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알현
(180/210)
180. 알현
(180/210)
#180. 알현
2023.05.21.
황후는 카일의 집무실로 귄터 베인의 자료들을 보내주었다.
그것이 자신이 열심히 찾던 정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카일은 차마 자신의 책상에 쌓인 자료를 곧바로 펼쳐 보지 못했다.
“…….”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틀림없는 자료들은 많이 낡아 있었고, 귀퉁이가 닳아있었다.
그중엔 최근 몇 년 사이에 기록된 것들도 있었고, 십 년, 이십 년을 묵은 기록들도 있었다.
카일은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며, 자신이 태어난 해에 수확한 포도로 담가 20년을 넘게 숙성시키고 있다는 와인을 떠올렸다.
들어간 정성만큼이나 깊은 풍미를 자랑하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향을 갖게 된다는 황실의 와인.
그것은 그의 혼인이 정해지고 황태자비를 맞으면 선물하기 위해 황실의 가장 숙련된 전문가들의 검수 하에 전통 있는 와이너리에서 정성스럽게 숙성시키고 있었다.
“…….”
황태자의 시선이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준비하여 지금 이날이 될 때까지 한 자, 한 자 전문가들의 손길로 써 내려간 선물에 닿았다.
황태자는 손을 들어 입가를 쓸어내렸다.
“…….”
이건 틀림없이 도움이 되는 정보일 것이다.
그가 찾던 것이었다.
그러나.
“…….”
저기선 잘 숙성된 와인의 향기가 날까, 검게 썩어서 상해 버린 값비싼 과일의 악취가 날까.
귄터 베인에게 동정심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펄 공작 부인이 아서를 주시하고 있지 않았다면, 어쩌면 이 기록의 대상이 아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카일은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방에 틀어박혔다.
아서에게 보여주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 내용을 봐야 했다.
카일은 그 자료들을 밤새도록 보다가 늦잠을 잤다.
그리고 날이 밝고서도 몇 시간 후.
문 앞에 찾아온 집사가 그를 깨워 아서와 크리스티나 부부가 황제 부부를 알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뭐?”
카일은 흠칫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 * *
황후가 측근 시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그네스 님께선, 교황 성하께?”
“네. 측근 시녀 몇 명만 데리고 조용히 이동하셨습니다. 제국을 위해 기도하러 가신다고요.”
황후가 미안하고도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인사도 못 드렸는데…….”
황제의 손위 누이이자 북부의 안주인, 교단의 성녀로서 교황청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펄 공작 부인 아그네스를 황후는 언제나 상냥하고 깍듯이 대해 주었다.
어쩌면 그녀는 황후가 유일하게 어려워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지금 교황은 황실의 행사를 위해 제국의 초청을 받아 친히 사제단을 이끌고 와 있었다.
그러나 황궁에서 머물지는 않았고, 황궁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수도 시어스의 사원에서 머물고 있었다.
황후가 고개를 숙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무척 감사한 일이네요. ……마침 나도 기도를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겸사겸사 찾아뵐까 봐.”
“…….”
벤 경의 일을 말하는 것을 안 시녀가 침묵했다.
신성력이 사라진 시대.
사제들은 세속화되고 신성 마법을 잃었지만, 교황만은 달랐다.
교황은 여전히 신의 계시를 받으며 신의 뜻을 대리하고 있다고 여겨졌고, 선제후 투표의 결과에 따라 제국의 황제를 최종 임명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수백 년에 걸쳐 마법이 사라지고, 신성력이 사라지고, 사제들이 실질적인 힘을 잃으며 사제와 교단의 권한은 많이 줄어들었다.
교단이 인정하는 성녀나 성자가 이제는 ‘교단 공로자’ 정도의 의미일 뿐 신성한 이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적지 않은 민중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여전히 그들이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고 있었다.
제국은 언제나 교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교단의 성녀이자 황제의 누이인 아그네스 펄 공작 부인의 존재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북부의 안주인으로 떠나고서도 황실의 일에 영향력을 갖는 이유였다.
황후의 시녀가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펄 공작 부인을 걱정하신다고, 만나 뵙고 인사드리고 싶어 하신다 말씀드렸습니다. 하나 펄 공작 부인께선 교황 성하와의 약속 때문에 지금은 시간을 내기 어려우시다고, 황후께서도 바쁘실 텐데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 하셨습니다. 곧 돌아올 테니 그때 만나자 하셨어요.”
황후가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아그네스 님은 역시 사려 깊으시다니까. 고마워요. 곧 돌아오신다는 건……. 교황 성하와 함께?”
“네. 황태자 전하의 선황제 추존 행사 때 교황 성하를 모시고 함께 나오실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누가 아그네스 님을 모셨지?”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알아볼까요?”
황후는 손을 저었다.
“아냐, 괜찮아. 황실에서 그런 식으로 살피는 거 공주님이던 때부터 불편해하셨어. 편하게 해 드려요. 지금은 나도 일정이 있으니…….”
마침 의장을 다 갖추고 복도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황제가 그들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황후가 생긋 웃으며 그의 곁에 가서 서며 시녀에게 이어서 말했다.
“사람들 들이지 말고요, 아. 혹시 황태자가 오거든 그건 굳이 막지 않아도 돼요. 인사하고 싶어할 수도 있겠네.”
황후가 황제에게 눈짓해 동의를 구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그럼.”
시녀가 황후와 황제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뒷걸음으로 물러갔다.
황제가 에스코트하기 위해 팔을 내밀었고, 황후가 가볍게 손을 얹어 팔짱을 꼈다.
궁정 하인이 정제된 목소리로 알렸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덜컹.
문지기 기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황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 * *
황궁 알현실.
자세를 낮추고 격식 있게 예를 표하는 자세로 아서와 레이나는 황제 부부를 맞이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격식을 갖춘 궁정 하인이 호령하고, 근위대 기사들을 이끌고 들어온 황제와 황후가 상석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둘은 고개를 들지 않고 예를 표했다.
윗사람이 먼저 허락하기 전까지는 알현하는 자는 먼저 입을 열 수도, 고개를 들 수도 없다.
“아서 실딘 로아스 줄리어스와 크리스티나 폰 데어 줄리어스가 황제 폐하를 배알합니다.”
황실 집사가 두루마리를 들고 격식을 갖추어 양쪽 모두 아는 사실을 소리 내어 읊었다.
“고개를 들라.”
황제의 부름에 아서가 경의를 표하며 인사했다.
“황제 폐하께 영광을.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레이나가 따라서 말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황제가 흠, 소리를 내고 슥 웃으며 말했다.
“그래. 오늘은 첫 만남이니 자네들도 공식적인 예의를 차리고 싶을 듯해 이리 만났으나, 앞으로는 편하게 만나도록 하지. 우리 제국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니.”
레이나는 조용히 긴장하며 마음속으로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황후가 다정한 음성으로 황제의 말을 받았다.
“좋은 말씀이네요. 아서 경, 레이디 크리스티나. 부담스러워 말고 앞으로 편히 만나요.”
아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황송합니다, 폐하.”
“…….”
아서의 평온한 목소리가 마음을 조금 진정시켜 주었다.
황후가 살갑게 웃으며 레이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개선식은 공식 절차로만 가득 차 있어서 인사를 제대로 나눌 기회가 없어 아쉬웠어요. 펄 공작 부인께서 마련해 준 저택에 머문다고 들었는데, 맞죠?”
레이나가 처음으로 대답했다.
“네, 폐하.”
황후가 미소 지었다.
“사실 황자궁 옆에 자리 준비해 두었거든요. 줄리어스 저택에는 기사들이 머물기 어려울 거고, 집을 마련할 시간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서. 황궁으로 오려나 했어요. 그럼 진작 인사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뭐예요.”
“…….”
황후의 음성은 온화하고, 미안해하는 듯했다.
“대모님께서 거처를 준비해 주셨을 거란 생각을 못했어요. 그래서 급히 따로 일정을 잡은 거예요. 늦게 불러 미안해요.”
레이나는 바짝 긴장했다.
대답 잘해야 해.
아서가 자연스럽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가당찮습니다. 폐하의 과분한 배려에 황송합니다.”
그들을 내려다보던 황제가 살짝 시선을 옮기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 애들 긴장하잖소.”
“어머. 그래요?”
황제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눈짓했다.
“‘그 얘기’부터 해 줘.”
황후가 입을 가리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소탈하게 등을 기대며 불쑥 말했다.
“폐하의 환영사 연설은 ‘아들들’이 맞아요. 그 환영사 저와 합의된 것도 맞고. 오히려 제가 제안했다고요.”
“…….”
“황실 소식지가 ‘아들’로 보도한 건, 괜히 내 눈치를 본 모양이야. 내가 직접 가서 정정하기도 했는데, 괜히 이래저래 엉뚱한 해석 남길 것 같아서 정정보도까지는 하지 않고 넘겼어요. 앞으로는 ‘아들들’로 나가긴 할 거예요. 서운하지는 않지요?”
아서가 대답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황공합니다.”
황후가 미소 짓고 사람들을 물렸다.
“……데뷔탕트에서 처음 보게 되는 것보다는 미리 한 번 만나 인사 나누면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불렀어요. 오늘은 첫 만남이니 격식 있는 인사, 받을게요. 다음부턴 너무 격식 차리지 말아요. 어려워할 필요 없어요. 레이디 크리스티나도.”
황후의 시선이 레이나에게 닿았다.
“―나를 너무 어려워 말고.”
“…….”
황후가 살갑게 말을 이어갔다.
“아서 경은 제국의 은인이기 앞서, 내 아들인 황태자의 생명의 은인이에요. 진심으로 고맙게 여기고 있어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황후는 소탈하게 웃었다.
“얼마나 카일 황태자가 아서 경에 대해 많은 말을 했는지 상상도 못 할 거예요. 그래선지 나 혼자서 이미 아는 사람처럼 아서 경이 가깝게 느껴지네요.”
황후는 거기까지 말하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렇죠?”
“음.”
황제는 희미하게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아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닮았군.”
“…….”
어떤 의미인지 모호했다.
황태자와 닮았다는 걸까? 아니면 자신과?
아니면……. 선황제와?
아서와 레이나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
황제의 모습을 보며 레이나는 자신이 아서의 아버지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배우였던 아서의 어머니를 외면했고, 태어난 아서 경을 보았지만 버렸던 사람.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하며 냉대하다, 아서 경이 오러를 가지고 있는 것을 깨닫고 불러들여 황태자의 전쟁을 지원할 도구로 썼다.
그럴 능력이 있어 후작가를 틀어쥘 수 있는 좋은 계약서를 만들어 주었지만, 관심은 갖지 않아 사기 결혼 따위가 벌어질 수 있도록 방관했다.
후작 내외조차 참석하지 않아 사제만이 주관한 혼인이 되었고, 황제는 몰랐다.
후작 내외는 그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며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고, 아서 경과 기사들은 부실 보급으로 고통받았다.
아서 경은 자신이 황제가 준 첫 임무에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없어 입을 꾹 닫았다.
“…….”
황제가 아서 경을 보호해 주는 사람이었다면, 부실 보급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을 때, 혼인이 잘못된 것을 알았을 때, 황제에게 말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밖에서 약간의 소음이 들리고, 알현실의 문이 조금 큰 소리를 내며 무도하게 열렸다.
“아이고.”
모습을 드러낸 황태자가 활짝 웃으며 손바닥을 짝, 마주치고 거침없이 다가왔다.
그리고 아서와 레이나의 곁에 서서 황제와 황후를 향해 몸을 돌렸다.
뒤이어 반쪽만 예절을 지킨 인사를 했다.
“저만 빼놓고 이렇게 오붓하게 만나시기예요?”
황후가 못 말린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미소 지었다.
“태자……. 조금이라도 예의 바르게 들어올 순 없었어요? 두 사람은 나름대로 우리를 만나려고 준비를 많이 하고 왔을 텐데.”
황후가 사람 좋게 레이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황태자가 저렇게 격의가 없어요. 미안해요. 그래도 황태자가 조금은 내 마음을 아네요. 안 그래도 그러고 싶었는데……. 어때요? 아버지와 아들들은 따로 이야기하게 두고. 우리끼리 따로 차나 마시겠어요?”
그리고 예쁘게 눈썹을 찡긋하며 눈짓했다.
“아무래도 내가 있는 게 아서 경한테 편하진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