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 반려의 기준 (174/210)


#174. 반려의 기준
2023.04.30.


참…… 소극적인 여자로 보이더라니.

아서가 관련된 일에는 황태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당차게 독대를 청한다.

나를 어려워하는 티가 나는데도 아서의 일에선 두려움도, 어려움도 없는 사람인 듯했다.

하긴.

그녀가 내 앞에서 렘브란트와 따로 이야기하러 갔던 것 때문에 아서가 기분 상한 모습을 보였을 때, 자리를 비워도 되겠냐며 양해를 구하고 아서를 끌고 가는 걸 보고 보통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서가 아내를 잘 만났다고 생각했었지.


“……크흠. 네, 독대. 좋죠.”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레이나는 미소 지었고, 아서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카일을 보았다.

카일은 모른 척했다.

황태자 카일은 자신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익숙했다.

특히나 지위가 낮을수록 그들은 나서서 자기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뭔가 사정이 급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아이나 귀족 영애, 하급 병사들의 곤란을 알아서 눈치채고 자리를 물려 주는 배려를 하는 것은 황태자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윗사람에게 직접 말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참는 것이 편한 사람.

레이나는 딱 그런 류의 사람이었다.

그녀 자신의 일이라면 그렇게 나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서의 일이라면 다르다는 거지.

그런 성격이 아닌데도.

황태자는 레이나가 아서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녀를 보며 턱을 괴고 웃음을 참았다.

‘라이언 달튼’ 이야기도 이 사람이었지.

착하고, 미인이고, 아서에 대해 잘 알고.

소심하면서도 은근히 심지가 굳어서 의지가 된다.

내 편이 되어 준다면 든든할 사람이었다.

‘당신이 뭐가 어때서? 사생아인 게 당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라며 소리치던 레이나의 빨개진 얼굴을 떠올리고 카일은 제가 다 흡족해서 몸이 근질거렸다.

눈빛만 봐도 그녀가 진심으로 아서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서에게는 가족이 필요하다.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줄, 나는 당신 편이라는 걸 확실하게 표현해 주고 머물러 주는 아내가.


 
이런 사람이 품 안에서 빠져나갈 듯 말 듯 하니 돌았던 거지.

아서의 마음을 알 만했다.

황태자가 자세를 바꾸며 레이나를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정식으로 인사를 안 했군요. 다른 사람들 앞에선 부를 수 없겠지만, 진짜 이름을 들을 수 있을까요? 저는 카일입니다. 전에도 소개했지만.”

레이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스스로 이름을 소개하는 순간만은 당당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저는, 레이나 아스타린입니다. 거짓된 이름으로 소개드렸던 것, 늦었지만 사죄드립니다.”

카일이 웃었다.


“괜찮아요.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진짜 이름을 듣게 돼 기쁩니다. 앞으로는 옛날 일로 어려워하지 말아요.”

그리고 속으로 축복했다.

아서 옆에서 백년해로나 하시길.

아서는 영 편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것도 좀 재밌었다.

* * *

레이나가 케이와 함께 다른 방으로 간 후, 카일은 곧바로 아서를 보며 타박하듯 웃었다.


“아니, 대체 왜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야? 딱 봐도 네 아내는 너만 보고 있는데. 나야 웃기긴 하다만 개선장군 아서 경은 집착증이라고 소문나겠어.”

아서가 불만스러운 낯빛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좀, 지나치게 미인이잖아요.”

“뭐?”

아서는 피치 못할 불평을 토로하듯 말했다.


“내 아내는 믿지만, 보고 있으면 자꾸…… 빠져드는 느낌이 들어서. 그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 같아서 다른 남자들이랑 있는 게 신경 쓰입니다.”

“…….”

아, 그러니까 아내는 믿지만 아내의 출중한 미모로 인해 아내를 보는 다른 놈들을 믿지 못하겠다고?

아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고 싶습니다. 데뷔탕트도 가능하면 일정 최소한으로 해서 끝내고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고요.”

“…….”

지금 농담하는 건가?

카일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아서를 바라보았다.

아서의 표정은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카일이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아내가 미인이긴 한데 난 그 정도의 느낌까지는 안 받고 있어.”

아서가 눈썹을 치켜떴다.


“내 아내가 미인이 아니라고요?”

아내의 미모를 저평가해 화를 낸다기보단, 카일이 턱도 없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몹시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환장하겠네.

청각에도 문제가 생겼나.


“아니……. 물론 미인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모에만 마음이 휘둘리지는 않는다고. 나도 그렇고.”

아서가 카일이 뻔한 소릴 한다는 듯이 대꾸했다.


“무슨 당연한 소리입니까. 평범한 미인한테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내 아내는 아니잖습니까.”

“……?”

아서가 좀 머뭇거리며 말했다.


“……내 아내는 보고 있으면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쁘니까.”

카일이 결국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건 네가 네 아내한테 푹 빠졌으니 그런 느낌을 받는 거 같은데.”

“…….”

내가?

아서는 진심으로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황태자가 아서를 보고 탄복하듯 헛웃음을 지었다.


“야……. 네가 이렇게 귀여운 놈인 줄은 몰랐다.”

“…….”

아서가 좀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

순간 뭔가 깨달은 카일이 멈칫하고 아서를 쳐다보았다.

잠깐. 보고 있으면 빠져든다고?


“……잠깐. 아서, 너.”

“……?”

“시력 돌아왔냐?”

“…….”

아서가 잠시 입을 다물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혹시 아서는 자신의 시력이 돌아왔다는 걸 알리는 게 그에게 사생활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봐 고민하며 대답을 망설였다.

이래저래 짚이는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긍정 대답이었다.


“돌아왔구나! 야, 너……!”

“원래도 좀 왔다 갔다 하는 편이었습니다. 완전히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요.”

“…….”

황태자는 입을 다물었지만 반가운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아서를 바라보았다.

아서가 물끄러미 그를 마주 보며 물었다.


“우선 오러에 대해 알게 됐다는 거, 듣고 싶은데요.”

“아, 그래.”

카일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일단 너는 레이나 양이 없으면 안 돼.”

“…….”

“시력을 잃어버리는 문제도, 오러 사용자가 요절하는 문제도 전부 반려의 부재와 관련 있어. 그리고 네가 거절해도 이건 레이디 레이나에게 말할 거다. 카일 황태자 전하는 아서 말 안 들으니까.”

“…….”

아서가 가만히 있다가 반문했다.


“그 사람은 어떻습니까.”

“어?”

아서가 카일을 응시했다.


“그 사람은 내가 없어도 괜찮습니까? 그 사람이 자꾸 아픈데 왠지 오러 때문인 것 같아서.”

카일의 눈이 묘해졌다.


“……자꾸 아프다고?”

“…….”

그쪽에 대해선 알아낸 게 없는 건가.

아서는 차분하게 다시 물었다.


“루사익의 기사들은 배우자가 일찍 죽은 사람이 많잖습니까. 선황제 폐하의 황후…… 그러니까 저희의 할머님도 그렇고.”

“……아.”

카일이 잠시 틈을 두고 대답했다.


“사실 그분은 병사가 아니야. 독살이지.”

아서가 멈칫했다.


“……독살이요?”

“정치적인 이유로 독살이라는 건 공개하지 못했어. 나도 이번에 조사하면서야 알게 된 거긴 한데. 그 당시 선대 황후 폐하가 독살당했다는 걸 공개하긴 어려운 상황이었어서. ……전쟁 영웅은 원래 적이 많으니까.”

“…….”

카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루사익의 반려들 가운데 요절이 많은 이유는, 오러를 쓰는 사람을 죽이기는 힘든데 그 배우자는 상대적으로 죽이기 쉽기 때문이야. 반려를 죽이면 오러 사용자는 빨리 죽거든.”

그래서 아서의 혼인에 그런 문제가 생긴 걸 알았을 때 당황스러웠던 것도 있었다.

그때는 정말 놀랐었지.

루사익이 기를 쓰고 오러와 반려의 관계에 대해 은폐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라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카일은 눈을 찌푸리고 머리를 헤집으며 중얼거렸다.


“……오러가 각인된 반려로 여기는 사람이 기준이 뭔지는 잘 모르겠어. 신 앞에서 혼인 서약을 한 사람이란 얘기도 있는데 그건 너무 신비주의적인 해석 같고. 곁에서 오래 같이 산 사람이란 얘기도 있지만 너한텐 해당이 안 되고. 근데 대체로 ‘아내’였단 말이지.”

“…….”

카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좀 밀접한 접촉을 하는 게 기준인가도 싶었지만 너는 레이나 양이랑 계속 같이 지내면서도 시력이 돌아오지 않았잖아.”

“…….”

카일이 복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준이었다면 너와 내 아버지처럼 바람기가 있을 수도 없었을 것 같고.”

“…….”

카일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래저래 딱히 일관성이 없는 걸 보면 그게 기준도 아닌 것 같아. 물론 아버지야 오러 능력이 출중한 편도 아니고 오러로 인한 부작용을 겪고 있지도 않으시니 기준으로 삼기에는 모호하기는 한데…….”

“…….”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그가 말을 이어갔다.


“루사익에서 재능 있는 기사로 여겨졌던 사람은 배우자를 잃으면 전부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어. 짐작하겠지만 전부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들이었고.”

“…….”

“그래서 루사익 일가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신중한 편이었더라고. 반려자가 일찍 죽으면 안 된다는 걸 암암리에 알고 있었던 거지.”

카일은 조사를 하며 깨달은 불편한 짐작도 바로 이어서 쏟아놓았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출정 전에 결혼이나 약혼을 진행하지 않은 거, 어머니가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 나는 오러를 익히지 않긴 했지만 혹시라도 성급하게 결혼이나 약혼을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

아서는 조용히 카일의 말을 곱씹었다.

나한테는 필요하지만.

그녀에겐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더 죽이기 쉽기 때문에 반려가 더 일찍 요절하는 것이다.


“…….”

아서는 생각에 잠겼다.

카일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일단 너한테 반려로 각인된 건 레이나 아스타린 양이야. 한번 각인된 걸 풀거나 다른 사람으로 바꿀 방법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고, 너한테 있는 부작용을 가장 안전하게 없애는 방법은 그 사람이 곁에 있어 주는 게 가장 확실한데…….”

아서가 눈동자만 움직여 카일을 쳐다보았다.


“반려가 그 사람인 건 어떻게 확신합니까? 기준이 모호하다면서.”

카일이 뒤로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우리 귀환길에 너 급하게 돌아온 이유, 트리스탄한테 들었어.”

“…….”

“그리고 후작 대부인의 저택에서 너 자객들 정리하다 말고 갑자기 튀어 나간 거.”

“…….”

카일이 가만히 아서를 응시했다.


“상대의 목숨이 위험에 처했을 때, 오러를 통해 그 상황을 알아챌 수 있었지? 그럼 그 사람이 각인된 대상이야.”

“…….”

카일이 짧은 틈을 두고 아서를 바라보다가 확인했다.


“레이나 양 맞지?”

“…….”

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아서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있다가 끄덕였다.


“……맞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