 그녀를 보호하고 있고, 레이나와 이오나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줄리어스 일가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이오나나 레이나에게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내가 침묵하지 않겠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었다.
패트리시아는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그저 담담하게 아그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그네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패트리시아 대부인.”
“네, 공주 전하.”
아그네스가 미소 지었다.
“그리 불러 주시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대부인은 내가 데뷔탕트를 준비하는 레이디였던 시절, 샤프롱에게 가장 본받을 만한 귀부인이라고 소개받은 사람이었는데.”
“…….”
패트리시아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은 아닐 겁니다.”
아그네스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당신이 존경받아 마땅한 부인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나는 젊은 레이디들에게 여전히 그리 이야기합니다.”
“…….”
패트리시아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이제 귀부인의 모범이라는 영예는 공주 전하께로 돌아가는 것이 이치에 맞는 듯합니다. 저는 자식을 가르치길 포기한 어미입니다. 제가 아들과의 반목으로 집을 떠났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거고요. 제가 모르긴 해도 아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는 것이 귀부인의 귀감이 될 만한 덕목은 아닌 줄로 압니다.”
아그네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하지만 부인은 아들을 혼인시킬 때까지 그 갈등을 드러내지 않고 자리를 지켰죠. 가족 간의 불화를 드러내 가문의 명성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견뎠고, 마침내 도리를 다하고서야 조용히 물러나셨고요.”
“…….”
가족 간의 불화는, 아들인 안토니오와의 갈등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남편 로널드의 외도를 알고 하는 말일까.
시선은 아그네스에게 향해 있었지만, 패트리시아의 시야 한구석에는 이오나의 모습이 못 박힌 듯 걸리고 있었다.
패트리시아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70대의 노파가 되고서도 자신의 마음에 여전히 일어나는 파문에 서글픔을 느꼈다.
뼛속에 박힌 그 무언가가 죽고 나서도 그녀를 떠나지 못하고 그녀의 유골 안에 남아 있을 것만 같아서.
아그네스가 말을 이었다.
“혼인한 다음에는 귀족 사내는 아들이라기보단 가주이지요. 집안의 가주와 반목하게 되었을 때, 어느 누가 그 이상으로 최선을 다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당신을 여전히 존중한다는 것을 전하고 싶어 긴말했습니다.”
아그네스가 패트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이오나를 소개한 것은 다른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싶어서.”
그리고 아그네스는 옅게 웃었다.
“후작이나 후작 부인을 보고 감히 내가 대부인을 평가하진 않을 겁니다. 부모와 자식을 비슷하게 평가하는 사람은 아니라서요. 황실을 보면 알겠지만.”
“…….”
그만 패트리시아도 힘 빠진 웃음을 지으며 웃고 말았다.
대화를 주도하는 두 부인의 웃음으로 마차 안의 공기가 부드러워졌다.
“……부끄럽네요. 공주 전하께서 이렇게 다정하게 말씀해 주시며 노파를 달래어 주시니.”
아그네스는 살짝 찌푸리듯 웃었다.
“근래 다정해졌다는 말을 종종 듣네요. 대부인 앞에서 입에 올리기는 민망하지만, 저도 나이 들었나 봅니다.”
마차가 오랫동안 고르지 않은 길을 달려갔다.
멀리 교황의 거처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사만 올린 후 내내 침묵하고 있던 올가 허스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어인 일로 소교황청에 가십니까.”
“…….”
패트리시아는 내심 흠칫했다.
올가가 수년 동안 독초를 먹여 해치려 했던 이오나를 앞에 두고 저리 당당하게 말을 건다는 것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아그네스가 별다른 표정 없이 답했다.
“교황 성하께서 신년 행사와 작위 수여식에 황궁으로 행차하실 예정이라 제가 성하를 모시려 합니다.”
“그런 자리라면 저 노부인이 시녀로서 전하를 모실 이유는 없지 않은가요? 전하께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
패트리시아의 표정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올가가 왜 이러지?
아그네스는 살짝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이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대답해 주었다.
“노부인의 건강에 대해 알아볼 것도 있어서요. 사실 그동안 대부인 병이라고 생각했는데, 독초 ‘타민’에 중독된 걸로 추정되어 그것에 대해서도 알아보러 갑니다. 교황 성하와 교황청의 연구 사제들이 증세에 대해 가장 잘 알 것 같더군요.”
그리고 아그네스는 고요한 눈으로 올가 허스트를 응시했다.
패트리시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그네스는 올가가 이오나에게 타민을 먹였다는 걸 아는 것 아닐까?
아그네스는 그걸 알면서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부인이 험한 꼴을 당하기를 바라지 않아 굳이 죄를 캐내지 않고 덮어 주려 했는데, 지금 올가의 뻔뻔함에 화가 나서 그녀를 벌하려 한다면?
패트리시아의 안에 순간적으로 올가에게 화가 난 마음보다는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이 솟아올랐다.
왜 이오나에게 그런 짓을 했냐며 조금 전까지 자신도 화를 내고 있었지만, 올가는 그녀의 평생을 함께한 아끼는 시녀이자 친구였다.
패트리시아가 짐짓 그녀를 꾸짖으며 목소릴 높였다.
“올가. 지금 당신 전하께 너무 무례하군.”
“…….”
올가가 두 사람의 눈빛을 모두 마주한 채 침묵하고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노파가 실수를 했습니다. 공주 전하의 격에 어울리는 시녀가 아니라 여기는 마음에. 과했습니다.”
아그네스는 눈짓으로 사과를 받아주고 더 문제 삼지 않았지만, 패트리시아는 당혹감에 올가에게 더 화가 났다.
올가가 왜 이러지?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이 아닌데.
진심으로 이오나를 미워하는 건가?
나를 무너지게 할 뻔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마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이오나가 몸을 뒤척이며, 붉어진 얼굴로 앓기 시작했다.
종종 염증이 도지며 열이 난다는 그 증세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그네스는 그녀가 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 생각했기에 타민을 먹이는 대신 다른 해열차를 주고 따뜻하게 옷을 입혀 주었다.
그동안 올가와 패트리시아는 침묵을 지켰다.
* * *
밤이 왔다.
악천후로 마차의 속도는 더욱 더뎌져, 그들은 소교황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주로 중간 기착지로 머무는 여관을 찾았다.
패트리시아와 아그네스는 마중 나온 전령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동안 하인들이 이오나를 돌보기 위한 약차를 내렸다.
“타민 중독이라면, 이걸 조금 더 먹이며 천천히 끊는 것이 증세에 낫지 않습니까?”
“많이 심하지 않으면 주지 말라고 하셨어. 우리는 전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해야지.”
약초를 만지는 하인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
그들에게 최근 동행이 된 노부인이 접근했다.
“제게 주십시오.”
* * *
주변엔 사람들이 없었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이오나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갔다.
문을 지키는 하인들이 있었지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아그네스의 하인들은 패트리시아 줄리어스의 시녀가 이오나에게 다가가는 것을 경계하지 않았다.
“제가 하겠다 말씀드렸습니다. 공주 전하께서도 허락하셨어요.”
하인들은 그녀가 간병에 뛰어나기 때문이라 생각했고 의심하지 않았다.
“…….”
그녀의 손에 타민을 내린 찻잔이 들려 있었다.
올가 허스트는 이오나에게 다가갔다.
올가는 이오나를 반쯤 일으켜 가까이 품 안으로 당긴 채, 조용히 그녀의 입가에 찻잔을 가져다 대었다.
금단 증상에 앓고 있던 이오나는 졸던 와중에도 자연스럽게 익숙한 약초 특유의 향기를 느끼고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받아 마시려 했다.
화악.
그리고 갑자기 뒤에서 횃불이 밝혀졌다.
“…….”
“…….”
올가의 앞으로 스스로의 그림자가 크게 드리워진 채 일렁였다.
올가는 놀라지 않았다.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허스트 부인. 이오나를 놓고 물러서요.”
아그네스가 그녀의 뒤에서 말했다.
“…….”
아그네스의 곁에는 창백해진 패트리시아가 서 있었다.
자신이 본 광경이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
아그네스가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믿을 수가 없군요. 내가 돌보고 있는 사람이라 했을 텐데.”
“…….”
올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그림자 안에 이오나의 모습이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아그네스의 목소리가 한층 낮고 엄해졌다.
“놓고 물러나라고 했어요.”
“…….”
올가는 천천히 찻잔을 협탁에 내려놓고, 이오나를 침대에 편히 눕힌 후 물러섰다.
아그네스의 목소리에 노기가 실렸다.
“나는 그대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생각하는데. 이렇게 빠른 배신을 당할 줄은 몰랐군요.”
“…….”
“지나치게 무모하게 여겨지니 오히려 해명의 기회를 드려야 할 것 같네요.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꽉 틀어쥔 패트리시아의 손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
짧은 침묵 후, 올가의 입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대부인.”
아그네스가 쓰게 웃었다.
“그것이 할 말인가요? 대부인의 뜻이 아닌 것 같은데, 왜 지금 대부인을 부르지? 당신의 주인을 곤란하게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전하.”
올가 허스트가 어두운 눈빛으로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대부인께 사과드린 것은, 이 모든 일에 대해 대부인께서도 모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게 배신감을 느끼실 것 같아서. 대부인께서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
올가 허스트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어찌 벌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올가가 고개를 숙였다.
“이오나를 교황 성하의 앞에 데리고 가지 말아 주십시오. 이오나는 교황 성하를 뵈어선 안 됩니다.”
“…….”
침묵이 흘렀다.
아그네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