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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황제의 그늘 (184/210)


#184. 황제의 그늘
2023.06.04.



“[……당신은?]”

아서가 그녀를 곧 결혼식을 올릴 자신의 연인이며, 혹시라도 오해가 없도록 말씀드리는데 전쟁에는 관여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콴 왕자는 입을 다물었다.

콴 왕자는 ‘라이아네 왕녀’는 전쟁에 관여하지도 않았는데 휘말려 이런 피해를 당하는 것이 가엾지 않냐고 화를 냈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왕녀도 사령관의 약혼녀도 전쟁과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레이나는 왕족이 아니니 라이아네 왕녀보다는 무고한 피해자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같은 발언도 황태자나 아서는 할 수 없지만 레이나가 했을 때는 명분이 있었다.


“왕자 전하.”

내실에서 나온 하녀에게서 라이아네 왕녀가 깨어났다는 말이 전해졌고, 침착함을 되찾은 콴 왕자는 위로를 전하고 싶다는 카일의 말에 누이가 괜찮아 보인다면 전해 주겠다며 다음에 뵙자고 예의를 지켰다.

레이나의 말에서 최소한의 진심을 느꼈는지 날카로운 경계가 조금은 누그러진 기색이었다.

콴 왕자는 황태자와 아서, 그리고 잠시 망설인 후 레이나에게까지 묵례를 하고 몸을 돌려 왕녀를 보러 들어갔다.

콴 왕자가 안으로 들어간 후 레이나가 작게 사과했다.


“허락 없이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황태자 전하.”

황태자도 작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사실 저도 비슷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우리가 말했다면 분위기가 더 안 좋아졌을 거라서 말하지 못했어요. 레이디가 말해 주어서 진정성 있게 들렸습니다. 나서 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콴 왕자도 머리를 식혔을 것 같네요.”

“아닙니다.”

황태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힐끔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살리아의 폭탄 테러 후 아서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콴 왕자는 당황해서 저희들 왕실파가 한 일이 아니라고, 우리가 여기에 볼모로 있는데 살리아 왕실이 그런 테러를 사주했겠느냐고 난처해하며 결백을 주장했었다.

그때 카일 황태자는 콴 왕자의 항변에 적극적으로 신뢰를 표명하진 않았지만, 최소한 불신의 발언으로 그들을 곤란하게 하지는 않았다.

레이나가 정확히 그것을 짚었기에 콴 왕자는 할 말이 없어져 입을 다문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야 아니겠지만 난처한 상황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카일 황태자는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마지막에 해 준 말도 고마워요. 조사하겠다는 말만 하고 있었네요. 순간적으로 곤란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바람에 방어적이 됐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레이나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칭찬을 사양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기사들이 왜 황태자 전하를 신뢰하고 존경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이렇게 최선을 다해 보호해주시니까요.”

카일 황태자도 미소 지었다.

황태자나 총사령관이 사과를 하면 외교적으로 그들이 잘못을 인정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니 아서나 카일이 사태를 파악하지 않고 사과를 먼저 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통해 정중한 공감을 받았다는 것이 왕자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기는 했을 것이다.

아서가 걱정이 묻은 눈으로 레이나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냐고 묻는 시선.

그리고 그녀는 작게 끄덕이고 웃으며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그것이 부부만의 순간처럼 느껴져 카일은 시선을 거두었다.


“흠.”

“!”

“황제 폐하.”

황제가 안으로 들어왔다.

셋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어느새 밖에서 호통을 치고 있던 목소리가 사라져 있었다.

황제가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살리아어를 할 줄 아오?”

“……아뇨. 인사말과 유명한 몇 마디만 아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통역이 있었고, 황태자 전하와 아서 경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들렸던지라…….”

“배우는 것도 괜찮겠군.”

“네?”

“아서를 많이 도와주시오. 아서에겐 세르네이드 공작령을 줄 것이니.”

“!”

레이나가 놀라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세르네이드는 루사익 이전의 황실.

대가 끊긴 후 루사익 황실이 섭정을 보내 관리하고 있던 곳으로, 제국에서 세 번째로 거대한 공작령이었다.

레이나도 그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감히 후보에 두지는 못했을 정도로 높은 작위였다.

황제가 툭 던지며 몸을 돌렸다.


“도움이 되는 공작 부인이 될 것 같군.”

“…….”

감히 그런 것을 받기는 과분하다고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휙 시선을 옮겨 버린다.

레이나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황송합니다, 폐하.”

황태자와 아서도 놀란 빛인 것을 보니 미리 언질을 받지 못한 내용인 듯했다.

어떡하지. 괜찮을까?

탈이 나지 않을까?

시한폭탄을 안은 기분이었다.

황제가 냉정한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아서.”

“예.”

“카일을 도와라. 태자가 아무래도 아직 혼자서는 부족한 성싶다.”

아서는 짧은 틈을 두고 답했다.


“예, 폐하.”

그리고 황태자를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에 못마땅한 빛이 역력했다.

네가 얼마나 얕보였으면 살리아에게 이런 말을 듣고 있냐는 질책이 묻어났다.

귄터 베인의 오러 따위는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황제는 황궁의 방비가 어떤 이유로 뚫렸는지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살리아의 왕자에게 빌미를 주어 이런 항의를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한 듯이 보였다.

황제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바깥의 복도에 서 있던 황후와 눈이 마주쳤다.


“…….”

가만히 선 황후와 황제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

그러나 이내 황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뒤에 굳어 있는 레이나와 아서, 카일에게 시선을 두고 생긋 웃어 주었다.


“미안해요, 레이디 크리스티나. 드레스는 다음에…….”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

그러고는 황제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부드럽게 잡으며, 술을 많이 드셨다고 황제를 달래어 떠났다.

* * *



“마틸다를 만나야겠어요.”

황후가 시녀에게 말했다.

* * *



“후작을 만나지. 기다리고 있나?”

황제가 시종에게 말했다.

* * *



“…….”

분위기 끝내주는군.

황태자 카일이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짚고 아서와 레이나 앞에서 마른세수를 했다.

레이나는 정말이지 몸 둘 바를 몰라 하고 있었고 아서는 시큰둥한 얼굴을 했지만 레이나를 신경 쓰며 황태자에게 굳이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황제 폐하가 좀 사람 난감하게 하시는 편이죠. 난 사실 익숙한 일이에요. 두 사람도 너무 신경 안 썼으면 좋겠고.”

“…….”

“앞으로도 종종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불편하겠지만, 그러려니 해 주세요. 어머니 쪽은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저만 믿으라는 뜻은 아니고요. 나름대로 두 분도 주변을 살펴주세요. 저도 피차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불편한 분위기였지만 레이나는 애써 웃었다.

황태자가 얼굴을 문지르던 손을 내리고 말했다.


“일단 급한 것부터 합시다. 일단 여긴 좀 그러니 자리 옮길까요?”

 

* * *

그들이 자리를 옮긴 곳은 황태자의 집무실이었다.

집무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카일이 즉시 물었다.


“이거 귄터 베인 짓 같은데, 아서. 어떻게 생각해?”

아서가 대답 대신 무거운 얼굴로 레이나를 보았다.


“당신, 느꼈지.”

“……네?”

“그 오러.”

“……네.”

아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눈에 짙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 황후를 따라 그쪽으로 가려고 했어? 그쪽에 위험한 게 있다는 걸 느꼈으면서?”

황태자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레이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뇨, 가려고 한 건 아니에요. 황후 폐하가 저를 시험하시는 것 같아서 피하는 모습을 보여도 되는지 판단하기 어려웠어요. 아무래도 저에 대해 아시는 것 같아서…….”

황태자는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다.


“……당신에 대해 안다고요?”

“네.”

“어머니가 뭐라고 했나요? 당신을 회유하거나 떠봤어요?”

“음,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레이나가 머뭇거리며 작게 말했다.


“저한테 가족의 안부를 묻지 않으시더라구요.”

“네?”

레이나의 목소리가 조금 분명해졌다.


“……제 ‘여동생’에 대한 걸요. 사실 그 대답을 준비했거든요. 그런데 묻지 않으셨어요.”

황후의 입에서 그 질문이 나오지 않는다.

그녀가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라고 알고 있었다면 나왔어야 하는 당연한 질문이.

갑자기 가문에 들어온 ‘되찾은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

레이나는 그 모든 대답을 준비한 상태였기에 마리아 황후가 그것을 묻지 않는다는 것에서 금방 위화감을 느꼈다.

황후는 레이나의 경계심을 사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


“……줄리어스 후작 대부인의 안부도 묻지 않으셨어요. 대부인께서 사교 활동을 하시던 시절에, 황후 폐하와도 친분이 있으셨던 걸로 아는데……. 대부인께서 지내시는 별장에 큰일이 생겼다는 걸 들으셨을 텐데도…….”

“…….”

레이나가 말을 이었다.


“황후께선 제가 ‘아가씨’가 아닌 걸 아시는 것 같아요. 제가 당황할 것 같은 질문은 하지 않으셨어요. 아마 하녀였던 것까지 아시는 것 같아요.”

가족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가문에 대한 이야기나 드레스, 보석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레이나가 준비한 대답들은 필요가 없었다.

물은 것은, ‘아서 경 멋있죠?’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이 진짜 크리스티나 아가씨였어도 그랬을까?


“아마 출처는 마님. 그러니까, 줄리어스 후작 부인인 것 같아요.”

레이나가 아서를 바라보았다.


“……후작 부인 쪽이 황후 폐하의 편에 섰다면, 줄리어스에서 있었던 일들이 전부 전해졌을 거예요. 괜찮을까요? 저희 약점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거의 다 알고 계실 가능성도…….”

“잠깐만요.”

황태자 카일이 레이나를 멈추며 물었다.


“네?”

“……당신, 오러를 느껴요?”

레이나가 어색해했다.

말해도 되는 건가.

아서 경이 먼저 말해서 얼결에 대답하긴 했지만…….


“자세히 알 수 있는 건 아니고……. 약간요. 아마 아서 경이나 황태자 전하처럼 알 수 있는 건 아닐 거예요.”

카일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건…….”

내가 본 자료랑은 또 안 맞는데.

뭐지?

둘은 다시 만난 지 반년도 안 됐잖아.


“…….”

아서와 레이나가 자신을 바라보는 걸 보고,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으로 와 봐요. 두 사람. 당신 두 사람의 문제든, 귄터 베인의 문제든. 일단 이걸 먼저 같이 보는 게 좋겠네요.”

그리고 책상 위에 아직 쌓여있는 두꺼운 자료들로 발걸음을 옮겼다.


“……?”

카일이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 어머니와 대화했고, 어머니가 오러에 대해 알기 위해 사람을 보내 귄터 베인을 지켜본 걸 인정하셨어요. 하지만 도를 넘는 일은 하지 않으셨다고 하시더군요.”

“…….”

카일은 그 부분은 어느 정도 진실인 것으로 들렸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은 것을 참았다.


“이건 귄터 베인의 일생에 대한 자료고, 황후 폐하께 받았어요. 어차피 언젠가 저를 위해 주려고 한 거였다면서, 이젠 저의 것이니 당신들을 위해 써도 좋다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걸 좀 살펴봤는데…….”

황태자가 둘을 바라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귄터 베인한테는 반려일 가능성이 있는 여자가 두 번 있었고, 둘 다 죽었어요. 지금 귄터 베인은 죽어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

“첫 번째 여자는 반려인 것이 확실한데, 두 번째 여자는 불확실해요. 그 사이 귄터 베인한테는 몇 가지 오러의 부작용으로 추정되는 문제가 발생했고…… 여기 그에 대한 내용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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