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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줄리어스와 당신 (178/210)


#178. 줄리어스와 당신
2023.05.14.


‘줄리어스’는 나름대로 역사가 있는 작위를 지닌 귀족가이다.

그러나 역사가 있는 고위 귀족임에도 줄리어스가 사교계에서 오랫동안 ‘상인 가문’으로 인식되었던 이유는, 줄리어스에서 처음으로 작위를 받은 것이 ‘율리아나’라는 이름의 여성이었고 그 남편은 작위가 없는 상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율리아나 줄리어스는 그 자신의 이름을 딴 작위를 왕에게 친히 하사받을 정도의 인물이었지만, 귀족들은 율리아나 줄리어스의 가문을 ‘상인 가문’으로 인식했다.

율리아나 줄리어스는 그것을 개의치 않았고, 그녀는 귀족들에게 받아들여지려 애쓰는 대신 비옥한 영토와 실리적인 감각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했다.

율리아나 줄리어스의 사후, 그녀의 작위와 줄리어스의 영토는 하나뿐인 자식이었던 아들에게 물려졌고, 사람들은 상인 출신 아버지를 두고 큰 사업을 하는 ‘줄리어스’를 더욱 귀족의 일에 관심이 없는 상인 가문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그 사이 왕이 바뀌었다.

왕국과 몇 개의 제후국이 동맹으로 합쳐져 제국이 되고, 이전 왕가의 명맥은 끊겼다.

왕과 비슷한 권리를 가진 제후들이 동맹으로 나라를 합치고 선제후가 되며 황제를 선제후들 사이의 투표로 결정하는 규칙이 생겼다.

충성하던 왕가가 사라진 ‘줄리어스’는 새로운 권력자와 적당한 타협을 해내 영주의 특권과 작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다른 귀족 가문들이 형제 싸움이 나 조각나거나 영지전이 벌어져 갈아치워지는 사이, 손이 귀해서 계승 싸움도 일어나지 않은 줄리어스는 상업에 몰두하고 주변 제후들과 협상하며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다.

불패의 방패이자 명예로운 기사 가문인 딜로아 변경백령을 인접하고 있는 천혜의 입지는 영지전을 피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전쟁의 피해를 받을 가능성이 높지 않은 입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줄리어스로서는 실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지만, 명예에 목숨을 거는 귀족들 사이에서 고고하고 귀족적인 가문이라는 평가는 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희대의 가주 로널드 줄리어스가 ‘선제후’의 권력에 눈독을 들이게 된다.

그가 바로 지금 귀족들이 인식하고 있는 줄리어스의 이미지를 대부분 형성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율리아나 줄리어스를 잊었지만, 기록은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

초대 가주 율리아나 줄리어스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레이나 역시 최근 들어 줄리어스 가문의 역사와 정치를 집중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면서야 알게 된 내용이었다.

옛날 사람이기도 하고, 명예를 따지는 귀족이라면 모르지만 줄리어스는 초대 가주의 존재를 그렇게 강조하지도, 언급하지도 않았으니까.

율리아나 줄리어스…….

후작 부인은 가문 바깥에서 자란 딸에게 가장 ‘줄리어스’다운 이름을 다시 준다는 의미로 그 이름을 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레이나는 크리스티나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건 마님이 아닌 크리스티나 자신의 뜻일 것이다.

아가씨는 그 이름을 갖겠다고 한 데에는 무슨 뜻이 있을까.

그리고 나한테 그걸 그렇게 말한 이유는 뭘까.

줄리어스의 정통성이 내게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두라는 의미일까?

아가씨는 줄리어스를…….

똑똑.

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레이나는 그를 보고 웃었다.


“…….”

그리고 말로 하는 인사 대신 조용히 팔을 벌렸다.

피식 웃으며 다가온 아서가 레이나를 폭 품에 안았다.

한겨울 바깥 공기의 서늘함이 그의 옷깃에 남아 있다.

서둘러 왔는지 심장이 뛰었다.

레이나가 빈틈없이 그를 마주 안아주며 웃었다.


“다녀왔어요?”

“응.”

긴 한숨처럼 내쉬는 목소리에 비로소 당신의 곁이라는 안온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가 늘 도착하자마자 저를 제일 먼저 보러 온다는 걸 안다.

레이나가 행복하면서도 안타까워 그의 등을 쓸었다.


“너무 늦게 끝나네요. 당신 너무 바쁘다.”

“그러게……. 당신 볼 시간이 모자라네.”

아서는 개선식 이후, 전쟁의 결과를 정리해 보고하고 군인들을 참전 용사 재단으로 재편하는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소개받을 사람도 많을 것이고 자신에 대한 일도 있을 것이고.

황태자도 도와주어야 하며, 황실와 관련된 일도 처리해야 할 것이다.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곳에도 많은 일이 있겠지.


“힘들죠.”

“겨우 이런 게 뭐 힘들겠어. 당신 못 보는 게 힘들지.”

아서가 웃었다.


“그래도 이제 대충 다 정해졌어. 내일 황실 보도로 알현 일정 나갈 거야.”

“이제 진짜 데뷔탕트네요.”

“응.”

아서가 레이나의 머리에 쪽 입 맞추며 그녀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그 전에 두 분 폐하께서 당신 한 번 같이 보자고 하시네.”

“…….”

올 것이 왔구나.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케이가 언질을 해 두긴 했다.

오래 준비했더니 긴장되지 않았다.


“네. 잘 준비할게요.”

“내가 옆에 있을게.”

레이나가 그의 손을 잡고 웃었다.


“당연하죠. 당신만 믿고 있을 거라구요.”

아서가 앞으로 예정된 일정을 말해 주었다.

알현, 미사, 또 알현, 또 미사.

데뷔탕트를 겸한 신년제.

그리고 황태자가 주관하는 행사 한 번.

그 사이 자선 행사 두 번.

황태자의 발표로 선황 폐하를 ‘알렉산더 대제’로 추존하면서 이번 전쟁 공로자들은 작위를 수여받을 것이다.

그러면 사교 시즌이 끝난다.

그동안 레이나는 반드시 가야 하는 행사에서는 완벽하게 크리스티나로서 아서의 아내 역할을 수행하고, 가문 내부의 일을 핑계로 빠질 수 있는 행사에서는 최대한 몸을 사릴 것이다.

그 모든 일이 무사히 끝나면 아서는 레이나와 함께 조용히 자신의 영지로 가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아서.”

“응.”

“당신은 줄리어스의 이름으로 전쟁에 다녀와서 줄리어스에게 명예를 안겨 준 대가로 후작 가문에 절반의 권리를 가지고 있잖아요.”

“응.”

레이나가 그를 보며 물었다.


“하지만 저의 일을 평화롭게 처리하는 조건으로 암묵적으로 줄리어스에는 많은 간섭을 하지 않고 멀어지기로 한 건가요?”

“…….”

아서가 레이나의 얼굴을 만지며 물었다.


“무슨 생각 중?”

레이나가 아서를 보며 대답했다.


“제가 잘못된 욕심을 냈나 하는 중.”

“나를?”

“……네.”

아서가 웃는다.

그리고 레이나의 손을 들어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레이나는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말했다.


“……유혹하지 마세요. 대답 들을 거예요.”

“이런.”

레이나가 손으로 아서의 뺨을 쓸었다.


“당신이 줄리어스와 저를 맞바꾼 건가 해서요. 솔직하게 말해 줘요. 줄리어스에서 손 떼기로 한 거예요?”

“음……. 왜 그런 생각을 했어?”

레이나는 아서에게 크리스티나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녀가 바꾼 이름이 줄리어스 가문의 초대 가주의 이름이라는 것도.

아서는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율리아나는 줄리어스와 유래가 같은 이름이거든요. 그리고 제 이름은 평민 같은 이름이니까…….”

“……평민 같은 이름?”

아서가 잠시 레이나의 눈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 이름은 여왕이라는 뜻도 있어. 한때 왕비의 이름이기도 했고.”

레이나가 작게 웃었다.


“하지만 제 이름은 그 뜻이 아닌걸요.”

“어떻게 알아?”

어린 나이부터 일을 시작했던 레이나를 안타까워하며, 비 오는 날이면 할머니가 한탄하는 듯이 말했었다.


「네 어미가 네 이름을 잘못 지었어.」


「네 삶이 척척한 게 이름 때문인 것 같다.」


「비가 뭐니, 비가.」

 
그럼 레이나는 웃으며 말했었다.


「왜요? 저는 촉촉한 이름이라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제 엄마는 비(Rain)라는 뜻으로 지어 주셨을 거예요. 평민은 평범한 이름을 지어야 오래 산다고들 하잖아요. 그리고 저는 제 이름 좋아했어요.”

아서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당신 이름 좋아해. 당신이랑 어울려.”

“…….”

레이나가 좀 쑥스러워져서 웃었다.


“어쨌든, 아서.”

레이나는 아서의 손을 잡았다.


“크리스티나 아가씨랑 잘 지내고 싶지만, 아가씨가 그 이름을 고른 건 왠지 신경 쓰여요.”

레이나가 아서를 바라보았다.


“저는 당신 것이니까 줄리어스가 만신창이가 되지 않았으면 했던 거예요.”

“…….”

“저 때문에 당신이 이룬 결과를 포기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나 때문에 줄리어스에서 사실상 손을 떼게 된 건가 해서. 당신 권리를 나 때문에 잃게 되거나 하면 그건…….”

아서는 다정하게 웃으며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며 ‘줄리어스는 당신 것’보다 ‘저는 당신 것’이라는 말인 줄 알았을 때, 그 말이 더 듣기 좋았다고 생각했다.


“내 권리는 그대로야. 포기한 건 없어. 무엇보다 당신이 여기 있잖아.”

“…….”

레이나가 언제나처럼 머쓱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된 순간, 아서는 고개를 숙여 짧게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손등으로 입술을 가린 레이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움찔하고 움츠린 뒤, 어쩔 줄 모르고 녹아내린 표정이 사랑스럽다.

아서는 불쑥 물었다.


“그보다 당신은, 당신 이름이나 줄리어스를 되찾고 싶진 않아?”

“……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도 한 적 없기에 되찾는다는 말은 와닿지 않는 듯하다.


“…….”

아서는 잠시 조용히 레이나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평화는 지금의 선택일 뿐이야. 하지만 당신이 걱정하는 것 같아서 말해 두자면……. 난 그 어디에서도 손은 떼지 않았어.”

그리고 다정하게 레이나의 머리를 쓸었다.


“부인, 레이나.”

“…….”

“당신이 줄리어스에 대한 내 권리를 내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건 알아. 하지만 황실의 계약서……. 난 지금은 그걸 별로 개의치 않아. 물론 한때는 그게 인생의 전부였던 적도 있었지. 하지만.”

“…….”

아서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 나한텐 황실의 혼인 계약서보다 당신이랑 쓴 계약서가 더 유의미해.”

레이나가 조금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저랑 쓴 계약서요?”

아서가 웃는 얼굴로 레이나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손 안에 무언가를 슥 밀어 넣어 주었다.

그의 입매에 조금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

레이나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손에 넣어 준 건 10골드짜리 금화 세 개였다…….


“아니……. 이걸 준비해 온 거예요?”

아서가 어깨를 으쓱했다.


“항상 갖고 있지.”

“대체 왜……. 저한테 주급 주시려구요?”

“꼭 그렇다기보단 나한텐 이보다 나아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 금액이라.”

“네에?”

영문을 모르면서도 레이나는 그가 웃겨서 웃었다.

대체 왜 그렇게 삼십 골드에 집착하는 거야.


“…….”

아서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줄리어스에 대해선 내 권리보단 당신 권리를 생각했으면 좋겠어. 당신 자신을 더 생각했으면 좋겠고. 그러니까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해. 어떤 식으로 상황이 바뀌든, 난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고, 당신과의 약속을 최우선으로 지킬 거야.”

아서가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레이나가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당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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