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역지사지
(183/210)
183. 역지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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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역지사지
2023.06.01.
“콴 왕자가 분노해서 황태자 전하를 찾고 있습니다. 일단 바로 가서 사태 파악하셔야 할 듯합니다.”
보고를 받은 황태자가 당황한 얼굴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저쪽에 황후와 레이나 양이…….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
그리고 황태자는 이내 얼굴을 굳혔다.
“북궁 통제해. 그리고 황제 폐하께 보고해.”
“네? 황제 폐하께요? 화내실 텐데, 일단 사태를 먼저 파악하심이……. 황태자 전하!”
카일은 계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 * *
“크리스티나 양, 이를 어째. 뜨겁지 않아요? 드레스를 망쳤네요.”
레이나가 난처한 듯 손수건으로 치마를 닦으며 말했다.
“부끄럽습니다, 황후 폐하. 다치진 않았습니다.”
레이나는 망쳐진 치마를 난처해하는 척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긴장해서 실수를 여러 번 하네요. 저…… 괜찮으시다면…….”
마리아 황후는 이런 일을 겪은 레이디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호의를 선뜻 베풀었다.
“내 궁으로 가겠어요? 침방 시녀가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아니, 아예 갈아입을 수 있는 드레스를 한 벌 줄게요. 그게 좋겠네요.”
황후는 시녀에게 눈짓하고는 레이나를 자신의 궁으로 데려가려 했다.
레이나도 마주 미소 지으며 감사의 예를 표하고 일어났다.
“황송합니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정원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
무기가 날아올 수도 있고, 폭탄이 터질 수도 있고, 납치당할 수도 있어.
위험을 여러 번 경험한 감각이 레이나의 본능을 안전에 민감하게 했다.
어떤 위험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지금은 저 오러를 피해야 했다.
궁 안으로 들어가야 해.
하지만 황후의 시녀가 지시를 받고 빠른 걸음으로 떠나는 방향을 본 레이나는 멈칫했다.
“…….”
시녀가 달려간 방향에서 바로 지금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오러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나의 머릿속으로 미리 익혀 두었던 황궁의 모습이 그려졌다.
‘황후궁은 저쪽이 아닌데?’
시녀가 가고 있는 곳은 황후가 황태자비 시절에 머물렀던 궁이었다.
그곳도 황후의 궁이라고 할 수 있긴 했다.
문제는 지금 그곳에서 불길하게 느껴지는 오러가 넘실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 저쪽으로 함께 가요. 내 시녀가 준비해 둘 거예요.”
“…….”
황후가 살갑게 레이나의 어깨를 짚고는 발을 떼었다.
레이나는 얼굴이 굳은 채 미소 지었다.
“…….”
마리아 황후는 정말 모르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혹시 황후가 날 시험하고 있나 하는 가능성에도 생각이 미쳤다.
레이나는 머뭇거리는 것으로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간을 끌었다.
“……한데, 황후 폐하의 궁은 저쪽이 아닌가요?”
마리아 황후가 돌아보며 사람 좋게 미소 지었다.
“네, 맞아요. 황제궁의 옆이죠. 하지만 드레스가 가장 많은 궁은 저쪽이랍니다. 내가 황태자비 시절에 머물던 궁이라, 아가씨들에게 선물해 줄 만한 드레스는 그쪽에 더 많거든요.”
황후가 웃으며 손짓하고 발을 떼어 레이나가 옆에 오길 기다렸다.
“황후궁보다 조금 더 걸어야 하긴 하지만 그쪽이 더 나을 거예요. 가지요!”
“…….”
어떡하지?
피할 방법이 없다.
귄터 베인인가, 아니면 내가 오러를 느끼는지 아닌지 알아보려는 황후의 시험인가?
거절해야 하나, 아니면…….
그 사이에도 음산한 오러는 더욱 그 기세를 넓혀가고 있었다.
마치 수풀 속에 숨어 먹잇감이 다가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뱀처럼.
레이나는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황태자 전하도 아서 경이 오러를 쓰면 그걸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혹시 내가 느끼는 걸 황태자 전하도 느끼고 있고 이게 위험한 상황이라면, 황태자 전하가 달려와 막아주시지 않을까?
“……폐하의 배려가 하해와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미가 있는 곳에 제가 가도 괜찮은 건가요? 태자비의 궁이라니, 황태자 전하께서 곧 비를 맞이하실 텐데…….”
“그런 말 말아요. 아직은 태자비의 궁이 아니니까. 어서 가요.”
레이나가 황송하다는 듯이 차마 발을 못 떼고 머뭇거리자 황후가 웃으며 팔짱을 끼고 레이나를 끌었다.
“그대에게 입혀 보고 싶은 드레스가 많아요. 빨리 입혀 보고 싶네요. 레이디 크리스티나는 무척 미인이라 입혀 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피할 수 없어.
이 이상 거절하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로 보일 것이다.
레이나는 어색하게 보일 것을 감수하고 한 번 더 넘어질 각오를 했다.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다.
아예 다리를 다치면 황태자비 궁이 아니라, 황후궁으로 갈 수 있을 거야.
레이나가 넘어지기 직전,
“폐하.”
드디어 뒤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렸다.
그리고 익숙한 바람.
레이나는 반가운 나머지 순간 숨을 멈췄다.
아서였다.
레이나의 몸을 아서의 바람이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위협적인 바람이 아서의 오러에 흩어지듯 사라졌다.
아서가 익숙하게 황후에게 예를 갖추고 레이나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황후를 바라봤다.
마리아 황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아서 경? 폐하와는 이야기가 끝났나요?”
“폐하.”
정원을 박차고 들어온 황태자의 목소리가 뒤이어 따라왔다.
“……무슨 일이 있나요?”
황후가 물었다.
보고를 받다 말고 먼저 튀어 나간 황태자를 따라서 기사들과 시종들이 허둥지둥 달려오며 좋지 않은 안색으로 난처하고도 급한 내색을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만남은, 이만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일이 좀 생겨서요.”
뒤쪽에서 황제의 일갈이 들려왔다.
“감히, 황궁의 보안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 거야!”
뒤쪽으로 갈수록 목소리에 노기가 서리며 소리가 커졌다.
황후가 편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황제의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큰 소리가 나자, 불길한 오러는 이내 흔적 없이 사라졌다.
무슨 일인지 묻는 황후의 눈짓에 기사가 고개를 조아리고 소리를 낮추어 보고했다.
황후가 굳은 얼굴을 했다.
“……시녀가 시신으로 발견되다니? 살해됐다는 뜻이에요?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기사가 면목 없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살해된 것 같습니다.”
시녀가 살해당해?
황궁 한복판에서?
레이나가 눈을 크게 떴다.
“함께 가지요, 북궁으로.”
이내 레이나는 살해당한 것이 누구의 시녀인지 눈치챘다.
북궁은 살리아의 왕족 포로들이 머물고 있는 거처가 있는 곳이었다.
* * *
살리아의 왕세자인 콴 왕자가 파리한 안색으로 격앙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살리아가 비록 패전국이고 나와 누이가 이곳에 볼모로 왔다 하나, 제국은 우리를 ‘오 년 전쟁’ 종전의 상징이자 평화의 약속으로 데려온 것 아니오? 그런데 어떻게 황실의 손님인 나와 누이를 이렇게 부적절한 방식으로 위협할 수 있소?]”
“…….”
분노와 모욕감, 두려움으로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 시녀는 내 누이에게 자매와도 같은 사람이었소. 평생을 함께했고 대대로 왕실을 섬긴 충신의 딸이며, 만류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누이를 걱정해 자신의 발로 이 먼 타지까지 우리를 따라온 사람이었소. 그런데 어떻게…….]”
왕자가 심호흡하며 목울대가 일렁였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그녀를 죽이고 연극을 하고 있다는 모욕적인 말을 할 수가 있소?]”
“…….”
콴 왕자는 살리아 항복 협정의 볼모이자 살리아 왕실의 적장자였다.
제국으로서도 인질의 가치가 있는 사람을 데려와야 약속의 이행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중요한 사람을 볼모로 받아낸 것이었지만, 아무리 제국이 승전국이어도 인도적인 차원에서 심하게 대우할 수는 없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콴 왕자의 말은 틀린 곳이 없었다.
카일이 병사들을 사주하여 왕녀의 시녀를 잔인하게 살해해 그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오해만 빼고.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었다.
왕녀의 시녀는 끔찍한 모습으로 살해된 채 왕녀의 의자에 앉은 채로 발견되었다.
정체불명의 살해자는 보란 듯이 왕녀의 의자를 방 한가운데 끌어다 두고 시녀의 죽은 몸을 앉혀 놓았고, 시녀의 머리는 평소에 왕녀가 왕관을 두는 협탁 위에 과시하듯 전시해 두었다.
전쟁에 다녀온 그들은 시신을 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인데도 순간적으로 멈칫하게 되었다.
왕녀가 기절한 것도 이해가 갔다.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며, 악마적인 악의가 느껴지는 소행이었다.
그들 역시 전쟁에서 많은 슬픔을 겪었고 수도 없이 죽은 자를 보았지만 이런 기괴한 살인 현장이 주는 느낌은 달랐다.
전장에선 살기 위해 상대를 죽였지만, 이건 그런 살인이 아니었다.
카일은 왕자와 병사들 사이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
기절한 왕녀는 방 안에서 다른 시녀들과 의사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었고, 야위고 해쓱한 왕자가 나와 카일 앞에서 떨며 직접 항의하고 있었다.
그 앞의 복도에서는 병사들이 대질심문을 받고 있었다.
그들 사이 분위기가 썩 좋지 못하고, 콴 왕자가 확연히 야위어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황태자는 왕자 일행에게 식량이 제대로 보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장에선 소중한 식량을 포로들을 먹이는 데 쓰는 것을 병사들이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분위기였다.
카일도 그것을 이해했다.
황궁으로 옮겨 왔다고 사정이 당연히 달라졌을 리는 없었는데.
“…….”
포로와 병사들 사이의 갈등이나 괴롭힘을 미리 짐작하고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을 카일은 내심 후회했다.
그들 사이에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포로들은 황실의 근위 기사들과 전쟁에 다녀온 병사들이 절반씩 분담하여 살피고 있었고, 그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은 병사들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병사들과 기사들도 눈치가 있으니 왕족에게는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그들의 처우를 꼼꼼히 확인하지는 않았으니, 모르는 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내 병사들이 황궁 한복판에서 이런 살인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는 오해를 살 정도로 콴 왕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나?
황태자는 포로들의 대우를 꼼꼼히 확인하지 않은 것을 내심 후회하며 외부인 소행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병사들은 억울한 듯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카일 황태자가 직접 와서 왕자의 증언을 듣는 모습을 보고 조금 기가 죽은 듯했다.
하지만 신뢰하는 전우이자 그들에게 언제나 잘 대해 주었던 황태자 카일이었기에 자신들이 대단히 크게 질책당하지는 않으리라 믿는 듯한 모습이기도 했다.
“……저희는 계속 교대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살리아의 왕족 포로를 허술하게 감시할 리가 없으니까요.”
황태자는 기사들이 말하는 궁의 보안 상태를 확인하고 속으로만 탄식했다.
전쟁터의 군영과 황궁의 보초 수준이 같을 수야 없겠지만, 이건…….
“…….”
귄터 베인이 아서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건 제대로 지킨 것이 아니다.
모든 공간과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 이런 순찰 근무는 허술하기 짝이 없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공간에서 빈틈을 찾아내는 귀재들이니까.
침투하는 것은 숨 쉬는 것보다 쉬웠을 것이다.
아서가 그런 방식으로 살리아 적진에 침입해 자신을 구했으니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왜 살리아의 시녀를?
전쟁이라도 다시 일어나길 바라는 거야?
병사들이 억울한 듯 토로하고 있었다.
“왕녀 전하께서 바짝 다가와서 문 앞을 감시하는 포로 대우는 예의도 아니고 불편하다고 하셔서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된 것인데 그 이상 꼼꼼하게 보호하지 못한 것은 저희의 탓이 아니잖습니까. 억울합니다. 명명백백히 밝혀 주십시오.”
“…….”
병사들은 기사들의 심문에 순순히 대답했고,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계속 순찰하며 꼼꼼히 지키고 있었으니 외부인이 침입했을 리 없다, 저들, 살리아 왕족의 말을 더 자세히 들어 보고 조사해 보셨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앙심을 품고 일을 벌인 것이라고 불신의 말을 덧붙였다.
“…….”
이건 높은 확률로 귄터 베인의 짓인데.
병사들은 왕자 혹은 왕녀의 자작극이라 여기고, 왕자는 병사들의 짓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해명해 봤자 살리아 길드의 용병왕이 왜 살리아 왕녀의 시녀를 살해한단 말이냐, 말이 되는 핑계를 대라는 대답이 돌아올 테니 그런 말을 할 순 없었다.
황실의 모든 치부를 드러낼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더 반발감을 살 일이었다.
카일은 굳은 얼굴로 콴 왕자에게 말했다.
“시녀의 일은 유감이오. 앞으로 더욱 그대들의 보호를 철저히 하고 그대의 고국인 살리아 왕실에도 조의를 보내겠소.”
콴 왕자는 통역을 전해 듣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믿지 않는 듯이 울컥해 반발했다.
“[모르는 일이라고? 황궁 한복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변명이 너무 무성의하지 않소?]”
왕자의 얼굴이 분노와 치욕감으로 붉어졌다.
“[우리를 기만하지 않아도 되오. 숨기려 할 필요 없소. 살리아에 포로로 있으며 험한 일을 겪은 그대가 복수를 원한대도 이해할 수 있으니.]”
“복수가 아니오. 우린 정말로,”
“[말해 두겠는데, 그대가 포로로 있을 때 일선의 군인들에게 겪은 가혹한 대우는 우리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소. 전부 군법으로 처벌했고. 하나 저자들은 어떤 처벌을 받게 되오?]”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니,”
“[이런 복수는 가혹하고 치졸하오. 멈추어 주시오.]”
콴 왕자의 통역관이 무거운 얼굴로 왕자의 말을 애써 부드럽게 통역했다.
살리아 말을 할 줄 알면서도 카일은 잠자코 통역의 말을 기다렸다.
“[식량을 형편없이 보내는 것도, 냉궁에서 떨게 하는 것도 견딜 수 있었소. 그대도 겪은 일이니 얼마든지. 하지만 이건 도를 넘었지 않소? 화풀이를 할 테면 나에게 하시오. 전쟁엔 조금도 관여하지 않고 휘말렸을 뿐인 내 누이와 시녀가 가엾지 않소.]”
“…….”
그런 일이 있었군.
식량, 난방, 옷.
포로에게 흔히 벌어지는 일이었다.
카일은 곁의 시종에게 시녀의 이름을 물은 뒤 살리아어로 말했다.
“[오스티아 양의 일에 진심으로 유감을 표하오. 철저히 조사하겠소. 식량과 난방도 의도한 것은 아니었소.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오. 그리고 맹세컨대 이 사건은 우리가 의도한 일이 아니오. 내 병사들의 행동도 아닐 것이오. 우리는 그럴 이유가 없소.]”
뒤편에서 살리아어가 나왔다.
“[나 역시 평화를 원하오. 어쩌면 그대 이상으로.]”
“…….”
콴 왕자가 침묵했다.
그가 걸어와 카일의 뒤에 섰다.
“[조사시키겠소.]”
아서였다.
콴 왕자가 붉어진 눈을 하고 비웃었다.
“[말은 참 쉽군. 그대들은 위선자요]”
“…….”
“[차라리 죽이시오.]”
“…….”
차라리 죽이라는 말을 듣자 함께 포로로 잡혔던 동료 병사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포로 경험이 트라우마가 된 카일은 콴 왕자를 상대하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
자신의 관할임에도 이들을 피해왔던 이유였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황태자는 꾹 참으며 물러났다.
아서가 카일 대신 말했다.
“우리가 이런 짓을 할 정도였다면 지금 왕자 전하의 앞에서 해명을 할 의지가 있었을까요.”
“…….”
“콴 왕자 전하나 라이아네 왕녀께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시거나 이 먼 타지에서 돌아가신다면 그 일이 도화선이 되어 살리아에선 반 종전 세력이 다시 명분을 얻을 것이고,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것은 저희도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아서가 짧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때, 아서의 뒤에 서 있던 여자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외람되오나,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저는 아서 경과 함께 얼마 전 살리아인들로부터 테러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아서의 뒤에 선 여자에게로 쏠렸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저희는 그것을 살리아 왕실의 짓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평화를 위해 직접 나서신 왕자 전하와 왕녀 전하께서 그런 테러를 원하지 않았을 거라는 앞뒤 정황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콴 왕자 전하께서도 그렇게 여겨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진심으로.”
레이나가 예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애도를 표합니다.”
* * *
복도 바깥에서 아서와 카일이 대처하는 말을 듣고 있던 황제와 황후의 귀에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