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새벽 온기
(189/210)
189. 새벽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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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새벽 온기
2023.06.22.
케이 포드는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해독 차를 구해다 주었다.
“드세요.”
레이나는 케이가 차 심부름 같은 일을 직접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당황했다.
“아, 아니 어떻게 이 밤에…….”
“이사벨에게 부탁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레이나는 더 놀랐다.
“네?! 이 새벽에 고작 차 때문에 이사벨 님을 깨우신 거예요?”
이사벨은 레이나에게 데뷔탕트의 춤과 사교 에티켓을 가르쳐 주고 있는 케이의 친누나였다.
레이나는 상냥하면서도 꼼꼼한 선생님인 그녀에게 항상 고마워하고 있었다.
케이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미안하면 드세요. 독소를 제거하고 몸을 정양하는 해독 차입니다. 테일러 씨가 돌아오면 제대로 된 약을 조제하게 하겠습니다.”
레이나는 민망해서 식은땀이 다 나는 기분이었다.
레이나는 케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해독 차를 마셨다.
그 후에야 해명을 할 수 있었다.
“저…… 그걸 마셨던 건 예전 잠깐인걸요. 테일러가 온 후론 마시지도 않았으니까 지금은 괜찮고요…….”
케이의 눈이 찌푸려졌다.
“테일러 씨가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었는데도 나에게 아무런 말을 안 했다는 거군요.”
“…….”
레이나가 입을 다물었다.
“돌아오면 이야기 좀 해 봐야겠네요.”
레이나는 난처하고 민망해서 어쩔 줄 몰랐다.
“……죄송합니다, 케이 경.”
그때 뒤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훅 끼어들었다.
“레이디는 아서 경의 아내입니다. 케이 경은 아서 경의 보좌관이고요.”
뜻밖에 엄숙하고도 당연하게 선언한 사람은 트리스탄이었다.
레이나는 순간 그것이 똑바로 행동하고 있지 못한 자신을 향한 비난이라 생각하고 흠칫했다.
하지만 트리스탄은 레이나의 뒤에 그녀의 기사처럼 서 있었고 시선은 케이에게 향해 있었다.
“레이디가 누구신지 잊으신 것 같은데요. 케이 경, 지금 아멜리아 양에게 하듯이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
아멜리아는 케이의 여동생이었다.
“…….”
케이가 잠깐 생각에 빠진 것 같더니 손을 들어 스스로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레이나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인정해야겠군요. 죄송합니다, 레이디. 주의하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염려해서 해 주신 말씀인걸요.”
레이나는 트리스탄을 보고 살짝 굳어 있었다.
레이나는 트리스탄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아서에 대한 존경심으로 참아줄 뿐.
아서가 가장 아끼는 기사인 트리스탄은 처음부터 레이나에게 아서 곁에 두기는 가당찮은 여자라는 듯 차가운 시선을 뿜어내던 사람이었고, 레이나 역시 동의했기에 그녀는 트리스탄 앞에서 자신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트리스탄은 명백히 레이나에게 호의적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레이나는 염치없는 마음에 긴장하느라고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저 냉정하고 못된 케이에게만 의지하고 있었다.
트리스탄이 말을 걸 때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고 굳은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케이에게는 편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트리스탄은 그것이 은근히 서운하고 섭섭했다.
아서 경이 가장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기사는 나고, 아서의 기사들에 대한 모든 인터뷰마다 그것이 언급되는 것은 트리스탄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서 경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아내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니 케이 경에게 지는 것 같았다.
이 두 사람이 잘되는 게 아서 경에게 가장 좋다는 건 내가 제일 먼저 알았는데.
케이 경은 레이나의 진심을 알면서도 인정해 주지 않고 둘을 갈라놓으려고만 했었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저렇게 순진하게 케이 경만 믿고 있다니.
그래서 어떻게 아서 경 옆에서 그 험한 길을 같이 헤쳐나가려고.
“…….”
트리스탄은 케이가 테일러를 언급했던 것을 내심 경계하며 바라보았다.
케이는 아직도 아서 옆의 레이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가끔 기사들끼리 그녀 얘기가 나올 때 무표정한 얼굴로 한숨을 쉰다.
케이 경…….
아직도 레이디 옆에 그 의사 양반을 붙이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레이나는 웃으며 케이와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케이 경. 여동생처럼 생각해 주신다니 영광인데요. 저는 형제가 없어서 이렇게 오빠처럼 챙겨주시는 분이 계신 게 좋고 의지가 됐거든요.”
케이는 딱히 좋아하는 표정도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레이디들은 보통 격식 있는 자리에선 ‘오라버니’라고 합니다. 이런 자리에선 ‘오빠’도 큰 문제 없습니다만 황제 황후 폐하 앞이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씀하실 일이 있으면 오라버니라고 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레이나가 순진무구하게 웃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오라버니’라고 할게요.”
아오……. 정말!
그리고 레이나는 표정이 썩 좋지 못한 트리스탄을 보더니 어깨를 살짝 흠칫하면서, 훈련받은 대로 교과서적인 ‘레이디의 거리감 느껴지는 미소’를 보여 주었다.
“…….”
그사이에 높디높은 벽이 느껴졌다.
* * *
레이나는 브로디와 마리나에게 벽난로와 욕실이 딸린 좋은 방을 내주었다.
마리나는 잔뜩 도사리고 있었고 낙심한 것 같았다.
“볼튼 경에겐 말하지 말아 줘. 난 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지 않아. 지금이야 당장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니 달려온 거지만, 아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고민해 보면 그 사람도 뭐가 자길 위해 좋은지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을걸. 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
레이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나. 내일 후작저로 돌아가기로 했었지? 내가 편지를 써줄 테니 이틀 정도 여기서 더 쉴래?”
“……편지?”
“나 지금 크리스티나 아가씨잖아.”
레이나가 어깨를 으쓱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어머니께 편지를 써서, 마리나가 몸이 좋지 않아서 일을 못할 것 같다고, 볼튼 경이 자기 옆에서 돌보고 싶다고 해서 여기서 머물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면 며칠 정도는 돌아가지 않아도 될 거야. 그분들도 네가 유산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거 아냐.”
마리나가 고민하는 듯이 웅크린 채 방구석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물론 볼튼 경한텐 가지 않아도 돼. 여기서 브로디랑 같이 있어. 후작 부인께 말만 그렇게 하는 거야. 어때?”
“…….”
마리나가 레이나를 보지 않은 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작게 중얼거렸다.
“……고마워. 그럼 나 여기서 하루만 더 있어도 돼?”
“이틀 더 있어도 돼.”
레이나는 그 후로 딱히 본론이 없는 대화를 한동안 나누고, 따뜻한 우유를 내어준 뒤 그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떠나 주었다.
“……에휴.”
브로디가 나와서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왜 그런 건지 모르겠어. 아이가 생겨야 하는 쪽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생기고, 꼭 곤란한 쪽은 한 번에 덜컥 들어서고 그러는 것 같지 않아?”
“…….”
넋두리가 이어졌다.
“아이가 유산돼서 너무 슬퍼하고 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유산이 안 되어서 자기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사람도 있고…….”
“…….”
십 년 넘게 하녀 일을 하며 아이를 떼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던 하녀들을 셋이나 알고 있는 레이나도 공감되었다.
후작 부부는 아이가 잘 생기지 않는다고 몹시도 주변에 히스테리를 부리고 하녀들을 들들 볶곤 했었다.
마님의 히스테리가 두려워 결혼한 기혼 하녀들은 아이가 생겼다는 축하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임신한 것을 쉬쉬했었다.
그 반대편에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이를 떼지 못해 안달복달하며 우는 하녀들이 있었다.
“……들어가서 잘 챙겨 줘. 후작 부인께는 내가 이야기 전해 둘게.”
브로디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세 사람 다 하녀였던 때처럼 돌아가 너무 편하게 대하고 만 것이 민망했는지 브로디의 말투가 다시 존댓말로 돌아갔다.
“고마워요. 아가씨가 우리 편이라서 다행이에요.”
“…….”
레이나는 피식 웃으며 소탈하게 브로디의 팔을 두드려 주었다.
마리나는 훌쩍이다가 브로디와 함께 잤다.
* * *
“그럼 마리나 양은 유산하지 않았는데 헤어지려고 하고 있는 거고, 유산약을 구하고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볼튼 경에게 알려도 될지 잘 모르겠어요. 마리나가 결혼을 원하지 않고, 많이 불안해해서요.”
레이나는 조심스럽게 케이의 안색을 살폈다.
마리나는 입장상 처치가 곤란한 상태였고, 스스로 떨어져 나가 준다고 하면 아서나 기사들 쪽에서는 편안해지는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래도 레이나는 자신이 받았던 제안처럼 케이가 마리나를 도와줄 수 없을지 기대했다.
케이는 생각하는 것 같았다.
후작 부인과 크리스티나에게 묶여 있는 듯한 마리나를 이쪽으로 명분 있게 데려오거나 포섭하는 것이 가능한지, 마리나를 위험하지 않게 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듯했다.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제되지 않게 잘 이야기해 보지요. 마리나 양의 의향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이야기해 볼 테니 걱정 마세요.”
레이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 * *
아서가 돌아왔을 때는 아침 해가 막 뜨고 있었다.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지는 새벽녘까지 아서를 기다리다가 잠든 듯, 레이나는 침대에 기대어 앉은 채 자고 있었다.
아서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고 새벽이슬을 맞은 외투를 벗어 걸었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몸이 덥혀질 때까지 벽난로 앞에서 기다린 뒤, 몸이 온기를 되찾자 비로소 레이나 쪽으로 다가가 그녀를 편하게 침대에 눕히려고 손을 뻗었다.
레이나는 그가 다가오자 곧바로 깨어났다.
“아, 오셨어요. 깜박 잠들었네요.”
아서가 웃으며 살짝 몸을 숙여 레이나의 미간에 입술을 대었다.
“깨워서 미안. 계속 자요.”
아서가 레이나의 등과 무릎 뒤에 손을 넣고 부드럽게 들어 올려 그녀를 편히 눕혀 주었다.
레이나는 그의 손과 입술이 따뜻해서 기분 좋게 얼굴을 비볐다.
힘들었죠. 별문제 없었나요?
할 만했어. 당신은?
저도요.
그리고 그가 멀어질 수 없도록 팔을 뻗어 목을 감아 안았다.
“당신도 자요.”
아서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못 잘 것 같으니, 놔 줘요, 부인.”
레이나가 웃으며 그의 목을 감고 그의 입술에 두어 번 입 맞추었다.
아서가 웃으면서도 곤란해했다.
“잠깐만…….”
“괜찮아요.”
결국 오래 저항하지 못하고 입맞춤이 깊어졌다.
달콤한 소리와 숨결이 둘 사이를 채우며 공기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레이나가 셔츠 위에 걸친 그의 겉옷을 하나 더 벗겼다.
아서가 그녀를 안은 채 웃었다.
“이래선 약속을 못 지키겠는데.”
레이나가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아서가 입맞춤에 응하면서 웃었다.
“내 좋을 대로 해석하기 시작하고 있으니 그 말 하지 말아요.”
레이나의 손이 그의 옷깃 아래로 살그머니 들어갔다.
“…….”
입맞춤 사이 살짝 앓는 듯 내는 신음소리가 잠겨 있었다.
입술이 거의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깨어나면 당신이 소파에서 자고 있는 게 싫어요…….”
“……부인.”
레이나가 속삭였다.
“같이 자요…….”
아서가 괴로운 듯 웃으며 그녀에게로 고개를 내려 입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