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 탐색 (181/210)


#181. 탐색
2023.05.25.


아서가 정중히 나섰다.


“황후 폐하께서 너른 아량으로 저를 이렇게 상냥하게 대해 주시는데, 어찌 제가 감히 폐하를 불편하다 여기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느끼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전 폐하가 불편하지 않습니다.”

황태자는 초조해하면서도 속으로 응원했다.

그래. 아서가 어떻게든 하겠지?

아서도 그녀를 내 어머니와 단둘이 만나게 둘 생각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머니를 만나면 레이나는 ‘크리스티나’가 아닌 걸 들킬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더욱 그녀를 어머니 앞에 내놓는 것은 피해야 했다.

황태자가 불안한 마음을 감춘 채 황후를 바라보며 거들었다.


“어머니. 저도 왔는데 다음에 기회 만드시고 오늘은 같이 말씀 나누시지요. 지금 두 사람 다 긴장해선 서로만 의지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부부를 떼어 놓고 각자 독대하자 하시면 두 사람 다 얼마나 부담스럽겠어요.”

황후가 황태자를 보더니 입을 가리며 사람 좋게 웃었다.


“어머……. 그런가?”

분위기는 온화했다.

그대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황후가 미소 지으며 미안한 듯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쩌지……. 사실 제가 방금 한 이야기는 황제 폐하의 뜻이었거든요.”

“…….”

황제 폐하의 뜻이었다고?

황태자가 본능적으로 철렁하는 불길함을 느끼고 긴장했다.

황후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그동안 아서 경에게 따로 시간을 못 내어주신 걸 마음에 걸려 하시는 것 같아서……. 하지만 태자의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러더니 황제를 돌아보며 의향을 물었다.


“오늘은 그냥 다 같이 얘기할까요? 어떠세요, 폐하? 저는 우리 아들들, 여러 번 보는 것도 좋은데요.”

“…….”

황태자의 표정이 미소 지은 그대로 천천히 굳어졌다.

어머니가 순간적으로 너무 신경 쓰여서 황제 폐하를 간과했다.

황제는 권위에 민감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루사익’에 요구하는 기대치가 높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기대를 실망시키는 걸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황제의 태도는 설핏 너그러워 보였지만 황태자는 그의 권위적인 기질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황태자가 자신과 ‘루사익’을 망신시켰다며 불같이 화를 내는 인물이었다.

아버지라면 이미 저 매서운 눈으로 아서와 그녀를 ‘루사익’에 얼마나 걸맞은 인재인가 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뜻대로 해 주라는 어머니의 배려는 두 사람을 황제의 눈에 실망스럽게 비치게 만들고 있었다.

이미 소탈하게 레이나를 불러내려던 황후의 제안을 한 번 차단한 아서의 태도가 좋지 않게 비칠 소지가 있었다.


“…….”

황제가 아서와 레이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속 모를 표정이었다.

이내 황제가 조금 자세를 비스듬하게 바꾸며 턱을 괴고 물었다.


“흠. 우리끼리 정하면 쓰나. 줄리어스 후작 영애.”

황제가 무감한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오늘은 이대로가 좋소?”

“…….”

젠장.

황태자는 낭패감을 느꼈다.

공이 ‘크리스티나’에게 넘어갔다.

오늘은 이렇게 만나는 것도 좋겠다며 정리해 주지 않는다.

여기서 크리스티나가 한 번 더 거절하면 좋지 않다.

정말 황제가 황후보다 먼저 아서와 독대를 원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폐하가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그녀를 시험하고 있고, 아서와 황태자 카일, 그리고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차례로 이걸 모조리 거절한다면 명백하게 폐하의 심기를 거스를 거라는 점이었다.

이런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그녀가 기꺼이 어른들의 뜻대로 하겠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아서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황태자는 아서가 곧 그녀 대신 입을 열 것 같다고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두 분 폐하께서 기회를 주신다면 어찌 독대할 영광을 놓치겠습니까.”

“…….”

황태자가 흠칫하고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아서 역시 레이나를 보고 있었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치맛자락을 들고 무릎을 굽혔다 펴는 모습이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웠다.

레이나가 황제를 올려다보며 완벽한 예법으로 말했다.


“어느 쪽이든 한량없는 기쁨일 것이니 저는 모두 좋습니다만, 범인에게 쉽게 허락되지 않을 독대의 영광까지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카일은 순간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

레이디 레이나?

내가 아는 사람이 맞나?

아서의 시선이 묵묵히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레이나는 아서와 눈을 맞추고 생긋 웃으며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아서 경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우아한 자태, 절제된 태도, 안정된 목소리, 무엇하나 흠잡을 데 없었다.

지금 그녀는 완벽한 루사익의 레이디였다.

레이나를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이 만족스러워졌다.


“…….”

레이나가 해낸 것을 아서는 망치지 못했다.

레이나가 그의 팔에 얹은 손을 살짝 쓸었다.

괜찮아요, 아서.

실수하지 않을게요.

당신도 실수하지 말아요.


 

* * *

황후와 레이나는 황궁의 정원으로 함께 걸어갔다.

시녀들 몇이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나섰다.

황후는 레이나에게 황궁의 정원을 소개해주며 순간순간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레이나는 수줍어하면서도 우아하게 황후의 말 상대를 했다.

10년 가까이 크리스티나의 말 상대를 하던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공손하고 선을 넘지 않으며, 상대를 불쾌하게 할 만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을 순발력 있는 대답.

황후는 크리스티나에게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소탈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지만, 레이나는 실수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그중 가장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질문은 그것이었다.


“아서 경 멋있죠?”

“네?”

레이나는 순간 당황해 구두를 신은 발을 삐끗하고 몸을 휘청이며 타이밍을 잃었다.

황후가 얼른 손을 뻗어 친히 레이나의 팔을 잡아 주었고, 레이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황후는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괜찮아요. 여기 바닥 돌이 조금 걷기 어렵죠? 나도 종종 그런답니다.”

레이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대답할 말을 골랐다.

황후에게 황제의 사생아가 얼마나 멋있는지 대답하는 건 쉽지 않았다.

황후 앞에서 황제의 사생아인 본인의 남편을 칭찬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실례인가, 아닌가.

아서가 일반적인 황자였다면 가장 모범적인 대답은 황후 폐하의 부군이신 황제 폐하를, 혹은 어머니를 닮아서 무척 멋있노라 대답하는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황제를 닮았다 대답하기도 어렵고, 황제의 핏줄이자 자신의 남편인 그를 낮추어 겸양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상대는 황후였고 아서는 황제의 혼외자였다.

황제를 닮아 멋있든 어머니를 닮아 멋있든 섣불리 해선 안 될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저의 남편보다는 황제 폐하나 황태자 전하께서 더 멋지시다는 대답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일 것이다.

넘어질 뻔한 것을 핑계 삼아 자세를 가다듬고 민망한 듯 미소 지은 레이나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제게는 과분한 분이십니다. 아서 경은 언제나 겸손하시지만요.”

“…….”

그리고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부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

황후는 생긋 미소 지어 주었다.

정원에 다과가 차려지고, 황후는 시녀들을 물린 뒤 레이나와 단둘이 남아 손수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은 뒤 레이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얌전히 찻잔에 차를 따르는 모습이 꽤 침착하고 예쁘장했다.

풋풋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레이디가 저 나이엔 풋풋하니 흠은 아니었다.

황후는 레이나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마틸다의 얘기와는 여러 가지로 달랐다.

담도 작고 너무 태도에 하녀의 습관이 배어 있어서 사교계 최고의 레이디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엔 절대 무리라더니.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라 해도 충분해 보인다.

평생 하녀 생활을 하다 엉겁결에 나온 아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레이나는 억지로 떠밀려 나온 모습이 아니었다.

아서 쪽에서 그녀를 데리고 ‘레이디’ 행세를 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교육했으리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 이상으로 본인이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최고의 교육자들이 붙어도 본인 의지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의 차이는 메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황후였으니.


“…….”

아서가 꽤 잘 대해 주었나 보네.

그녀의 진심을 살 정도로.

이미 황후는 줄리어스 일가의 ‘두 자매’ 소문에 대한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다.

황후의 손에 약점을 잡힌 후작 부인 마틸다 줄리어스가 이미 모든 것을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신부 바꿔치기라니. 담도 크지.

이 사실이 밝혀지면 황제에게는 줄리어스 후작의 작위를 박탈하고 아서에게 가문을 안겨줄 합당한 명분이 생긴다.

그럼 줄리어스 가문은 후작과의 경쟁 없이 아서의 손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딱히 황후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사실을 폭로하고 줄리어스 가문을 망가뜨리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아직은 내부에서 아서와 힘 싸움을 해 줄 줄리어스의 원주인이 버티고 있는 편이 나아 보였다.

어쨌든 결혼은 안주인의 소관.

비록 사생아였으나 그런 사기 결혼이 일어났다는 것은 황실의 무능으로 비칠 소지도 있다.

황후가 황태자를 구해 준 아서에게 감사하고 있고, 너그럽게 대하는 것으로 선전하는 것이 나은 지금은 더더욱.

황후는 마틸다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하며 비밀을 지켜 주었다.

그리고 마틸다의 말은 적당히 걸러 들었다.

레이나와 관련된 보고를 충분히 듣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벤 경이 귄터 베인에게 변을 당하지 않고 살아 있었더라면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저택 안에 틀어박혀 아서의 철저한 보호하에 있을 때는 많은 것을 알 수 없었고, 비로소 밖으로 나와 관찰할 수 있게 되니 벤 경이 변을 당했다.

황후는 아끼는 측근을 잃은 것을 내심 씁쓸해했다.

레이나 정도는 황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순순히 나를 따라오는 것을 보니 아는 건 별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황태자가 다급하게 막는 것을 보니 그녀가 아서의 반려는 맞는 모양이지만.

아서나 황태자가 그녀에게 그걸 굳이 알려줄 이유는 없었겠지.

납득 가는 일이었다.

신중한 아서가 후작가의 사주를 받아 곁에 있는 하녀에게 그런 중요한 정보를 흘릴 것 같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이 여자는 아서에게 들키기 전까지 마틸다 줄리어스에게 아서의 내부 정보를 가져다 보고하고 있었다 했다.

그런 하녀에게 아서나 케이 포드가 중요한 정보를 공유할 리 없다.

흘린 정보가 있다면 의도적으로 유통시킬 가짜 정보일 것이다.

버섯을 편식한다고?

피식.

황후가 웃었다.

귀여워라.

황후로선 레이나를 조금도 위협으로 느끼지 않기에 드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황후의 관심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편히 들어요, 크리스티나 양.”

“네, 폐하.”

황후는 경계하고 있는 레이나에게서 섣불리 정보를 캐려 하지 않았다.

그저 긴장하고 있을 그녀의 마음을 사는 것을 우선에 두었다.

황후는 여러 실 없는 이야기들로 레이나를 편하게 만들어주며 친절하고 좋은 어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레이나는 모든 것을 눈치챘다.

황후 폐하는 나와 대화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아서 경이 막는지 본 거야.

황태자 전하가 막는지 본 거고.

내가 아서 경에게 중요한 사람인지 아닌지 시험해 본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황후 폐하는 내가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아닌 것을 안다.

그리고 이분은 당장은 그것을 밝힐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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