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타인의 역사
(185/210)
185. 타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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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타인의 역사
2023.06.08.
“양이 많네요.”
카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거의 이십 년 치니까. 나도 다 못 보긴 했어.”
“…….”
카일이 최근에 보던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를 꺼냈다.
반려가 오러를 느끼는 케이스가 있기는 했다며 카일이 책을 펼쳐 가리킨 부분에는 ‘드문 케이스’라며 귄터의 아내가 했던 말이 적혀 있었다.
【 00년 00월 00일 - 길드 사무실
*주요 보고
미아가 귄터가 오면 자신은 그 기척을 느낀다는 말을 함.
*상세 상황
미아: 그거 알아요? 귄터가 오면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어요.
지금 밖에 도착해 들어오고 있어요. 내기할래요?
셋. 둘. 하나.
(귄터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옴)
귄터: 미아. 걔한테 이것저것 말해 주지 마.
미아: (불쾌함을 표현하며 두둔함) 루아를 걔라고 부르지 마, 귄터. 진짜 못된 상관이라니까.
*종합
-미아에게 반려의 오러 감지 능력이 생긴 듯함. 드문 케이스.
*신뢰도 보고
-미아는 ‘루아’를 신뢰해 주고 있으나, 귄터 베인은 여전히 경계하고 있다.
-더욱 주의가 필요한 듯.
-그러나 급한 일이 있을 때 미아의 경호를 맡기는 걸로 봐선 경계 수준은 낮아져 있는 듯하다.
-‘빅터’도 ‘루아’만큼은 아니나 신뢰하기 시작한 듯.
-빅터가 베인에게 빵을 자주 사다 준 것이 효과가 있는 듯하다. (미아가 좋아하는 빵입니다.) 】
카일이 말했다.
“‘드문 케이스’라는 건 몇몇 다른 케이스를 알기는 했다는 뜻인 것 같아요. 왕의 서고에서 비슷한 걸 본 적 있거든요.”
카일이 고개를 들어 아서를 보며 말했다.
“저희 할아버지와 할머니 케이스. 선황제 루사익 대제와 선황후 폐하의 케이스예요.”
그리고 카일은 다시 시선을 내려 십여 페이지 뒤에 적혀 있는 보고서를 보여 주었다.
【 00년 00월 00일. 미아 베인의 경호 도중.
*주요 보고
‘귄터 베인의 기척’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음.
미아는 ‘바람’ 혹은 ‘존재감’으로 느낀다고 답함.
결혼하기 전에는 느끼지 못했으나, 결혼하고 몇 년 지난 후에 어느 순간부터 구체적으로 느끼게 된 것 같다는 대답을 들음.
*상세 상황
루아: 귄터가 미아, 당신과 결혼한 후론 암살 의뢰는 받지 않지만, 그런 의뢰는 계속 들어올 정도로 기척을 아주 잘 숨기는 편이거든요. 일 처리도 확실하구요.
그런데 미아는 어떻게 귄터가 오는 걸 알아채는 거예요? 혹시 다른 사람의 기척도 느껴요?
미아: (고개를 저음) 아니, 난 다른 사람 기척은 못 느껴요.
내가 느끼는 건 귄터가 가까이 오는 경우뿐이에요.
그래서 난 귄터보다 루아랑 빅터가 훨씬 유능하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다들 귄터가 잠행을 가장 잘한다고 하니 나는 이해가 안 갔지.
귄터는 나도 알아챌 정도로 존재감이 강한데 무슨 잠행을 한다는 건가…….
윗사람이니까 그냥 치켜세워주는 건가 했어.
루아: 어떤 식으로 느껴지는데요? 소리?
미아: 아니. 귄터가 오면 이렇게…… 바람이 부는 것 같아. 그리고 난 그게 귄터라는 걸 알 수 있어요.
루아: 저는 전혀 못 느꼈는데……. 처음부터 느꼈던 거예요?
미아: 아니. 음……. 결혼하고 나서부터?
루아: 결혼하고 나서요? 미아! 작년에 저랑 같이 XX단한테 납치돼서 갇혀있을 때 귄터가 온 것 같다고 알려준 적 없잖아요! 마스터가 밖에 와있는 걸 알고 있었으면 알려주지!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데!
미아: (민망해하면서 정정) 아, 미안. 미안. 사실 그때는 나도 확실하게 못 느꼈어요. 나도 이게 귄터구나, 확신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거든.
*종합
-‘미아’가 귄터의 반려인 것을 재확인.
-귄터는 이미 반려의 위험을 느끼고 있었으나, 반려가 오러를 느끼게 되는 것은 더 나중의 일인 것으로 추정됨.
-귄터는 이미 예전부터 미아에게 생명의 위기가 있을 경우 느끼고 달려올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그러나 미아가 귄터의 오러를 느끼게 된 것은 그보다 더 시간이 지난 나중의 일.
-반려 쪽에 오러(Aura) 감지 능력이 생기는 것은 반드시 생기는 것이 아니며, 생기더라도 대체로 오러 사용자(Auror)가 자신의 반려를 인지하게 되는 시점보다 훨씬 늦게 발현되는 듯함.
-쌍방에 동시에 능력이 생기지 않으며, 한쪽만 생기는 경우도 있고, 능력의 발현은 ‘오러’와 ‘반려’에게 별개로 발현되는 것일 가능성이 높음.
-반려에게 능력이 생기는 케이스 자체가 드문 일이며, 최소한 5년 이상이 걸리는 것으로 추정. 결혼 3년 차에 능력이 생겼다고 가정한다면 매우 빠른 케이스로 여겨짐.
-‘연인’도 반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듯함.
※ 원인으로 추정되는 요소
1. 6년 이상의 연인 관계, 혹은 3년 이상의 혼인 관계 (필수 전제로 추정됨)
2. 귄터 베인이 뛰어나기 때문
3. 안정된 관계, 확실한 유대감이 영향을 미치는 듯함
p.s. 귄터 베인이 ‘그것’에 대해 함부로 대답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 탓인지, 평소엔 그저 웃으면서 사랑의 힘인가? 얼버무리고 마는지라 자세히 듣는 것에 실패했으나, 자연스럽게 물을 기회가 있어 질문한 결과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부자연스럽게 캐묻지 않도록 꾸준히 조심하고 있습니다. 】
레이나가 작게 소리 내어 황태자가 가리킨 부분을 읽었다.
황태자가 말을 고르며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어머니의 의도와 관계없이 이 내용은 꽤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구체적이고 제가 왕의 서고에서 찾았던 단서들하고도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거든요.”
“…….”
“반려 쪽은 정보가 많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제가 조사한 케이스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저희 조부모님과 베인의 케이스는 여기 적힌 세 가지 요소를 전부 충족하고요. 다른 케이스들도 최소한 첫 번째가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
“제 생각에, 아서와 연인 관계가 4개월도 넘지 않은 당신은 아직 그런 능력이 생길 때가 아니에요. 두 사람이 혼인 후 오 년이 넘은 건 맞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최소한 오 년은 ‘함께 살았던’ 케이스였어요.”
“…….”
레이나는 황태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뒤쪽을 조금 더 봐도 될까요?”
“그렇지 않아도 권하려고 했어요. 보세요.”
【 00년 00월 00일. 미아 베인의 집.
*주요 보고
미아가 아이를 가짐. 】
“…….”
레이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 *상세 상황
미아가 쓰러져 의사를 불러왔고, 미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걸 진단함.
귄터가 눈물을 보이며 기뻐함.
*종합
-미아의 임신으로 분위기가 무척 좋음.
-‘루아’와 ‘빅터’가 미아의 임신 축하 파티에 초대받음.
-지난주 드린 보고에 ‘원인으로 추정되는 요소’로 반려의 임신을 추가합니다.
-그것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
보고서는 대체로 단정하고 분석적이었으며, 황후에 대한 충성심이 묻어났다.
“…….”
보고서 몇 페이지를 더 넘기던 레이나의 손이 멈추었다.
【 00년 00월 00일.
*긴급 보고
미아 사망.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
언제나 차분하고 단정하던 ‘루아’의 글씨가 떨리고 있었다.
“…….”
레이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레이나가 잡고 있는 책은 아주 두꺼웠다.
뒤쪽에 아직 내용이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급작스럽게 이런 결말이 나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가 다른 책을 들고 다가왔다.
“그 뒤쪽은 더 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음엔 이쪽이에요.”
“…….”
카일이 책상 위에 책을 펼쳤다.
“‘빅터’의 보고입니다.”
“…….”
“그 후의 일은 이쪽을 보는 것이 더 나아요.”
카일이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제가 ‘루아’를 ‘귄터’의 두 번째 반려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 적혀 있습니다.”
“…….”
레이나는 멍하니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시는 게 좋겠네요. 귄터가 루아를 죽인다는 결말이거든요.”
* * *
후작, 안토니오 줄리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고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고개를 숙이는 시간이 자신의 충성심에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오랫동안 숙였다가 고개를 드는 후작의 얼굴에 황제를 또다시 독대하는 것에 대한 기쁜 미소가 가득했다.
“황제 폐하. 자주 불러주시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황제가 들어서며 덤덤히 웃었다.
“앉게.”
시종이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야무지더군. 하녀 출신이라더니.”
후작은 움찔하고는 그들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 있는 시종의 눈치를 보았다.
“귀머거리일세.”
“아, 예, 폐하.”
후작은 애써 긴장하지 않은 척 하하하 하고 웃었다.
자신의 입으로 황제에게 이실직고했지만, ‘하녀’라는 소리를 들으면 약점이라도 잡힌 기분이 들어 움찔하게 된다.
그리고 어쨌든 지금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에게 집에서 일하던 하녀를 들이밀었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니.
“이복 누이의 딸이니 조카아이랍니다. 평민은 아니지요. 저희가 알아보지 못하고 오해가 있어 잠시 하녀 일을 했었지만, 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고. 크리스티나의 시중을 오랫동안 들어서 그런지 어깨너머로 배운 것도 많고 괜찮은 아이입니다. 저도 똑똑하고 착하다고 예뻐했습니다.”
어떻게든 ‘하녀’라는 배경을 무마해 보려는 장황한 칭찬에 황제는 크게 대꾸해주지 않은 채 잠잠히 웃었다.
어쨌든 분위기가 나쁘진 않다.
후작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는 ‘황태자’나 ‘렘브란트’에게 ‘크리스티나’를 붙여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무척 바빴다.
어쨌든 하녀 아이도, 우리 가문도 모두 괜찮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후작은 레이나와 크리스티나를 모두 잘 보이고 싶었다.
“짐이 든든한 뒷받침을 해 주지 못한 아서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어 그대를 골랐네만, 사실 짐은 루사익이 반려를 고르는 데에 가문의 배경이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네. 사람이 가장 중요하지.”
후작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요! 사람의 본질이 가장 중요하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황후는 훌륭한 가문을 가지고 있고 좋은 아내이지만, ‘루사익’의 아내로서는…….”
황제가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진 짐은 무거워.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지. 황후의 탓이라기보다는 짐의 탓이지만.”
아첨을 하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후작의 눈에 황제는 정말 멋있게 보였다.
“아…….”
황제가 고독한 듯이 웃으며 술을 따르고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도와야 하네.”
후작은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옷자락을 확 뒤로 펄럭이고 무릎을 꿇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