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 사랑에 빠진 연인 (173/210)


#173. 사랑에 빠진 연인
2023.04.27.


케이 경과 춤을 배우니 마니 귀여운 수작을 부리는 아서의 모습을 보며 레이나는 웃음을 참았다.

아서 경이 귀여워 보인다니. 세상에.

흰고래 여관에서의 일이 있은 후, 아서는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시선을 돌리면 항상 동시에 눈이 마주쳤고, 눈이 마주치면 그는 눈썹을 으쓱하거나 예쁘게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을 간지럽히는 아서의 다정한 장난은 긴장하고 있는 레이나를 언제나 웃음 속에 밀어 넣었다.

수도에 오면 어렵고 마음 졸이는 일의 연속일 줄 알았는데, 바쁘고 설레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

아서의 얼굴만 보면 웃음이 났다.

요즘 레이나는 날마다 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있었다.

일을 할 때는 생각보다 소탈한데도 절제된 우아함이 있었고, 살짝 고개를 숙이고 서류나 지도를 보는 무심한 얼굴은 묘하게 금욕적이면서도 퇴폐적인 섹시함이 있었다.

가장 고귀한 귀족의 전형 같으면서도, 때론 그냥 사랑에 빠져 웃는 청년 같았다.

언제나 사람들의 한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중심을 잡아주는 듬직함이 있으면서도 괜히 무게 잡지 않고 언제나 사람들을 부드러운 미소로 이끌었다.

가만히 창밖을 볼 때는 무채색의 조각상 같았고, 그녀를 보며 웃을 때는 신화 속의 미청년 같은 청초함으로 사람을 홀렸다.


 
조각 같은 얼굴에, 나직하고 듣기 좋은 차분한 목소리에.

아주 정적인 매력을 가진 사람이다 싶다가도, 그가 몸을 움직이고 말을 달릴 때면 달콤한 땀이 흐르는 때야말로 이 사람의 진가가 드러난다 싶었다.

볼 때마다 새롭게 멋있는 사람이었다.

하다못해 어깨를 툭 짚고 잠깐 저기 다녀오겠다며 말 대신 고갯짓을 하는 사소한 행동도 그가 하면 세련되고 매력적인 유혹으로 느껴졌다.

그 모습이 너무 멋있더라고 얘기했더니 브로디가 너 같은 콩깍지는 처음 본다며 웃음을 터뜨려 조금 창피한 기분이 들었지만.

……하지만 고개 돌릴 때 목선이랑 콧대가 너무 멋졌는걸.

브로디가 못 봐서 그래.

콩깍지 같은 건 아니다.

이 사람은 솔직히 객관적으로 봐도 너무 멋있다.

그의 손이 닿은 데에 아직도 간질간질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

케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을 느낀 레이나가 민망해하며 슬그머니 케이의 눈치를 보자, 아서가 다정하게 레이나의 뺨을 살짝 건드리고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

자신이 앞에 있을 때 다른 남자에게 시선을 돌리면 늘 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건 레이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었다.

레이나가 웃으며 그의 팔에 손을 올리고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밉지 않게 드러나는 그의 독점욕이 싫지 않았다.

더 이상 슬그머니 그의 얼굴을 훔쳐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좋았다.

그가 눈을 마주쳐 주는 걸 좋아하는 덕분에 그 잘생긴 얼굴을 마음껏 봐도 되니까.

하지만 행복한 한 편으로 가슴이 아렸다.

레이나는 그의 석영 같은 회색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역시 시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

뭐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와 마주 보고 있을 때 시선을 맞추는 느낌이 전과 달랐다.

예전에는 못 느꼈지만 그의 눈빛이 달라지고 나니 알아챌 수 있었다.

분명 보고 있는 방향은 같은데도 다른 세상에 있는 듯 엇갈리는 느낌.

그땐 제대로 보고 있지 못했던 거야.

지금은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

전에는 ‘보는 척’한 것 같았다.

말해 주지 않는 건 내가 신경 쓸 것 같아서 그런 거겠지.

실리적인 이유에서도 나는 모르고 있는 편이 나았다.

아는 사람은 최소한인 것이 좋다.

출생의 약점을 공로로 상쇄하고 있는 아서가 한 영지의 주인으로 인정받기엔 너무 치명적인 약점이니까.


‘아무한테도 알려져선 안 돼. 나도 모르는 일인 거야.’

하지만 카일 황태자 전하에게는 넌지시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오러 때문인지.

다시 안 좋아질 수 있는 건지.

완전히 나은 건지.

어떻게 하면 더 좋아질 수 있는 건지.

레이나는 아서에게 자신이 그의 시력 문제를 눈치챈 것을 숨겼다.

그걸 알고 있다고 하면, 이 사람은 혹시라도 내가 그의 시력 때문에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계속 신경 쓸 것이다.

레이나는 그에게 온전한 안정감을 주고 싶었다.

죄책감이나 배려가 아니라 나는 그냥 당신이 좋아서 여기 있는 거라는 진심을 이 사람이 순수하게 받아들이게 해 주고 싶었다.

레이나는 왠지 뭉클하고 애틋한 마음이 들어 저도 모르게 손으로 그의 눈가를 살짝 쓸어 보듯 건드렸다가, 아서가 눈을 깜박이자 아차 하고 손을 거두었다.


“…….”

아서와 케이가 동시에 그녀를 주목하는 게 느껴졌다.

순간 당황한 레이나가 미안한 듯 웃었다.


“죄송해요. 당신 버릇이 옮았네요. 레이디가 할 만한 예의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요.”

아서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레이나의 이마에 살짝 입 맞추었다.


“난 좋아. 더 많은 버릇을 옮겨줘야겠네.”

“…….”

레이나는 민망하면서도 행복해서 그의 양팔을 잡고 푹 고개를 숙였다.

나 너무 바보 같은 표정 하고 있을 것 같아.


“…….”

케이가 다시 긴 한숨을 쉬었다.


“황태자 전하 드십니다.”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 * *

카일 황태자가 싱긋 웃으며 레이나에게 금박이 들어간 하얀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자. 데뷔탕트 초대장이에요.”

“아.”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레이나는 왠지 민망한 기분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황실 인장이 찍힌 초대장이었다.

거의 잊고 있던 황태자와의 첫 만남이 생각났다.

후작가 정원에서 처음 만난 황태자를 보내며, 용케 들키지 않고 잘 넘겼다고, 이제 볼 일 없을 거라고 안심하던 레이나에게 그가 폭탄을 던졌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데뷔탕트에서나 다시 보게 되겠죠?」


「서운하시게 할 순 없지. 혹시라도 초대장 따로 안 나간다고 하면 내가 가서 얘기할게요!」

 
그 말 한마디로 황태자는 레이나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

그때는 정말로 몇 달 후 수도에 와서 데뷔탕트에 가기 위해 열심히 춤 연습을 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이런 모습, 이런 기분일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고.

황태자는 참 이래저래 복잡미묘하지만 그래도 잘해 보자는 듯한 얼굴로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어렵겠지만 모쪼록 잘 부탁해요. 데뷔탕트도, 아서도요. 필요하다면 나도 돕겠습니다.”

“…….”

레이나는 긴장했다.

황태자가 크리스티나에게는 사기 결혼이라며 무척 화냈다는 것을 들었다.

아서를 아끼기에 더 화를 낸 것이다.

하지만 레이나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자격 없는 신부인 건 내가 더할 텐데.

아서를 아끼는 사람들 앞에서 레이나는 어쩔 수 없이 작아졌다.

눈앞의 아서를 생각해서 화내지 않을 뿐,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나부터도 내가 그의 짝으론 탐탁지 않은걸.


“송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태자가 끄덕였다.


“아서 다음엔 나하고 춰요. 사정 모르는 사람들하고 춤추는 건 최대한 피하는 게 좋겠죠?”

“네, 감사합니다.”

“…….”

아서의 심기가 불편해진 걸 눈치챈 케이가 말했다.


“……무도회에서 한 사람하고만 연속해서 춤을 추는 건 매너가 아닌 건 아시죠?”

아서가 피식 웃었다.


“알아. 하지만 첫 춤 후에 몸이 좋지 않다고 하고 더 이상 추지 않는 건 괜찮…….”

케이는 레이나에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가 청하는 걸 거절하면 안 됩니다, 레이디. 사람들은 모두 황태자 전하가 아서 경을 구해 주셨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아서 경의 아내가 황태자 전하가 신청한 춤을 거절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무례입니다.”

레이나는 단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서 경과 관계가 중요한 분들하고는 춤을 추는 것이 좋다는 것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서 열심히 연습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서가 눈을 찌푸리며 힐끔 카일 황태자를 보았다.


“…….”

그 불손한 눈빛을 케이가 먼저 해석했다.


“‘신청 안 하면 되잖아.’ 같은 건 안 통합니다.”

“……나는 아직 아무 말도.”

“아서 경 덕분에 여러 번 목숨을 구한 황태자 전하가 아서 경의 레이디에게 춤도 신청 안 했다면 역시 사람들이 수군거릴 겁니다. ‘왜 저러지? 싸웠나?’ 소리가 나오겠죠. 레이디가 창피해질 겁니다. 망신 주고 싶으시면 그러세요.”

“…….”

크흠.

카일 황태자가 헛기침을 하며 웃었다.

레이나도 좀 민망해졌다.

이런 행동이 아서가 자기를 아낀다는 걸 보여줘서 입지를 세워 주는 효과가 있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가끔은 진심인가 헷갈린다.

아서가 레이나의 초청 카드를 받아들고 눈으로 훑었다.


“또 이상한 수작질 한 거 아니지?”

“수작질? ……아.”

카일이 눈을 깜박였다.


“레이디. 내가 카드에 쓴 걸 발견했군요?”

“……오러 이야기요. 네.”

카일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 듯이 웃었다.


“흠. 좋아요. 그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안 그래도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고 왔어요.”

“잠깐만.”

아서가 나서서 카일의 말을 멈추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서가 레이나의 팔꿈치를 잡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전에, 둘이 먼저 따로 이야기 좀 할게. 잠깐 케이랑 있을 수 있어?”

그리고 그는 케이를 향해 짧게 눈짓을 보냈다.

잠시 레이나를 데리고 떠나 있어 달라는 신호였다.

선황제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요절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지만, 사람들은 선황제의 아내였던 황후가 더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레이나가 자주 아픈 것도, 그분이 세상을 떠난 원인도 계속 신경 쓰였다.

그 후로 아서는 오러를 전혀 쓰지 않고 있었다.

아서는 오러가 레이나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황태자에게 물어 볼 생각이었다.

카일이 오러에 관해 알아낸 것이 있다면, 레이나에 관한 내용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과 오러로 얽힌 것 때문에 레이나의 건강이 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야 했다.

레이나가 물끄러미 아서를 바라보았다.


“‘저한테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 같은 걸 단속하시려구요?”

“…….”

아서가 풋 소리를 내며 짧게 웃었다.


“아니야. 먼저 따로 물어볼 게 있어서. 어차피 ‘카일 황태자 전하’께선 내 말 안 들어.”

“…….”

레이나는 가만히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좋아요. 대신.”

레이나의 시선이 카일에게로 옮겨졌다.

레이나가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며 물었다.


“황태자 전하. 사실 저도 따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아서 경과 독대하신 다음에는 저랑 독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서의 웃는 얼굴이 당황으로 굳어졌다.

카일이 얼굴을 씰룩이다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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