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 보이는 모습과 다른 것들 (186/210)


#186. 보이는 모습과 다른 것들
2023.06.11.


【 장례식이 끝났습니다.

경관들의 수사에는 진척이 없습니다.

돈을 노린 강도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훔쳐 간 건 단돈 1골드 40실버 뿐이었습니다.

귄터 베인은 아직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많이 화가 나 있기도 합니다.

베인에 대해 전달 드릴 추가적인 내용이 있다면 경과 보고하겠습니다. 】

*

【 루아가 미아에게 정을 많이 준 것 같습니다.

베인만큼은 아니지만 루아도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길드를 건사하고 경관들과 다투는 베인을 진정시키느라 연락드릴 여유가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정리되면 루아가 다시 상세 보고를 드릴 겁니다.

베인의 신변에 다른 특이 사항이 포착되면 보고하겠습니다. 】

*

【 귄터 베인이 미아의 일이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사건 경위를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XX단의 짓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과거 루아와 미아를 납치한 적이 있는 해결사 조직입니다.

XX단의 뒤를 캐기 위해 베인이 루아를 데리고 다니며 함께 조사하고 있습니다.

루아가 보고를 전처럼 자주 올려 드리긴 힘들 것 같습니다.

베인이 계속 일을 시키고 있어서요.

귄터 베인이 오러를 끊임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하면 안 될 듯합니다.

사고 이후 베인은 길드의 일도 팽개치고, 자지도, 먹지도 않은 채 사건을 파헤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저희에게 무척 많은 일을 시키고 있고, 동업자로서도 신뢰하기 어려워졌으며 많이 예민해져서 일하기가 까다로워진 상황입니다. 】

*

【 베인의 심신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체중이 크게 감소했고, 잠을 자지 못하며, 신경증적인 증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별의 충격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도 볼 수 있어, 반려 상실로 인한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건지, 오러를 무리하게 사용하기 때문인지, 몸을 돌보지 않기 때문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술 외엔 뭘 먹는 것 같지 않으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 당연해 보여 오러 때문인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게 만들기 위해 루아가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

*

【 폐하의 조의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귄터 베인이 계속 넓은 범위에 오러를 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감시가 삼엄하여 무엇인가 수상할 여지가 있는 행동을 하거나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루아에게도 폐하의 위로를 전하겠습니다.

저희 모두 XX단의 조사에 동원되어 끌려다니고 있어 보고를 자주 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

*

【 베인이 XX단 조직 간부를 잡았습니다.

간부는 끝까지 자신들이 연루된 일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베인은 믿지 않았습니다.

일단 정보를 얻어야 하지 않겠냐고 달래어 고문을 중지하게 하고 이튿날 다시 취조를 하려 했습니다만,

의사와 함께 도착했을 때는 이미 베인이 살해한 후였습니다. 】

*

【 귄터 베인이 XX단을 궤멸시키고 수장을 참수했습니다.

XX단 수장은 끝까지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베인이 미쳤다고 발악했지만, 베인은 수장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

*

【 베인이 경관을 살해했습니다.

과거 연이 있던 군 간부에게 연락하여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힘들게 무마했습니다만, 베인을 제어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공개적인 장소에 전시하는 일이 많아 살리아에서 용병왕 베인의 악명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베인이 일을 벌인 후엔 관련된 증거를 없애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베인이 숨기는 데 협조적이지 않아 어려운 상황입니다.

베인이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해 살리아 군에서도, 민간에서도 더 이상 베인에게 일을 맡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동안 일구어 온 것이 아쉽지만, 길드는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

*

【 폐하.

미아가 죽고 저희는 벌써 세 번째의 겨울을 맞고 있습니다.

이만 멈추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귄터 베인은 가망이 없습니다.

더 이상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루아와 저는 XX단의 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루아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베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귄터 베인은 자신의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일관성 없이 의심하고 있고, 그의 의견에 반대한다면 저희도 의심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

【 폐하.

루아만이라도 귀국시키는 것을 건의드리고 싶습니다.

지쳐 보입니다.

귄터도 가혹하고요.

저는 저만 남아도 괜찮습니다.

벤 경도 있고요. 】



 

*

【 폐하.

폐하께서 귀국 명령을 하셨지만 루아가 베인이 호전되고 있다며 조사를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을 압니다.

폐하께서 요원들의 의지를 존중해 주시는 분인 것을 감사히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베인이 호전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루아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아가 죽은 후 세 번의 겨울을 나는 동안 루아는 베인에게 너무 동화되었습니다.

그녀는 정상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녀는 이곳에서 9년을 있었고 한결같이 폐하께 충성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폐하께서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다 강하게 말씀하시고 귀국을 명령하시면 루아는 고집을 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부탁드립니다.

폐하께서 루아를 설득해 주십시오. 】

*

【 폐하.

루아에게 귀국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

*

【 폐하.

루아를 강제 귀국시키는 것을 고려해 주십시오. 】

*

【 폐하. 】

편지를 넘기던 레이나의 손이 멈추었다.

【 폐하.

루아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귄터 베인의 아이입니다.

귄터 베인은 미쳤고, 강압적이며, 저희들을 힘으로 억압합니다.

루아는 항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폐하. 루아에게 귀국 명령을, 부디……. 】

몇 번의 편지 뒤에, 그의 편지 속 어조가 참담하고도 고요하게 바뀌었다.

【 폐하.

지금쯤 루아에게 편지를 받으셨겠지요.

루아의 말은 사실이며, 제가 폐하께 거짓 보고를 올렸습니다.

베인과 루아는 강압적인 관계가 아니었고,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그의 곁에 남고 싶어 합니다.

저의 자의적 판단으로 그녀에게 귀국을 강권하였습니다.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요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사실대로 보고를 올리지 않은 벌은 제가 모두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가혹한 상황에 처한 루아를 가엾게 여겨 주시기를 청합니다. 】

그리고 뒤에 이어진 마지막 피투성이 편지는 빅터의 것이 아니었다.

【 빅터 루이스.

나이절 브라이트만.

자비에 클레.

제레미 베릴.

던햄 본즈.

길리안 스튜어트.

루아 킬리. 】



“…….”

다른 필체로 쓰여 있는 마지막 편지는 보고서에 종종 등장하곤 했던 이름들로 시작되어 있었다.

그 아래 키들거리는 듯한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

【 마리아 루사익.

제국의 황후.

내가 끝까지 모를 것이라 생각했나. 】

* * *



“황후 폐하.”

“마틸다.”

황후가 마틸다를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얕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요즘 괜찮아요? 별일 없어요?”

“예, 폐하, 보살펴 주신 덕분에…….”

황후의 모습이 피곤하고 염려스러워 마틸다는 말끝을 흐리며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후가 피로가 가득한 얼굴에 마틸다를 위해 지어 주는 표정인 듯, 입매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것은 마치 뭔가 힘든 이야기라도 전해주려는 것처럼 보여 마틸다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마틸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후 폐하, 피곤해 보이십니다. 염려되는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황후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팔을 두드렸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당신밖에 없네. 황궁에 좀 흉흉한 일이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좀 신경이 쓰이네요. 당신도 걱정되고. 호사다마라지만, 좋은 일 앞두고 왜 이렇게 흉조가 많은지.”

“…….”

황후가 자리를 내주었다.


“일단 앉아서 차부터 들어요. 몇 가지 할 이야기가 있어 불렀어요.”

“예, 황후 폐하.”

황후가 자리에 앉은 뒤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와 함께 ‘그 아이’를 만났어요. 똑똑한 아이 같더라구요. 당신 이야기랑은 다르던데?”

“…….”

마틸다의 눈이 불안해졌다.

마틸다는 황후를 상대로 ‘레이나’의 수준을 매우 낮추어 말했다.

마틸다는 진심으로 그렇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녀들과 교우 관계가 좋은 것도 아니고, 말주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딘지 어둡고.

늘 움츠려 있고, 옷이나 화장에 대한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살갑게 윗사람을 기분 좋게 해 주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시녀를 할 만큼 말재주나 손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크리스티나가 그렇게 예뻐하는데도 몸종이나 시키지 뭘 맡길 수도 없다.

동정심 많은 크리스티나가 그 애를 불쌍히 여겨 자주 부르긴 했지만, 그 자리에는 너무나도 과분한…….

‘크리스티나와 비교도 되지 않는 아이.’

감히 폐하 앞에서 실수하지나 않을지 무척 걱정이라며, 하녀 태를 못 벗은 수준 낮은 행동거지를 상정하고 수도 없이 많은 흉을 보았다.

그랬는데…….


“……황제 폐하께 좋은 공작 부인이 될 것 같다고 극찬을 받았다고요?”

황후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들고 웃었다.


“황제 폐하께서 칭찬에 인색하신 분인데……. 저도 놀랐어요. 아서의 아내이고 당신들의 딸이니 더 좋게 말해 준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

마틸다는 순간 울컥해서 ‘레이나’를 헐뜯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다.

황제에게 극찬을 받았다고?

그건 우리 크리스티나가 받아야 할 찬사였는데.

그 자리에 내 딸 크리스티나가 있었어야 했는데.

마틸다의 목소리가 분노로 미세하게 떨렸다.


“어머나……. 크리스티나가 그 애를 예뻐해서 자주 부르고 이것저것 가르쳐 주기는 했어요……. 그래도 부족함이 많을 텐데…….”

그러면서도 마음속 한편에서는 그 애가 좋게 평가를 받아야 크리스티나의 미래도 더 밝아진다는 논리가 서로 싸웠다.


“그 애도 귀족의 혈통을 물려받기는 했나 보네요…….”

레이나가 물려받은 핏줄이라 봐야 그 악명 높은 ‘로널드 줄리어스’의 혈통이었다.

한때 사교계의 퀸이었던 그녀의 시어머니, ‘패트리시아 줄리어스’의 핏줄이었다면 모를까 레이나 쪽은 그리 내세울 만한 평판 좋은 혈통이 아니다.

마틸다는 자기가 질투에 눈이 멀어 빤히 속이 보이는 말을 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부글부글 속을 끓였다.

그렇구나, 그 생각을 못 했어.

내내 홀대하던 아서의 아내니까.

아서를 칭찬하긴 황후의 눈치가 보이니 그냥 옆에 있는 아내를 칭찬한 거겠지.

자신이 주선한 혼인이니 생색도 낼 겸!

마틸다는 속으로 재빠르게 합리화를 마쳤다.

아무렴 우리 애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걔만큼 못했을까!

마틸다의 얼굴이 질투와 분노로 홧홧해졌다.

공작 부인.

아서가 공작.

그래, 공작 작위를 받는다고는 했지. 알고 있었지만.

어느 공작 작위인데?

완전히 결정된 건가?

영지가 있는 작위가 아니라면 어차피 명목뿐인 작위다.

딱히 ‘줄리어스’ 후작가보다 낫지도 못할…….


“세르네이드 공작령이에요.”

“……네!?”

마틸다는 거의 찻잔을 놓칠 뻔했다.

세르네이드!

루사익 이전의 황가가 가지고 있던 작위잖아!

제국 수도였던 땅이고!

그런 작위를 수여하는 게 가능한 거였어?

세르네이드는 완전히 루사익이 흡수한 거 아니었냐고!

아니, 황후는 아서에게 그런 작위가 가는 걸 그냥 두고 보았단 말이야!?


“몇 가지 작위를 폐하와 함께 고민 중이었는데, 그 애가 퍽 맘에 드셨는지 그 자리에서 저와 상의도 없이 말해 버리시더군요. ‘세르네이드’를 주겠다고. 그만큼 믿고, 마음에 드셨다는 뜻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저로선 급하게 결정해 버리시니 조금 걱정이 되긴 했네요.”

“…….”

마틸다의 얼굴이 파래지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세르네이드……. 세르네이드 공작 부인.

빼앗긴 아서가 너무 아까웠다.

크리스티나가 그보다 나은 남편을 찾을 수 있을까?


“두 분 폐하께 큰 폐를 끼치지 않고 좋은 모습을 보였다니 다행스러울 따름이에요. 어깨너머로 배운 게 많아서……. 얼추 흉내를 잘 냈나 보네요. 앞으로도 부디 실수 없이 잘해야 할 텐데…….”

마틸다는 침착한 황후 앞에서 흔들린 자존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기를 썼다.


“…….”

달각.

황후가 찻잔을 내려놓고 마틸다를 바라보았다.


“마틸다, 나는……. 당신이 걱정이에요.”

“네?”

황후 마리아가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괜찮아요. 하지만 당신은 그 아이를 상대로 너무 방심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

황후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난 아서 경은 황태자가 워낙 괜찮은 사람이라 하니까 염려하지 않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 아이가 좀 신경 쓰이네요. 당신 앞에서랑 황제 폐하 앞에서 보이는 모습이 많이 다른 거라면 그것도 무서운 일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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