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 형제 (175/210)


#175. 형제
2023.05.04.



“비밀로 해 달라고 해도 안 들어 주시겠죠.”

“응.”

아서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알겠습니다. 그 사람한테는 제가 말하겠습니다. 나 때문에 당신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다른 사람한테 듣게 하기는 좀 그렇네요.”

“……그래.”

아서가 다시 카일을 바라보았다.


“반려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봐 주실 수 있습니까?”

“반려에 대해서?”

“네. 선황후 폐하의 일은 유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러가 반려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증거는 안 되는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신경 쓰입니다.”

“…….”

“시력이 나아져서 오러를 쓸 필요가 없어진 것도 있지만, 사실 오러 때문에 그 사람 몸이 안 좋은 건가 싶어서 근래는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황태자는 그제서야 아서가 시력 대신으로 항상 사용하던 오러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오러에 의존하지 말라고, 나쁜 버릇이라고 말해 주기도 했고.”

“…….”

카일이 피식 웃었다.

아서가 따라 웃은 뒤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제게 있는 위험이야 제게 닥쳐올 테니 제가 관리하면 되고, 그 사람에게 닥치는 위험도 제가 알 수 있다면 오러를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오러를 쓰지 않은 이후로 시력이 더 좋아지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도 혹시 필요할 땐 우선순위를 알고 움직여야 하니.”

아서가 카일을 바라보며 잠시 틈을 두었다.


“오러가 그 사람한테 해롭지 않다는 확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아내기 어려운 정보라서요.”

“…….”

카일이 아서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아서가 카일에게 선을 긋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카일에게 부탁할 때, 언제나 아서에겐 특유의 가볍지 않은 태도가 있었다.

전쟁 초기, 줄리어스의 병사들이 부실 보급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언제나 카일에게 거리를 두고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던 아서가 카일을 찾아와 처음으로 굳은 얼굴로 부탁을 했던 때가 떠올랐다.


“…….”

카일은 어려운 내색하지 않고 흔쾌히 끄덕였다.


“그래. 최대한 알아볼게. 그리고 너도 왕의 서고에 접근할 수 있도록 추진해 볼게. 아무래도 네가 직접 보고 싶기도 할 테니.”

아서가 좀 질색하는 얼굴로 찌푸렸다.


“아뇨, 그건 괜찮습니다. 월권이죠. 그 말을 들으실 황후 폐하의 얼굴을 상상하고 싶지 않습니다.”

“…….”

아마 얼굴은 자애롭게 웃으실 것이다.

하지만 아서가 뭘 말하는지는 안다.

카일이 아서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 서고는 오러를 제대로 쓰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해. 하지만 황제 폐하도 나도 오러를 쓰는 사람들이 아닌데 우리한테만 출입권이 있고 정작 네가 못 보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이잖아. 사실 너한테야말로 필요한 정보인데.”

아서가 웃었다.


“그래서 황태자 전하께 부탁드리고 있잖습니까.”

아서는 선선한 태도였지만 황태자는 그 상황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오러를 배워야 했고, 정작 실명까지 겪어야 했던 아서는 황태자에게 부탁해야 하고, 오러를 쓰지도 않고 부작용을 걱정할 필요도 없는 황제와 황태자만이 ‘왕의 서고’에 접근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

왕의 서고가 황제와 황태자에게만 개방된다는 것은 오러를 쓰는 사람을 황실이 틀어쥐겠다는 의도가 있는 수작일 것이다.

정작 황제와 황태자는 오러를 익히지 않으면서, 오러를 익히는 사람에게는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정보를 개방하지 않는 것.

결국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작용을 걱정해야 하는 오러 사용자들이 황제와 황태자에게 굽히고 들어올 수밖에 없게 만들고, 그들에게 충성하지 않으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아서가 이런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내가 도움이 될 만큼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내 조사 방식이라고 해봐야 왕의 서고에 처박혀 알렉산더 선황이 남긴 일기랑 옛 기사들의 기록을 뒤지는 것뿐이라……. 거기 조상님들의 아내나 애인들의 건강 상태까지 모조리 적혀 있지는 않을 것 같거든. 이름이라도 적혀 있으면 어떻게 되셨는지 알아볼 수는 있겠지만…….”

“…….”

아서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오러에 대해 알아내신 게, 관련자들을 만나서 들으신 게 아니었습니까?”

카일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로 밀접한 관련자는 살아있는 사람이 없어. 원래도 비밀스러운 편이었는데 아무래도 그 독살 사건 이후에 피바람이 불기도 한 것 같고. 굉장히 철저하게 기밀로 관리하게 된 모양이야.”

“…….”

“선황 폐하의 기록에 등장하는 이름들, 보필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 전부 비밀리에 알아봤는데 지금은 다 죽었더라고. 뭐 엄청 노인들이긴 하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루사익의 최측근들 가운데는 오러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까진 있었다.

그러나 오러에 시력이나 목숨이 얽힌 부작용이 있고 반려가 열쇠가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걸 알 만한 사람들은 살아있지 않았다.


“…….”

“그 후로는 측근들한테도 공유되지 않았어. 황태자인 나한테조차도 전해지지 않아서 내가 직접 몇 날 며칠 서고를 뒤져 찾아야 간신히 몇 줄씩 나오는 정보를 끌어모아야 했고.”

“마리아 황후 폐하께서는요?”

카일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에게는 묻지 않았어. 아시는 건 있을 것 같지만, 그걸 지금 물어보면 네게 시력 문제가 생긴 게 흘러나갈 것 같아서.”

“…….”

아서의 조금 의외로 여기는 듯한 눈빛을 보고 황태자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뭐야. 안 그래도 불손한 눈빛이 평소보다도 더 불손한데?”

아서가 피식 웃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신중하고 사려 깊으신 모습은 의외라서.”

“……이 자식이.”

아서가 자세를 바꾸고 미소 지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고에 쌓인 기록을 뒤져서 정보를 알아낼 정도로 안 어울리는 짓을 하실 줄 몰랐습니다. 제가 전하를 과소평가했네요.”

“……고맙다는 건지 놀리는 건지.”

“진심입니다.”

그래도 그 놀리는 듯 얄미운 웃음이 싫진 않았다.

황태자는 손을 저었다.


“어쨌든 너도 왕의 서고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볼게. 내가 꼼꼼히 보기는 했다만 네가 보고 싶은 마음도 당연히 있겠지. 그 정도는 내가 할 수 있…….”

“아니, 카일.”

아서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하지 마.”

“…….”

아서가 진지하게 말했다.


“난 그 사람에게 위험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럴 수 있게 해 줘. 난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원할 뿐이야.”

“…….”

카일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바로 지금 이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서가 원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이런 아서가 무슨 황좌에 위협이 된다고 그렇게.


“합리적인 처사고 필요한 일인 걸 납득하고 있어. 오러를 가진 사람을 통제력 없이 풀어놓는 건 안전하지 않아. 그 사람이 어떤 인격일지도 모르는데. 그 정보에 선례를 허락하지 마. 그러다가 줄줄 샌 정보 때문에 황후 독살 사건 같은 게 일어난 것일 테니.”

“…….”

카일이 아서를 쳐다보았다.

아서가 말을 이었다.


“가문의 형제들 사이가 항상 좋진 않아. 당연히 통제권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

카일은 자신이 그렇게 느끼는 만큼 아서를 진짜 형제로 만들고 황자 같은 대우를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혜적인 태도이고, 오만이며, 자신의 욕심일 뿐이다.

냉정하게 어머니를 어떻게 하지는 못하면서, 아서에게는 마음에 진 빚을 갚고 싶은 욕심.

아서는 원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단순한 일이었다.

아서가 무슨 황자 대우를 원하겠는가.

살아남기 위해 여기까지 왔을 뿐.

그가 그걸 원할 거라는 생각 자체가 그에 대한 모욕이다.

솔직히 황실이라면 학을 떼고 있을 것이다.

카일 자신도 그러할진대.

하지만 권력으로만 지킬 수 있는 것도 있다는 것을 카일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서.”

“사냥개가 공을 세웠다고 맹견을 목줄 없이 풀어주지는 않아.”

카일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넌 개가 아니야. 내 형제지.”

“누군가의 입장에선 그럴 거라는 뜻이야.”

아서는 담담하고 냉정했다.


“네가 그런 말로 날 싸고돌수록 내가 앞으로 어디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나 누군가는 생각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게 하지 마. 안전하게 목줄이 채워져 있는 사냥개라고 여기게 만들라고.”

“…….”

아서의 목소리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 침착했다.


“주인의 침대 위로 기어오르는 개는 어느 날 심기가 불편해진 대부인에게 매를 맞고 쫓겨날 수 있어. 죽을 수도 있고. 난 황실의 침대를 원하지 않아. 밖이 편해.”

“…….”

카일은 전혀 동의하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염려는 이해했기에 당장 반박하지는 않았다.

아서가 차분히 황태자를 응시했다.


“그 사람은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게 아니야. 합리적으로 위협이 된다고 생각할 때만 견제하지. 합리적인 사람은 예측이 가능해. 내가 충성스럽고 통제하에 있다고 여긴다면 나나 아내를 제거하려 하지 않을 거야.”

“…….”

한때는 카일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 합리성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알게 되기 전에는.

아서가 과연 이것도 예측했을까.

내 어머니는 예측이 가능한 사람일까.

카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에 대해선 좀 더 이야기할 게 있는데, 그건 레이나 양 불러서 같이 이야기하자. 두 사람 모두 들어야 할 것 같은 내용이야.”

 

* * *



“내 어머니가 합리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합니다. 레이디의 순발력 있는 설계 덕분에 지금 아서는 나랑 같이 몸 건강히 잘 지내는 것이 바람직한 그림이 됐으니 일시적으론 안전하다고도 생각하고요. 하지만 생각보다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

황태자는 아서와 레이나를 향해 남자의 초상화 하나를 내밀었다.


“이 사람 얼굴을 본 적 있나요?”

레이나가 초상화를 본 뒤 아서를 한 번 보고 황태자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아뇨.”

황태자가 짧게 끄덕이고 말했다.


“이름은 귄터 베인. 살리아인 사내입니다. 눈에 흉터가 있고 위압적인 외모예요. 살리아어를 하고 성정이 잔인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데 익숙한 인물이에요.”

아서의 눈빛도 황태자에게로 향했다.

카일은 말을 이었다.


“용병 일을 한 것 같습니다. 제국어는 못하는 것 같지만 알아는 듣는 것 같았으니 확신할 순 없어요. 우선 얼굴을 기억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아서와 레이나가 모두 남자의 그림으로 시선을 내렸다.

두 사람 모두 갑작스럽게 등장한 낯선 남자의 초상이 마리아 황후와 무슨 관계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의아하게 듣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앞에서 황태자는 심호흡하고 말을 쏟아놓았다.


“이 살리아인 남자는 나와 아서의 또 다른 이복형제일 가능성이 있고, 오러를 씁니다. ……내 수준으론 정확하게 알아챌 수 없지만, 아마 아서만큼 자유롭게 쓰는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신들 주변을 맴돌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서와 레이나가 동시에 딱 멈추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은 잠시 둘의 눈빛을 마주 보다가, 말을 이어가기 위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확실하지 않지만, 황후 폐하…… 내 어머니가. 오러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그 남자의 반려한테 무슨 짓을 한 것 같아요. 그 남자가 그걸 알아채고 저나 아서한테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된 것 같고요.”

“…….”

“후작 대부인의 저택에서 벌어진 살리아인 테러가 이 남자와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

카일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자기가 겪은 일을 알리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고, 그냥…… 그런 건 상관없이 우릴 해코지하고 싶어 하는 미친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모르겠지만, 화가 난 것 같았어요.”

카일이 고개를 들고 아서와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아서, 레이디. 두 분이 그자의 사정에 관심 가질 필요는 없어요. 그건 나나 황제 폐하, 황후 폐하가 감당할 일이니. 당신들은 몸조심만 해요.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고 화풀이에 휘둘려줄 순 없습니다.”

“…….”

카일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런 짓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인 걸 염두에 두고 ‘누군가’에 대해 너무 방심하지 말고요. ……미안합니다.”

카일은 침착하게 말을 맺었다.


“부디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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