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 레이디 (176/210)


#176. 레이디
2023.05.07.


대화를 나눈 뒤.

레이나는 바라던 대로 황태자와 독대했다.

아서의 불편한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걸 느끼며, 황태자는 레이나가 뭘 물으려고 저와 독대를 청했을까 궁금해서 제법 마음이 설레었다.

레이나는 황태자가 독대를 허락해 준 것에 대하여 정중하게 예의를 표한 후.

아서 경이 불편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알려주지 않으셔도 된다며, 다만 아서 경이 자신에게 말해 주지 않는데 자신이 그를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걸 듣고 싶다고, 자신이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물었다.

레이나의 태도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우면서도 확고해서, 황태자는 새삼스레 대답을 고르며 신중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듣기를 원하지 않을 만한 언급은 하지 않기 위해, 레이나의 말대로 아서가 신경 쓸 만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레이나가 왜 ‘꼭 필요한 것’ 외에 다른 것은 듣지 않고 싶다고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

황태자는 조금 자세를 바꾸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불분명한 선에서라도 자신이 아는 것과 조사 중인 것을 최대한 대답해 주었다.

레이나는 그의 대답을 듣고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황태자에게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러나 황실에 대해 좀 더 물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걸 자신이 황태자에게 듣는다면 아서가 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레이디는 아서를 많이 아끼고 염려하는 것에 비해 묻는 것은 많지 않네요.”

그렇게 이야기하자 그녀는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제 궁금증을 푸는 것보다는 아서 경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아서요…….”

독대가 끝난 후, 레이나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제가 이미 한 번 황태자 전하의 신의를 크게 배반했는데도 저를 아서 경의 곁에 있을 사람으로 인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레이디는 아서의 아내이니 나에게 지킬 신의보다는 아서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아서에게 좋은 아내이면 내게도 좋은 사람이고, 그렇다면 나는 형제의 아내에게 보내 마땅한 최선의 존중과 지지를 보낼 겁니다.”

“…….”

레이나가 조금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처음으로 ‘황태자에게 보내는 예의’를 넘어서 진심으로 미소 짓는 것 같았다.

* * *

아서와 레이나, 케이가 떠나는 카일 황태자를 배웅했다.


“데뷔탕트는 ‘두 레이디’ 모두 나오는 건가?”

아서가 짧게 끄덕였다.


“네. 필요한 일정 끝나고 나면 아내가 이런 자리가 어려울 여동생을 핑계 삼아 빨리 일어날 예정입니다. 저는 아내의 예쁜 마음 씀씀이에 동의하며 함께 에스코트해 일어날 거고요.”

“흠. 그래. 적당하네. 줄리어스 후작 영애 쪽은 집에서 칩거하고 있어? 별다른 수상한 낌새는 없고?”

“네. 가끔 아내를 보러 옵니다. 그 외에는 딱히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다.”

카일이 우려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 레이디의 얼굴을 잘 아는 사교계 인사는 거의 없다고 했지?”

“네. 성격을 금방 드러내는 타입이라, 후작이 결혼 시장에서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고 숨겨두었다더군요.”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놀라운 미인으로 회자되는 아가씨라는 것은 황태자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서에게 ‘네 아내가 그렇게 미인이라며? 너는 봤겠네?’ 물은 적도 있었다.

그때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지금은 이유를 알지만.

베일을 쓰고 어렴풋이만 얼굴을 보이고 자리를 뜨거나 멀리서만 모습을 드러내는데도 사교계를 평정한 미인이라니 신기할 만하긴 했다.


“후작 영애를 가까이서 자세히 보거나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 본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

레이나가 살짝 아서에게 눈짓하자 아서가 썩 동의는 안 되지만 아내가 그렇다고 하니 말한다는 듯이 말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실제로 닮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하네요. 화장 기술이 좋은 시녀가 붙어 있다고도 합니다. 둘을 최대한 비슷하게 보이도록 꾸밀 거라더군요.”

아하. 그래야 그쪽도 ‘레이디 크리스티나’만큼 가치가 올라갈 테니까…….


‘영악하네. 겁도 없고.’

그런 놈들이 사업가로 성공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카일은 내색하지 않고 대충 끄덕였다.


“알았어.”

줄리어스의 두 레이디라.

데뷔탕트에서 꽤 주목을 받겠는데.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해.”

“네. 아마 없을 겁니다.”

“레이디도요.”

카일이 레이나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레이나도 이미 레이디에게 하는 통상적인 인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그의 손등 입맞춤을 받았다.

아서가 찌푸렸다.


“그거 꼭 해야 합니까?”

“익숙해져, 좀. 표정 관리 연습도 좀 하고.”

“…….”

레이나가 웃으며 아서의 팔짱을 꼈다.

레이나가 팔짱을 끼고 옆에서 올려다보자 아서의 얼굴이 금방 풀어졌다.

어우. 독하다.

케이는 아무것도 못 본 얼굴로 황태자만 쳐다보았다.

네가 고생이 많다.

* * *



“새벽 별빛이 절벽 위의 꽃에 취했네요.”

나이 지긋한 귀부인들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귀족어였다.

<아서 경이 레이디 크리스티나한테 푹 빠졌다면서요?>


“오랜 밤을 지나왔으니 오죽할까요. 하늘도 잠시 공전을 멈출 만하지요.”

역시 귀족어였다. 해석은 다음과 같다.

<줄리어스에서도 엄청났대요. 오 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렇게 쉰 적이 없는 아서 경이 이틀 동안 침실에서 안 나왔던 건 처음이라나. 지금도 그렇잖아요.>

질투 많은 한 귀부인은 부채로 입을 가렸다.


“모르죠. 둘 사이의 일이야. 쇼윈도 부부가 얼마나 많은가요. 아서 경과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뭐 오래된 부부라고 그렇게 정이 쌓였겠어요?”

그러나 워낙 많은 목격담이 있었기에 이내 부정되었다.


“개선식에서도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피곤해하니 아서 경이 손수 안고 저택으로 들어갔다던데?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다더라구요.”

사교계에선 아서가 아내인 레이디 크리스티나에게 완전히 사로잡혔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멋지다고 환호하고 부러워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시기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들 역시 섞여 있기 마련이었다.

* * *

상단 루모스의 수도 본점.

루모스 상단주의 딸, 레이디 에리카는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입으며 몇 번이고 들추어 보던 신문을 다시 내려놓았다.

앳된 얼굴에 상심한 빛이 어렸다.

에리카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서 경’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 것까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하지만 그 상대가…….

레이디 크리스티나라니…….

에리카는 그 옛날, 그녀를 마주쳤을 때 느꼈던 굴욕감을 떠올리고 치를 떨었다.

도도하고 아름다운데다 절개까지 훌륭한 절벽 위의 꽃이라고?

에리카는 탁 코웃음을 쳤다.


“……그냥 성격 나쁜 여자를 그럴싸하게 포장했을 뿐이면서.”

그녀는 짜증이 나서 이를 뿌득 갈았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에리카는 아서와 크리스티나를 모두 만난 적이 있었다.

6년 전쯤인가. 7년 전쯤인가.

크리스티나는 상단을 따라 줄리어스에 갔을 때 만났고, 아서는 아버지를 따라 로아스에 갔을 때 만났다.

만나게 된 시기와 계기는 비슷했지만 경험은 아주 달랐다.

크리스티나와 마주쳤던 기억은 대도시 ‘줄리어스’의 신문물에 부푼 기대를 안고 찾아갔다가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추억으로 마무리되었고,

로아스 자작령에서 아서를 만났던 기억은 세상에 이런 시골은 처음 본다고 투덜대며 시작되었다가 그녀가 가장 자주 생각하는 마을이 로아스가 되며 마무리되었다.

그를 본 이후로 아무리 잘생겼다는 사람을 만나 봐도 에리카에겐 미남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엔 로아스에서 아서를 본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아스에 방문했을 때.

그다지 달갑지 않은 촌구석의 무도회지만, 방문객으로서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참석했던 무도회에서 에리카는 아서를 처음으로 보았다.

그는 에리카가 태어나서 본 사람 중 가장 잘생긴 사람이었다.

무도회에서 신사가 다가가는 게 아니라 레이디가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에리카였음에도, 그녀는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벽에 서서 무도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걸려고 하니 아버지가 눈치를 주며 말렸다.


‘저 녀석이 그 녀석이다. 말 걸지 말거라.’

‘……그 녀석이요?’

아버지가 더욱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황제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도는…….’

‘아…….’

에리카는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포기했다.

황제가 인정하지 않는 사생아라는 건, 그의 존재가 황제 폐하에게 썩 기분 좋지 않다는 뜻이다.

심지어 사교계를 꽉 잡고 있는 황후에게까지 밉보일 일이었다.

황제와 황후한테 어떻게 보이려고 이렇게 사람들의 눈이 많은 곳에서 그와 대화를 나눈단 말인가.

‘루모스’가 적당한 작위를 하나 사서 가지고는 있었지만, 귀족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황실이나 사교계에서 문제가 될 만한 일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어 보지 못하고 그렇게 바라만 보다가 끝이 났지만, 에리카는 그 후로 오랫동안 로아스를 생각하며 신분 차이가 있는 로맨스에 대한 고민을 했더랬다.

그리고, 아서의 출정 이후.

그가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엄청난 공훈을 세우기 시작하며 에리카는 급기야 혼자만의 상사병에 빠져 앓았다.

그때 아서 경이 나를 쳐다봤던 것 같은데…….

날 기억하고 있을까?

줄리어스만큼은 아니지만 우리집도 작위가 있는데.

아버지와 오빠가 조금만 더 열심히 살았더라면…….

아니야, 아니야. 가문보다는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혹시라도, 내가 적극적이었더라면 어쩌면…….

상대가 크리스티나라는 걸 알고 보니 더욱 분했다.

그런 여자보다는 내가 훨씬 나은데.

상식적이고, 성실하고, 성격도 좋다.

사업 감각도 있어 그런 여자보다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겨우 그런 여자가 결혼할 수 있을 정도였으면 나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사교계 최고의 미모라는 건 순 거품이라고.

심지어 부실 보급 의혹이라니.

줄리어스라면 그러고도 남지.

안타까워라…….

차라리 나와 약혼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나라면 아서 경을 위해 책임을 다했을 테니까…….

가문의 이름을 걸고 출정한 사령관에게 부실 보급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혹시 돌아오면 파혼하지 않을까?

아서 경이 파혼을 한다면…….

바깥에서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루모스에서 구해 주실 수 있다고 해서 여기만 믿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못 구한다고 하면 어떡해요!”

상단 루모스를 찾은 귀부인의 분노한 불평에 종업원이 연신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못 구해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데뷔탕트까지는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으니 그 때까지 구하지 못한다면 저희가 지불하는 위약금을 안내해 드린 것으로…….”

“아니, 데뷔탕트까지 구하지 못하면 못 구하는 거나 다름없지! 그때 쓰려고 주문하는 거잖아요!”

귀부인 옆의 아가씨가 얼굴이 빨개서 빽 소리를 질렀다.


“주문을 지난주에 넣어 주셨는데, 저희가 주문을 받을 때부터 구하지 못할 경우의 안내는 계속 나가고 있었습니다만…….”

“그때는 구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잖아요!”

“…….”

에리카는 시녀에게 눈짓을 해 문을 닫게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서가 레이디 크리스티나와 세기의 사랑에 빠져 있다는 소문에 비례해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물건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그중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것은 진주 귀걸이와 드레스였다.

귀걸이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크기의 큼직한 물방울 진주라는 것이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 것인지 여러 차례 소식지와 신문 보도에서도 다루어졌기에 모두가 워낙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비슷한 것을 구하고 싶은 사람들의 수요는 끝이 없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고고함과 우아함을 연상시키고, 진흙 속에 파묻혀 있다가 진가를 드러낸다는 상징성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다.

지금 진주의 인기는 역사상 최고로 올라와 있었다.

똑같은 것은 구할 수 없지만, 그것을 흉내냈다는 말은 듣지 않으면서도 비슷하게 고급스러운 우아한 레이디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물건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보석상과 드레스샵에 몰려들었다.

그중에서도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주문을 독점하고 있는 상단이라고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루모스는 엄청난 주문량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독점 상단이라는 것도 거짓말 아니에요? 줄리어스를 상대로도 일 이런 식으로 해요?”

“…….”

바깥에서 루모스의 종업원이 쩔쩔매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에리카는 속이 상해서 홱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디 크리스티나…….

아서 경이랑 세기의 사랑에 빠졌다고?

분명 거짓말이 틀림없어.

최소한 자기가 본 레이디 크리스티나는 그럴 만한 인물이 못되었다.

아니면 엄청난 가면을 쓰고 있는 거겠지.

아서 경은 괴로운데도 황실이 주선한 혼인이니 어쩔 수 없이 내색하지 못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 여자랑 결혼하다니, 아서 경은 얼마나 불행할까.

에리카는 거울 앞에 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

데뷔탕트에서 꼭 내 눈으로 확인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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