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황제
(190/210)
190.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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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황제
2023.06.25.
레이나는 케이 경과 변호사와 셋이서 두 개의 혼인 계약서를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황제가 아서에게 ‘세르네이드 공작 작위’를 주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잠시 믿을 수 없어 하는 확인의 시간이 지나간 후, 케이와 변호사는 레이나가 ‘세르네이드’라는 작위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잘못 들었을 리 없다는 것도.
케이가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문질렀다.
“좋은데…….”
그리고 레이나가 생각한 것과 똑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너무 좋아서 위험하네요.”
“…….”
레이나는 묵묵히 내린 눈빛으로 긍정했다.
황제의 말대로 작위 수여식이 거행된다면 이제 아서는 황실이 보증한 계약서에 의해 ‘줄리어스 후작 작위의 후계자 권리’를 가지는 동시에 ‘세르네이드 공작 작위’의 주인이 되게 된다.
물론 공작 작위 여섯 개에 백작 작위 십여 개를 포함해 수십 개의 작위를 가진 황제와, 공작 작위 둘을 비롯해 여덟 개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황태자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세르네이드’가 ‘루사익’ 직전의 선대 황실이었다는 것과 ‘줄리어스’가 대륙 최대 부호라는 것, 아서가 선황제를 연상시키는 전쟁 영웅이라는 것과 줄리어스 후작의 뒤를 이어 ‘선제후’의 자격을 갖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의 의미는 만만하지 않았다.
황후가 과연 가만히 있어 줄까?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황제 폐하의 연설문에서 아서 경과 카일 황태자 전하를 ‘아들들’이라 언급한 건 황후 폐하 자신의 제안이라 하셨어요.”
“그때 세르네이드 공작 작위를 주겠다는 이야길 하진 않으셨죠.”
“네.”
“황제 폐하가 그 말을 하신 후에 거들지도 않으셨고요.”
“……네.”
케이가 이마를 눌렀다.
“그럼 그건 황후 폐하와 상의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
레이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가 입 밖에 내었고, 그걸 들은 사람들이 있는 이상 그대로 실현될 것이다.
황제로서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보인 것이고, 아비로서 챙겨주지 못했던 서자에게 선심을 쓴 것이리라.
언론도 제국민들도 열광하겠지.
아서의 기세가 물살을 탄 상황이니, 주변의 견제를 잘 이겨내고 자리를 잡게 되면 큰 영토의 주인이 될 것이고 따를 자가 없는 높은 명예를 갖게 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혹은 그 후에도 아서는 계속해서 황후와 주변 제후들의 견제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서로를 견제하는 권력자 제후들이 서로 함정을 파다가 자멸하고 가장 힘없는 이가 끌려 나와 허수아비처럼 왕이 되는 일은 흔하다.
그것은 그들이 5년 간 전쟁을 벌였던 상대인 살리아에서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아서도, 황태자도, 통찰력이 있는 기사들도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서가 원하는 것은 큰 권력이 아니었다.
그저 그 자신이 목숨의 위협을 당하지 않고, 자신의 사람들을 충분히 지킬 수 있을 만큼만 힘을 가지는 것.
멸시당하지 않을 정도로 명예를 되찾는 것.
그리고 평화.
그러나 황제는 자식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황제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것이었고, 모든 것이 황제인 자신의 뜻대로 휘둘러진다는 믿음을 끝없이 확인하는 것이었으며, 자신이 아직 황위를 내려놓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후계자인 ‘황태자’를 엄격한 잣대로 평가하고 못마땅해하는 것도, 황태자에게 제왕의 자질이 부족해 제국이 염려된다는 식의 태도를 고수하는 것도 그러한 확인 과정의 일환이었다.
그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시험하고 괴롭히는 군주였다.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영웅이라 평가받는 선황제 알렉산더 루사익이 30대의 젊은 나이로 서거했을 당시.
그레이엄은 그 영웅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황제가 되기엔 지나치게 어린 나이였지만, 전 제국적 존경이 높은 선황제의 아들을 제치고 차기 황제가 되겠다고 입후보하겠다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명예와 명분을 중시하는 선제후들은 그런 리스크를 지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인품도 훌륭하지 않고 능력도 없는 아들이 차기 황제가 되어 제국민들의 실망을 사고 ‘루사익’의 평판이 떨어졌을 때, 그다음의 자리에 도전하는 것이 훨씬 안정적이고 명예로우며 견고한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황제는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황제 그레이엄의 드러내지 않은 열등감이 되었다.
황제는 황태자 카일이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끝없이 드러내 ‘선황만 못한 황제’ 소리를 평생 들은 열등감을 아들에게 해소하려 들었고, 세기의 영웅 소리를 듣는 자식들을 싸움 붙여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려 들었다.
황제의 부족함을 메워내는 좋은 황후라 평가받는 아내 마리아를 ‘클라인’ 가문의 경쟁자로 여겼으며, 그런 황후를 곤란하게 만들며 그녀가 자신을 달래는지, 제 뜻에 맞게 움직이는지, 자신을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지켜 보고 계속해서 시험했다.
황실의 일에 대해 입을 조심하는 언론들과 황태자를 위해 황실의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황후의 절제된 처신으로 일반적인 제국민들 대다수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레이나의 눈에도 그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제 그레이엄은 부황이 이룩해 놓은 평화를 자신의 세대가 누리는 혜택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황제가 되었으면서, 황제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 여긴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이 목숨을 걸고 이룩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자신이 ‘오러’를 물려주었으니까.
황후를 두고 바람을 피운 것에 대해 자책감도 없다.
자신은 ‘오러’를 물려받을 아이를 많이 남겨야 하니까.
황제는 가장 자신의 마음에 드는 아이를 선택해 혜택을 내려주는 것에 만족감을 느낀다.
그것이 평화로운 시대에 저물어가는 황제의 권력을 드러내는 가장 짜릿한 방법이니까.
갈등이 심할수록 그것을 짓밟고 밀어붙이는 황제의 위엄을 과시할 수 있으니 딱히 반발을 피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아서가 빨리 이 모든 일을 마치고 황실에서 최대한 멀리 떠나고 싶어 하는 이유.
“…….”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즉위한 황제를 가르쳐야 했던 사람들은 모두 ‘선황후 독살 사건’ 이후 은밀하고도 매섭게 불었던 피바람에 휘말려 일찍 죽었다.
주변에는 숙청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만 남아 황제에게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황제의 누이 아그네스는 황궁에 환멸을 느끼고 먼 북부로 떠났고, 황후는.
……황후는 그것의 피해자일까, 혹은 그 상황을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
“……폐하의 사랑이 넘치네요.”
변호사가 작게 덧붙였다.
목소리가 기쁘지는 않았다.
“참 좋은 아버지시죠.”
케이가 어조 없이 말을 받았다.
“…….”
레이나는 침묵했다.
아서가 알면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와의 계약을 엎을 것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겁게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나를 선택한 것이 얼마나 위험한 선택이었는지.
실제로 황제와 황후를 만나고, 몇 번이나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피부로 느끼게 되니 더 실감 되었다.
케이가 짧은 한숨 이후 레이나에게 두 혼인 계약의 주요 내용을 짚어주며 관련된 가문과 작위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 주의해야 할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레이나는 집중해서 주의 깊게 들었다.
높은 집중력과 아서에 관련된 탄탄한 배경지식으로 레이나는 거의 한 번 듣고 모든 것을 외울 정도로 암기력이 올라가 있었다.
변호사가 레이나의 암기력에 무척이나 놀라워하며 극찬하다가 머쓱해할 정도로, 케이는 무미건조하게만 칭찬해 주었다.
케이 경은…….
“…….”
아서가 레이나를 선택한 것을 반대했다.
레이나가 크리스티나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도와달라고 했을 때도, 역시 흔쾌히 찬성해주진 못했다.
아서 경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레이나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레이나는 그것을 이해했다.
「좋은 생각이라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네요. ……많이 위험할 겁니다.」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고 후회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명령이 주어지면 최선을 다하는 게 제 일이니까.」
「최선을 다하긴 할 겁니다.」
「언제든 상황이 바뀌면 최선을 다해 반대할 테지만…….」
케이가 푹푹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말했다.
「일단……. 도와 드리겠습니다.」
「저한테 아무것도 숨기지 마세요.」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까.」
레이나는 케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자신에게 다가오기 전에 차가운 손이나 피가 묻은 손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아서의 다정함을 생각하면서.
이것이 쉽지 않은 일인 걸 알지만, 레이나는 그에게 부족하지 않은 아내가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해낼 거라고 생각했다.
* * *
데뷔탕트의 마지막 드레스 가봉을 위해 숍의 드레스 디자이너들이 찾아와 레이나를 둘러쌌다.
레이나는 드레스를 입어보고 긴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궁정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져도, 데뷔탕트는 온다.
아무것도 모르는 드레스 디자이너들은 우아한 손짓과 표정으로 그녀의 옷을 마지막으로 손보아 주며 멋진 드레스와 위상이 높은 줄리어스, 오 년 만에 열리는 데뷔탕트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아마도 그것이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가장 만족스럽게 하는 사교술이리라 판단한 것일 것이다.
레이나는 심란한 마음을 감추고 ‘데뷔탕트를 앞둔 레이디’로서 대응했다.
똑똑.
“아가씨…….”
문을 연 브로디가 주저하며 말을 걸었다.
“크리스티나 아가씨……. 율리아나 아가씨와 큰마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마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오셨다는 말을 하려던 것이리라.
방 안에 다른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을 보고 브로디가 자연스럽게 말을 덧붙여 호칭을 정리했다.
레이나는 긴장을 감추고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 와 있던 디자이너가 줄자를 챙기고 몸을 일으키며 웃었다.
“동생분과 어머니께서 찾아오셨군요. 저희는 이만 물러가야겠네요.”
디자이너들은 그들의 복잡한 가족사에 대해 너무 길게 말을 늘이지 않은 채 말을 아끼고 옷을 정리했다.
레이나가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데뷔탕트 드레스를 준비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옷은 이렇게 마무리해 보내드리겠습니다. 데뷔탕트에서 행운을 빕니다. 제가 걱정할 일은 조금도 없겠지만요.”
디자이너가 꽃 선물을 놓아 주고 공손히 나갔다.
브로디가 긴장한 눈빛을 보냈다.
예고 없는 방문이었다.
마리나의 일로 온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레이나는 안심하라는 듯이 눈짓을 보냈다.
레이나는 두 개의 혼인 계약서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검붉은 물에 대해 생각하고.
마리나의 일로 할 말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뒤 크리스티나와 후작 부인을 만나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