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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비밀의 언저리 (187/210)


#187. 비밀의 언저리
2023.06.15.


황궁을 나와 마차에 오른 뒤 비로소 레이나가 긴장이 풀린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맞은편에 앉은 아서가 생각에 빠진 얼굴로 스스로의 손을 깍지 껴 잡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레이나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레이나가 복잡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는 아서를 마주 보았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당신 생각.”

“…….”

레이나가 웃었다.

재회한 아서를 무척 낯설어하던 시절에 저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서가 여전히 그녀에게 시선을 둔 채 옅게 웃었다.


“정확하겐,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

“…….”

나도 그때 그런 생각을 했었지.

짧은 침묵 후에 아서가 웃는 얼굴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초조하네.”

“뭐가요?”

아서가 스스로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내 곁에 있겠다고 선택한 걸 후회하거나 두려워할까 봐, 불안한 것 같아.”

그리고 덧붙였다.


“엉망이잖아, 루사익.”

레이나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생각은 안 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저야말로 엉망인걸요. 완전히 콩가루잖아요, 줄리어스.”

말하고 보니 웃겼다.

줄리어스가 진짜 내 가문인 것처럼 말했네.


“…….”

아서에게서도 이번엔 살짝 진심이 담긴 웃음소리가 났다.

레이나가 웃음기가 남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제 마음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는데……. 어쩌면 그게 당신의 삶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복잡했나 봐요.”

“…….”

“당신한테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기분이 드니 남 일 같지 않고, 그 인생이 너무 믿기지 않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을까 슬프고.”

“…….”

“내가 나를 더 잘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

“당신한테 그런 슬픔이 없게, 내가 오랫동안 당신 옆에서 건강하게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서가 웃었다.


“그건 바람직하네.”

레이나는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것은 아서를 충분히 안심시킬 수 있을 만큼 따뜻했다.

레이나가 아서에게 옆으로 비켜보라는 듯이 살짝살짝 손짓하고는 자기 치맛자락을 움켜쥐어 들었다.

아서가 옆으로 조금 움직이자, 레이나는 쑥스러워하면서도 뻔뻔하게 그 옆에 가서 끼어 앉았다.

쿵.

비좁은 마차 의자가 두 사람으로 꽉 차며 마차가 무게 중심을 옮기느라 덜컹거렸다.

레이나는 큼, 큼 하고 헛기침을 하곤 자기 치맛자락을 정돈하더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딴청을 하며 아서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아서가 레이나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나이가 몇인데 이런 걸 하고 있는 거야.”

레이나가 민망한 듯 입술을 삐죽였다.


“싫어요?”

“아니.”

아서는 얼굴을 가린 손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당겨 순식간에 레이나의 입술을 훔쳤다.


“…….”

 

 
입술이 닿는 순간 가벼운 전율이 흘러서 레이나는 움츠렸다.

아서는 가벼운 입맞춤만 하고 이마를 톡 건드리며 웃었다.


“싫겠어?”

“…….”

너무 좋아.

얼굴이 확 달아오르면서도 짧은 입맞춤이 좀 아쉬운 기분이 들어 레이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왜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이 스치는 게 이런 야한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

레이나가 얼른 그런 기분을 떨쳐내려고 자세를 바르게 고쳤다.

그리고 그를 옆으로 올려다보며 물어보았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 당신 오러를 알아챌 수 있게 된 걸까요? 다들 몇 년은 같이 살았을 때나 그런 능력이 생겼다는데……. 저희는 안정된 관계는커녕 당신은 먼 곳에 출정 나가 있었고, 오 년 동안 연락도 없었던 데다 얼굴도 보지 못했잖아요.”

“글쎄……. 당신이 뛰어나서?”

“농담도 안 돼요…….”

“흠…….”

아서가 조금 망설이다 물어보았다.


“혹시 당신……. 그때…… 나하고 있었던 일 때문에, 무슨 일이 있진 않았지?”

“예?”

“……오 년 전에. 그 일로 당신 몸에…….”

“…….”

아서가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긴장한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나가 무슨 말인지 모르고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

아.

아?

【 -지난주 드린 보고에 ‘원인으로 추정되는 요소’로 반려의 임신을 추가합니다.

-그것도 (반려에게 생기는 오러 능력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

아!

레이나는 아서가 뭘 차마 말하지 못하는 건지 알아챘다.

레이나는 얼굴이 붉어진 채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그러지 않았어요! 저한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다시 깍지 낀 손이 엄청나게 의식되었다.

애써 그런 기분이 안 되려고 애쓰고 있는데.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레이나가 너무 어쩔 줄 몰라 하자 마차 안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당신.”

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지레 레이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죄, 죄송해요. 제가 이러니까 더 신경 쓰이시죠.”

“음, 아니……. 죄송하진 않아도 되는데.”

아서가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가 한숨을 쉬고 레이나의 머리 위에 얼굴을 기댔다.


“진짜 빨리 결혼하고 싶다.”

“…….”

레이나는 터질 듯이 붉은 얼굴을 하곤 작게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도요.”

“…….”

레이나가 손을 내려다보며 꼼지락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땐 검붉은 물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임신하지 않은 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마님은 그땐 그런 것도 신경 써 주지 않았다.

나도 너무 경황이 없어 아무것도 대비하지 못했고.

……응?

아서와 눈이 마주쳤다.


“…….”

“…….”

다시 불이 튀었다.

결국 그들은 마차가 도착해 저택 앞에 멈출 때까지 입 맞추었다.

거기서 멈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마부는 마차에서 내리지 않는 젊은 신혼부부를 재촉하지 않고 모르는 척해 주었다.

* * *

레이나는 오늘 알게 된 정보들을 비밀 노트에 정리하며 생각에 잠겼다.

【 ※오러의 부작용을 피하는 법.

-오러를 심하게 쓰지 않을 것.

-오러 능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부작용은 X

-반려가 곁에 있어 주면 치료됨.

-반려가 죽으면 치명적. 】

레이나는 반려에 동그라미를 치고 밑에 작게 적었다.

-결혼?


“…….”

레이나는 그 밑에 한 단어를 더 적어 보았다.

-잠자리……?

 


“…….”

‘연인 관계’나 ‘결혼’으로 적혀 있긴 했지만, 이것일 수도 있지 않나.

분명 그때 뭔가……. 나도 느꼈고.

아서 경이 그 이후로, 좋지 않았던 몸 상태가 확실하게 좋아진 것 같은데…….


“…….”

레이나는 이것이 자신의 사심인지 말이 되는 것인지 고민하며 자신이 쓴 단어를 노려보다가 펜으로 뭉개어 지워버렸다.


“…….”

아니야. 역시 이건 아니야.

‘바람’을 느끼기 시작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 즈음해서 나한테 반려의 각인이나 능력이 생긴 것이다.

정작 능력이 생긴 건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을 때였다.

그건 이것도 필수적인 게 아니라는 뜻이다.


“…….”

그즈음 해서, 나 혼자 그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 같긴 하다.

최소한…….

-짝사랑……?


“…….”

펜이 망설이며 느리게 움직였다.

-혹은 쌍방…….


“…….”

나이가 몇인데…….

레이나는 그것도 왠지 민망하고 이상해서 지워버렸다.

대신 레이나의 펜이 옆 페이지로 가서 움직였다.

【 ※반려가 각인되는 조건

-결혼하거나 몇 년 이상 같이 사는 것.

-결혼 서약?

-연인 관계? 】


“…….”

레이나의 시선이 반려라는 글씨 위에 오래 머물렀다.

반려를 잃으면, 아서 경도 그렇게 망가질 수 있는 걸까?

귄터 베인처럼…….


“…….”

황후는 그런 문제를 막을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귄터에게 사람을 붙였다.

그리고 귄터 베인은 최초의 반려를 잃은 뒤, 점차 몸 상태가 악화되었지만 3년째 살아 있었다.

지금이 4년째였지.

선황제 폐하는…… 당시의 황후가 돌아가신 후 삼사 년 만에 세상을 떠나시지 않았나?

아직 귄터 베인은 오러를 써서 사람을 죽이며 다니고 있고, 아서 경을 위협할 정도의 오러 사용자다.

당장 죽을 것 같지는 않다.


“…….”

루아는 죽기 전에 귄터 베인에게 새 반려로 각인되었던 걸까?

그래서 그를 치료할 수 있었던 거고, 귄터 베인은 최소한 잠시 동안은 회복이 되었던 걸까?


“…….”

귄터 베인이 복수를 원한다면 위험한 건 누굴까.

복수하려는 대상은 황후 폐하? 아니면 우리?

우리라면 박탈감 때문에?

살리아 왕녀의 시녀를 죽인 이유는 뭐지?

그쪽도 루아나 미아와 관련이 있었을까?

아니면 별 이유 없이 그냥 우리를 겁주려고?

혹은 황제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아니면 정말 이유 없이, 미친 살인마라서?


“…….”

지금은 미친 사람일 수 있다.

그래도 최소한 처음에 귄터 베인은 그냥 이유 없이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그렇게 행동하는 원인을 알면 어쩌면, 문제를 풀 수 있을지도…….

레이나의 펜이 사각사각 움직였다.

【 반려 ‘미아’ -> 결혼, 귄터의 반려 각인 -> 미아에게 능력이 생김 -> 임신 -> 미아의 죽음
▶‘미아≡귄터’ 루아가 6년 동안 지켜봄

귄터의 건강 악화, 복수, 길드 폐쇄 등
▶‘루아’가 3년 동안 동행
▶루아의 귀국 거부. ‘귄터 회복되고 있다’ 주장.

‘루아’의 상부 보고 (임신, 귄터와 연인 관계, ‘혼인해 귄터를 구하고 싶다’ 언급) -> 루아의 죽음 (귄터 베인이 죽임?)
▶‘루아≡귄터’?

귄터는 루아에게 각인되었나?
루아에게 반려 능력이 생겼는지 생기지 않았는지는 불명. 】


“…….”

레이나가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며 글씨를 이어갔다.

【 첫 반려를 잃고 두 번째 각인이 일어나는 것이 가능한가?

귄터 베인이 미친 것은 반려의 죽음 때문?

미아의 사고? ……아니면 루아? 】


“…….”

혹시 그 자료를 더 볼 수 있을까?

황태자 전하는 오러에 대한 것은 여기에만 적혀 있다고, 앞쪽은 별 의미가 없이 귄터 베인이 살리아에서 용병 일이나 하고 길드 마스터가 되는 이야기뿐인 자료라고 했지만…….

어쩌면…….


“…….”

오러에 대한 생각, 귄터 베인에 대한 생각.

아서에 대한 생각. 세르네이드에 대한 생각.

그리고 아서를 곤란하게 만드는 황제와 황후에 대한 생각과…….

줄리어스 일가에 대한 생각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

눈을 감자 자연스럽게 검붉은 물을 마셨던 일에 대한 걱정도 스쳤다.


“…….”

괜찮을까?

한동안 아서의 침실에서 머물 때, 레이나는 마님이 보내온 검붉은 물을 매일 마셨다.

당시에 아서 경과는 아이가 생길 만한 일이 없었지만, 마님에게는 그런 거 알 바 아니었고, 말해 봤자 믿지도 않을 것이라는 빤한 미래가 보였기에 레이나는 그것을 군소리 없이 마셨다.

그건 아이를 떼는 약이기도 하고, 피임약이기도 하고, 불임이 되는 약이기도 했다.

로렌슨 선생님이 해독환을 함께 주시긴 했지만, 오랫동안 마셨던 것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이전에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난 평생 결혼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불임이 되어도, 몸이 좀 상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

휴…….

레이나는 미련한 과거의 자신을 탓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람…….

지금은 황후 폐하와 귄터 베인, 당장 코앞에 닥친 데뷔탕트가 더 큰 문제인걸.

문득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일을 하러 간 아서는 오늘도 늦는 듯했다.

공부하던 책과 노트를 정리하고 일어나던 레이나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멈칫했다.


“……?”

무슨 소리지?

레이나는 조용히 하고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끅 끅 우는 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여자가 우는 소리였다.

헛구역질을 하며 뭔가 게워 내는 소리 같기도 했다.

불길한 음성에 귀 기울이던 레이나는 어느 순간 흠칫 놀라서 겉옷을 아무거나 주워 걸치고 문을 열었다.

아는 목소리였다.


“마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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