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품 안의 자식
(179/210)
179. 품 안의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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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품 안의 자식
2023.05.18.
“유감입니다, 어머니.”
“…….”
아끼던 측근 기사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들은 황후 마리아가 잠시 눈을 감고 애도한 뒤 슬픔을 갈무리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요, 황태자. 소식을 전해 줘서. 태자도 놀랐을 텐데…….”
그리고 이내 손끝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다물더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너무 그대를 품 안의 자식 취급했군요. 험지에 나아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황태자인데. 나 때문에 사람들이 그대를 온실 속 화초라 여기는가 봐요.”
“…….”
그렇게 말하면서도 장성한 자식에게 그런 슬픔을 드러내고 의지하는 것을 낯설어 하는 듯, 조금 망설이다가 이내 웃는 모습에 황태자는 본능적으로 가슴이 아렸다.
황후의 여린 미소에 아끼는 측근을 잃은 슬픔이 남아 있었다.
황태자가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황후의 집무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이내 감정을 정리한 황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귄터 베인을 만났다고요?”
“……네.”
황후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태자를 번뇌하게 할 만한 말을 많이 했겠군요.”
“…….”
황후가 온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말해 보세요. 해명하지요. 그가 나에 대해 무어라 했나요?”
“…….”
황태자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살리아어로 저를 ‘형제’라 부르기는 했습니다.”
“…….”
카일은 황후의 반응을 살피지 않은 채 담담하게 쭉 이어 말했다.
“벤 경이 죽은 이유는 어머니께 여쭤보라더군요. 자신이 폐하의 또 다른 사생아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고, 황후 폐하를 원망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
황후가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황후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황후의 곧은 자세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무거운 드레스 트레인이 커튼처럼 늘어져 바닥을 스쳤다.
황후가 카일에게 뒷모습을 보인 채 책상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내가 그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의심해서, 망설이다가 나를 이제야 찾아온 건가요?”
“…….”
황후는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태자는 황제가 될 사람인데. 신중하고 의심이 많은 것은 흠이 아닙니다. 그대가 마음 여린 것만이 나의 유일한 근심이었으니.”
“그렇다기보다는.”
황태자가 잠시 틈을 두고 말했다.
“어머니가 혹시라도 그러셨을 것을 대비해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아서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고요.”
“…….”
황후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황태자 카일이 말을 이었다.
“……제가 즉시 어머니께 달려와 그게 정말이냐며 사실을 확인했다면, 저의 모습에 실망하셨겠죠. 이제 그런 어린애는 아닙니다.”
“…….”
카일이 황후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께서 저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셨던 걸 압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가 그것을 알고 어머니를 보호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고, 어머니를 사랑하니…….”
“…….”
카일이 말을 맺었다.
“그만하셔도 됩니다.”
“…….”
황후 마리아가 아들에 대한 사랑과 정치인으로서의 노곤함과 감동이 모두 담겨 있는 미소를 지었다.
무어라 정의할 수 없었지만, 황태자 카일에 대한 애정만큼은 의심할 수 없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황태자를 향해 황후가 팔을 벌렸다.
“카일.”
카일이 다가가 자신의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
황후는 카일을 꼬옥 안아 주었다가 놓고는 그의 팔에 손을 얹은 채 올려다보았다.
“귄터의 아내의 죽음에 대해 조사했겠군요. 그렇죠?”
“…….”
“태자.”
“…….”
황후가 그를 마주 보며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와, 그의 아내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
예상한 대답이었다.
카일은 묵묵히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황후는 아들이 믿지 않음을 알았다.
그러나 실망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채, 황후는 그를 마주 보며 다시 말했다.
“오러에 대해 알고 싶어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 이상 무슨 짓은 하지 않았어요.”
황후는 말을 이었다.
“그가 신뢰했던 사람이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접근했다면 배신감을 느낄 순 있었겠죠. 하지만 난 그들이 그를 진심으로 돕게 했고, 그것이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
황후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서랍을 열쇠로 열었다.
“난 오러 때문에 내 자식에게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치명적인 문제였지요. 아마 이제는 태자, 그대도 알게 되었겠죠? 반려를 잃었을 때 생길 수 있는 오러의 부작용 말이에요.”
“…….”
“하지만 나는 이미 그대를 품고 있었고, 난 그대를 보호할 방법을 강구해야 했어요.”
황후의 손이 서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오러 능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확률은 낮다지만, 오러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그대도 알고 있죠.”
“…….”
“그대에게 오러를 익히지 않게 하는 것으로 임시방편을 해 두었지만, 내가 그것으로 안심할 수 없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을 거예요. 내 아들에게 문제가 발생한다면 이미 확률이 높고 낮은 건 의미가 없으니까.”
황후는 서랍 안에서 묵직한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쿵.
묵직한 소리를 내며 그것이 책상 위에 놓였다.
“난 오러에 대해 알아야 했어요. ”
“…….”
황후는 책상 위에 서류철을 내려놓고, 다음 서랍에서 또 다른 두꺼운 서류철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다른 나라에 있는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요. 귄터 베인. 내가 그의 존재를 알았을 때 황제 폐하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것 같은가요? 아니, 반가웠어요.”
“…….”
“마침 나의 아들보다 충분히 나이가 많았고, 그에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거든.”
“…….”
쿵.
책상 위에 두 번째 서류철이 놓였다.
황후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해결사 길드에서 꽤 높게 쳐주는 용병이었고 살리아 군의 일도 꽤 많이 다뤘기 때문에, 근처에 부관 한 명만 붙여놓는다면 오러를 어떻게 쓰는지, 문제가 생긴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황후는 안쪽 책장에서도 몇 개의 보고서 묶음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쿵. 쿵.
세 개, 네 개.
황후가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은 보고서들이 순식간에 산처럼 쌓여갔다.
“그래서 그 사람의 곁에 보좌관이 되어 줄 만한 사람을 보내 그를 돕게 하고, 신뢰를 얻게 하고, 오러에 대한 정보를 얻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에 대한 보고를 받았어요. 그뿐이에요.”
“…….”
황후가 서류에서 눈을 들어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내가 죽은 건 불행한 사고였어요. 난 관여하지 않았어요.”
“…….”
“오히려 원망하고 싶은 건 나예요. 그에게 기껏 아끼던 사람들을 보내 마음을 다하게 해 주었는데, 전부 죽여 버리다니.”
“…….”
황후가 고개를 돌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리석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불쌍한 사람이라고도 생각한답니다. 자길 진심으로 아껴 준 사람들을 제 손으로 죽였으니…….”
“…….”
황후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친 사람이에요. 카일.”
“…….”
황후가 피로한 듯 손을 들어 눈을 문질렀다.
“내가 보낸 사람들은 오러에 대해 알게 된 정보를 내게 전해 준 것 외엔, 그저 그를 충실하게 보좌하고 아껴 주었을 뿐이었어요. 오히려, 내 부관들의 도움을 받았기에 그는 일개 용병에서 길드장이 되기까지 했지.”
“…….”
“심지어 내가 보낸 그 부관은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내게 고백했어요. 제국의 황후인 내게, 그의 곁에 남고 싶다고, 살리아로 망명하여 그와 혼인해 살고 싶다고, 그를 구하게 해 달라고 허락을 구하면서 말이야.”
“…….”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
황후가 어깨의 숄을 추슬러 올렸다.
“허락했어요. 모든 걸 비밀로 한다는 조건으로.”
“…….”
황후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후에 그녀가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
황후가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백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거나, 뭔가 좋지 않은 방식으로 들킨 모양이에요. 뒤늦게 모든 걸 알게 된 귄터 베인은, 그녀가 자기 아내를 죽였다고 오해하고, 그녀를 포함해 내 사람들을 모두 색출해 죽였어요. 그의 ‘오러’로.”
“…….”
“그의 아이를 갖기까지 했던 부관을 제 손으로 죽이고서 날 조롱했죠. 내가 내 아내를 죽인 여자라는 걸 알고도 그 여자를 계속 곁에 둘 줄 알았냐면서.”
“…….”
황후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이제는 날 오랫동안 보좌해 준 벤 경까지 그의 손에 잃었군요.”
“…….”
황후가 책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게 그 기록들이에요.”
“…….”
책상 위엔 적지 않은 양의 기록이 놓여 있었다.
황후는 고개를 들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 사고’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태자가 나를 보러 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 테고, 태자의 얼굴이 이리 굳어 있는 것이겠지요?”
“…….”
“그의 첫 번째 아내는 사고사였어요. 하지만 귄터 베인은 내가 보낸 사람이 ‘오러’에 대해 알기 위해 그 아내를 죽였다고 오해하고 있는 듯하더군요. 그리고 어쩌면 내 아들 역시…….”
“…….”
“―그리 생각하는 것 같고.”
황후가 굳은 입매를 끌어올려 미소 비슷한 것을 지었다.
“태자. 내가 그렇게까지 했을 것 같은가요?”
“…….”
“오러의 반려가 죽으면, 그다음의 반려가 그 부작용을 막아 줄 수 있는지 어떤지 알기 위해…….”
“…….”
“그를 유혹할 여자를 보내고, 신뢰를 얻은 뒤 그의 반려를 죽이고.”
“…….”
황후가 말을 이어갔다.
“그다음 여자와 계획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결혼을 시켜보고, 아이를 갖게 만들어 보고, 오러의 반려를 바꿔 보길 시도하고……. 그가 살아남나 아닌가 살펴보고.”
“…….”
“아무리 적국 사람이어도, 아무리 내 남편의 사생아여도, 황제의 아들에게.”
“…….”
“내가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시 겨우 열 살도 되지 않았던 아들을 위해서?”
“…….”
“그게 가능할 것 같아요?”
그리고 황후는 자료들이 쌓인 책상에 손을 짚은 채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대에게 줄게요. 아서를 위해 써도 좋아요.”
“…….”
“어차피 그대 자신을 위해 쓰라고 언젠가 주려 했던 것이니.”
“…….”
카일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굳은 채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황후가 결백을 주장할 것은 예상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이 흔들릴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황후가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대가 더 이상 내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는 걸 이렇게 느끼네요. 나를 지키는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전우를 지키고 싶다는데, 내가 어찌 그대의 기대를 저버릴까요.”
“……어머니.”
“그대에게 아서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대가 자기 사람을 지키는 데에 얼마나 열정적인지도 잘 알았어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황후가 담담하게 서류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내가 이미 그를 태자의 아군으로 생각한다는 증명으로 한 가지 더, 아서를 위한 정보를 줄게요.”
“……아서를 위한 정보요?”
“아서가 경계할 것은 내가 아니라 후작 부인 마틸다예요. 마틸다가 그에게 자객을 보냈어요.”
“…….”
황후가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고 그냥 다치기만 바랐다는데. 글쎄. 그대와 아서의 판단에 맡기지요.”
“…….”
황후가 웃었다.
“카일. 그대는 그게 나의 짓이라 생각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