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낯선 환대
(182/210)
182. 낯선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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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낯선 환대
2023.05.28.
황제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좋은 배필을 얻은 걸 보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아서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보살펴 주신 덕분입니다.”
황제가 작게 웃으며 입가로 술잔을 가져갔다.
“짐이 너를 살뜰히 보살피지는 못했지. 그래도 아비 노릇을 한 번은 한 것 같아 마음을 놓았느니라. 나중에 네 어미를 볼 낯은 있겠구나.”
“…….”
아비 노릇.
아서는 묵묵히 술잔을 든 채 그것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숙였다.
자못 너그럽게 선심을 쓰는 황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앞으로도 짐의 그늘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하거라.”
“예, 폐하. 황송합니다.”
황제가 그러길 바라는 눈치라, 아서는 황제가 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
황태자도 그러더니.
술을 먹이는 건 가풍인가.
아서는 황제의 낯선 가족 대접에 묵묵히 따랐다.
「태자는 다음에 함께하자꾸나. 오늘은 아서를 위해 준비한 자리이기도 하고 태자도 정무가 바쁠 테니.」
아서는 카일에게 레이나 쪽을 부탁한다는 눈빛을 보냈고 태자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예, 폐하. 다음 기회를 고대하겠습니다.」
황태자가 황제에게 예를 갖춘 뒤, 아서에게 눈짓을 보내고 일어났다.
“…….”
그리고 황제는 아서를 황궁 만찬실로 데려가서 궁정 하인을 불러다 술상을 준비시켰다.
미리 언질이 있었던 듯 많은 것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
낯선 환대였다.
독대를 거절하려 했을 때, 은근히 불편한 낌새를 보인 이유가 이건가.
독대를 원한 것이 황제였다는 황후의 말이 정말이었던 건지, 아무래도 황제는 아서와 술을 마실 기대를 하고 미리 하인에게 언질을 해 둔 모양이었다.
금방 술자리가 준비되었고, 아서는 황제에게 술을 받았다.
“…….”
황제와 황후를 알현하는 것으로 알고 왔는데 대낮부터 술상이라니.
그 사람도 설마 황후에게 술을 받는 건 아니겠지.
그 사람은 술을 못하는데.
신경이 온통 황후를 따라간 레이나에게 쏠려있었지만, 황제를 앞에 두고 대놓고 딴 데 신경이 가 있다는 걸 드러낼 수는 없으니 오러를 쓸 순 없었다.
황태자 카일도 아서가 오러를 쓰면 그걸 금방 눈치채곤 했다.
그에게 오러를 물려준 당사자이니만큼 아서가 오러를 쓰면 황제도 느낄 것이다.
황제는 술잔에 술을 따르며 그리운 듯이 말했다.
“……네 어미가 짐을 원망하지는 않았느냐? 짐이 저를 믿어주지 않았노라고.”
아서는 별 감흥이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태어난 지 칠일만에 돌아가셔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아, 그랬던가?”
유모의 말로는 어머니가 죽고 몇 달 후, 날 보러 오긴 했었다던데.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나도 기억하지 못하는군.
왜 돌아가셨는지는 알는지.
황제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피식 웃고는 술을 한 잔 더 비우더니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름다운 여자였지. 너의 그 흑발이 그녀를 닮았다. 아주 선명하고 강렬한 사람이었어.”
자신의 아이를 낳은 후 산욕열로 죽었다는 것은 잊었어도, 추억은 꽤 여럿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어머니가 했던 무대들.
어머니와 보냈던 좋은 시간들.
그럼에도 황후와는 달리 어머니를 믿기는 어려웠던 이유.
아서로서는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 불신의 근거와 사소한 다툼들.
“황제가 약속하는 부귀영화보다 자신의 무대가 더 중요한 여자였어. 멋지다고는 생각한다. 무대에서 빛나는 사람이었으니. 하지만 당시의 짐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 그때 억지로라도 수도로 데려왔다면 네 어미는 죽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
자신은 황제고, 황후가 있었으며 교단이 주시하고 있었기에 계속 그녀의 곁에 있기는 어려웠다는 말이 이어졌다.
미소 지으며 말하는 황제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자락인 듯했다.
“왜 내가 돌아섰을 때, 내 아이가 틀림없노라 더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는지, 그게 그 여자의 자존심이었는지 이해가 안 가기도 하고.”
자신은 황제인데, 그녀의 아이가 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 나중에 밝혀진다면, 그런 불명예를 루사익의 이름으로 감당할 수는 없었다는.
딱히 죄의식은 없는 듯한 변명도 이어졌다.
그래도 아서를 종종 생각했노라는 이야기가 덧붙었다.
아서가 오러의 재능을 강하게 보인다는 말을 누이에게 듣고서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 꽤나 오래 생각했다는 말.
누이인 펄 공작 부인이 대모가 되어 주었기에 믿고 맡겼지만, 언젠가 아서를 다시 만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은 계속했다는 말이 이어졌다.
“너에게 무언가 마련해 주리라는 건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
한때는 이런 장면을 꿈꾸었었는데.
어머니를 한때나마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이 헤어졌고, 너를 줄곧 생각했노라는 말을 듣는 순간을.
황제에게 너는 내 아들이 맞노라는 인정을 받는 순간을.
하지만 아서는 더 이상 황제의 말이 궁금하지 않았다.
레이나의 진심으로 놀라는 눈빛과, 그녀가 주는 인정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이미 모든 것을 이룬 후에야 그늘을 드리워 주겠노라는 선심은 위선으로 느껴졌고, 황제가 피곤했다.
하지만 그녀가 황후를 따라나선 이유를 알고 있다.
내가 황제와 잘 이야기를 나누고 오기를 바랄 것이다.
아서는 레이나의 마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황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네, 이해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텅 빈 대답만 내어놓는 것은 지루할 뿐, 어렵지 않았다.
아서에게 ‘좋은 혼처’를 구해 주기 위해 황제가 꽤나 신경 썼다는 말이 이어졌다.
상업적인 귀족으로 평가받는 ‘줄리어스’와 ‘황실’의 결합에 대한 황제 자신의 평가와 그것을 선택한 이유.
뛰어난 오러를 가진 네가 잘 해낼 것을 알았기에 성공과 실패의 차이가 큰 도박을 했다는 말.
“어지간한 귀족이라면 받아들이지 않았겠지만…….”
술병 하나가 어느새 비어 있었다.
“후작은 자신이 이득을 볼 가능성이 높다 생각했는지 결국 받아들이더구나. 짐 역시 이 몸이 승리하리라 생각했지만.”
“…….”
“결과는 네가 보다시피.”
황제가 아서를 치켜세워 주듯이 손을 들어 정중한 동작으로 아서를 가리키고 웃었다.
궁정 하인이 다른 술병을 개봉했다.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리 품위가 있는 집안은 아니니. 더 좋은 혼처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줄리어스만한 조건은 없었어.”
다른 자식이 없어서 데릴사위가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가문에, 황후의 견제로부터 충분히 배경이 되어 줄 만한 힘이 있는 곳.
너에게 없는 것을 줄 수 있고, 부는 넘치도록 가지고 있지만, 권력과 명예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황제가 요구하는 계약서를 수락할 만한 곳.
“서로 이해관계가 잘 맞았다. 그래서 이 혼인이 성립되었지. 이게 네가 모르던 네 혼인의 뒷이야기다.”
아서가 대답했다.
“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제는 기분 좋게 웃었다.
“네가 잘해 준 덕이지.”
말은 그리하면서도, 전쟁의 결과에 대한 자신의 예측과 오러를 가진 아서에 대한 기대가 맞아 떨어진 것에 대한 자부심이 드러났다.
“좋은 기회를 주신 덕분입니다.”
“그래, 기회……. 전쟁은 기회이지.”
황제가 곱씹으며 미소 지었다.
“너도 알다시피, 제국에 오랫동안 전쟁이 없었다.”
자신에겐 아버지에게 있었던 것과 같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너희들에겐 내가 기꺼이 그 ‘기회’를 주었다는 말.
루사익이 가진 신비한 힘인 오러에 대한 자부심.
오러의 무한한 가능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역시 너는 그걸 아는구나. 카일은…….”
황제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살짝 고개를 젓고 물었다.
“네가 보기에는 황태자가 어떻더냐?”
아서가 답했다.
“좋은 지도자가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황제 폐하의 핏줄인데요.”
“하하, 그래?”
그러나 황제에게서는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황태자에 대한 아쉬움이 드러났다.
황제가 술을 다시 한 잔 마시며 말했다.
“황후는 좋은 여자지만, 자식을 너무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어. 앞으로 이 제국을 맡겨야 하는데 카일이 영 못미더운 데가 있으니 황후가 염려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만.”
“…….”
황제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아서를 바라보았다.
“……너도 황후를 조심해야 할 게다. 지금은 너에게 고마워하고 있고, 기분이 좋은 모양이지만……. 너를 친어머니처럼 품지는 못할 게다. 후작 부인을 자주 만나는 모양이니, 그쪽도 조심하고.”
“…….”
황제가 혀를 차며 자세를 바꾸었다.
“그 사람도 참, 애정이 과해. 그 애정이 ‘루사익’에 대한 것이었으면 좋았으련만. 그 사람은 루사익이 아니라 아직도 ‘클라인’이야. 루사익의 아이를 망치고 있어.”
“…….”
“카일 역시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쯧.”
황제가 아서를 보며 웃었다.
“그래도 너희들이 우애가 좋으니 짐이 한시름 더는구나. 함께 제국을 잘 이끌어가거라. 짐이 도와주마.”
“……네, 영광입니다.”
그다음에서야 오러의 부작용은 없느냐, 너 정도의 오러 사용자는 꽤나 반향으로 고생을 하기도 하는 모양이던데, 몸은 괜찮으냐 하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전부 아서의 한 귀로 들어가 한 귀로 나갔다.
실망스럽지조차 않았다.
한때는 이런 것을 인생의 목표로 바랐다는 것이 몹시도 옛날의 일 같았다.
“…….”
순간 아서가 움찔했다.
아서가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폐하.”
황제가 아서의 돌발행동에 조금 놀란 눈을 했다가 이내 눈빛이 움찔하고 심각하게 바뀌었다.
황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서가 느낀 것을 그 역시 느낀 것 같았다.
* * *
레이나는 긴장해서 테이블 아래서 손을 꽉 쥐었다.
“…….”
오러가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서의 것이 아니다.
위험하게 느껴지는 바람이 피부를 스치고 있었다.
「이 살리아인 남자는 나와 아서의 또 다른 이복형제일 가능성이 있고, 오러를 씁니다. ……내 수준으론 정확하게 알아챌 수 없지만, 아마 아서만큼 자유롭게 쓰는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신들 주변을 맴돌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귄터 베인?
황후는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
황후 폐하는 이게 느껴지지 않는 건가?
황제 폐하의 반려인데…….
황제 폐하가 뛰어난 오러 사용자가 아니기 때문인가?
레이나는 미소 지은 얼굴을 굳힌 채 찻잔을 들어 표정을 감추었다.
“…….”
당혹감이 들었다.
두려워서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자신이 오러에 대해 알고 있고, 오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섣불리 황후가 알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떡하지?
하지만, 어쩌면 황후가 위험하다.
“…….”
레이나는 빠르게 결심을 마치고, 실수인 척 찻잔을 놓으며 자신의 치마에 뜨거운 차를 엎질렀다.
황후가 말을 멈추고 놀라서 일어났다.
“어머, 크리스티나 양! 괜찮아요?”
* * *
레이나와 황후 쪽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던 황태자는 뜻밖의 보고를 받고 안색을 굳히며 몸을 일으켰다.
“뭐?”
기사가 다시 보고했다.
“……포로로 온 살리아의 왕녀가 쓰러졌습니다. 왕녀의 측근 시녀가 시신으로 발견됐고, 왕녀가 그걸 발견했어요.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