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 개선식 (171/210)


#171. 개선식
2023.04.20.


제국 루사익의 수도, 시어스.

수도의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황궁의 드높은 단상 위에서 황제와 황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뿔피리 소리가 울리고 근위대 기사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검을 들고 절도 있게 제 자리를 지켜 섰다.

긴 모피 망토를 늘어뜨린 황제와 황후가 기사들의 앞을 걸어가 상석에 앉았다.

상아빛 사제복에 금빛 파시아를 두른 사제가 일어나 그들을 축복했다.

금발의 황제, 금발의 황후, 금빛 왕홀.

붉은빛의 긴 망토와 루비가 박힌 한 쌍의 황금 보관.

이제는 황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익숙한 색과 황실을 칭송하는 음악.

군중들이 승전국의 황제와 황후를 향해 루사익을 외치며 환호를 보냈다.

곧 그들은 기다렸던 이들의 입성을 맞이했다.

병사들을 이끌고 개선군 행렬의 선두가 등장하자 땅이 울렸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

수도의 백성들이 아서와 카일, 루사익의 이름을 함께 연호했다.

개선 행진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조국이 나를 불렀네.

전진하라 전사여.

적을 향해 칼을 들어라.

죽음 앞에 당당히 맞서 싸웠네.

열정과 충성을 바쳤네.

마침내 승리를 쟁취했다네.

황제에게 영광을. 신께 영광을.

개선군을 선두에서 나란히 이끌고 있는 것은 백마를 탄 황태자 카일과 흑마를 탄 총사령관 아서였다.

황태자는 황족에게 주어지는 육두마차가 끄는 황금 수레를 거부하고 아서의 옆에서 나란히 말을 달렸다.

열을 맞춘 기사들과 병사들이 늠름하게 뒤를 따랐다.

환호하는 사람들의 열기가 겨울의 한기를 몰아냈다.

오라, 용맹의 전사들이여. 와서 함께 평화를 즐기자.

영웅들이 가는 길에 깃발을 흔들고,

아이야 너는 꽃을 뿌리자.

아서는 제복을 완벽하게 갖추어 입지 않고 대신 총사령관의 외투를 느슨하게 어깨에 걸쳤다.

부상을 입은 것을 굳이 숨기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개선장군의 위엄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오히려 숨기지 않고 느슨하게 걸친 의복은 험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총사령관에게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느껴졌다.

아서가 적국 잔당의 마지막 발악에 습격을 당해 상당한 부상을 입었다는 것은 전 제국민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런 습격이 있으리라는 첩보를 입수한 카일이 다급하게 기사들을 이끌고 그를 구하러 갔다는 것도 크게 화제가 되었다.

길가의 크고 작은 저택의 위층과 다리 위에서 뿌리는 꽃들이 비산했다.

모든 건물의 2층 이상의 난간에는 흰색에 금빛이 들어간 휘장이 걸렸고, 사람들은 바구니에 가득한 꽃을 뿌리며 환호하고 깃발을 흔들었다.

축제를 열어라. 꽃을 뿌려라.

승리의 찬가를 부르자.

무기를 내려놓고 연인의 손을 잡으리.

휘장을 드리운 높은 아치와 온갖 건물의 창가에서 꽃잎이 뿌려졌다.

개선 행진곡이 연주되고 있었지만 땅을 울릴 정도의 환호에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열광에 아서도 황태자도 놀랐다.

걷던 황태자가 웃으며 아서를 향해 무어라 말을 걸자, 아서가 피식 웃으며 들리지 않는 소리로 대꾸해 주었다.

군중의 환호성에 파묻혀 무슨 말인지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데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비명 같은 환호가 쏟아졌다.

그들이 어떤 대화를 했을까?

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뭔가 멋진 말을 했을 것 같았다.


‘야 아서, 너 인기 엄청나다.’

‘뭐라는 거야. 나중에 말해. 지금 네 말 하나도 안 들려.’

 

머리에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검을 놓은 손에 꽃을 들어라.

연인이여 기뻐하라. 그대의 사랑이 돌아왔노라.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자, 평화가 찾아왔으니.

비탄은 끝났노라.

영광, 영광을.

어서 서두르자.

이제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리.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리.

황태자와 아서가 나란히 서서 황제 부부를 향해 경례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총사령관 아서가 승리를 가지고 이제 돌아왔습니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을 내려갔다.

황제가 친히 자신의 손으로 카일과 아서의 손을 한데 모아 잡았다.


“자랑스럽구나. 아서, 카일. 제국을 함께 이끌어갈 나의 아들들.”

환호가 세상을 뒤흔들었다.

* * *

【 황제 환영사 논란. ‘아들’이라 했나, ‘아들들’이라 했나. 】

【 황실 소식지 ‘아들’로, 제국신문 ‘아들들’로 보도! 】

【 ‘제국을 함께 이끌어 갈’이라는 수식어는 마리아 황후와 상의된 것인가?! 】

【 사생아를 황자로 인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술집마다 싸움 속출! 】

【 전문가 R씨, ‘황자’ 아니다. ‘영지가 있는 공작 작위’ 수여를 암시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반박 】


 

* * *

신문을 읽던 브로디가 힐끔 마리나를 보며 물었다.


“……황제가 ‘아들’이라 했는지 ‘아들들’이라 했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소파에 늘어진 마리나가 중얼거렸다.


“중요하지. 아들이면 카일 황태자만 아들이라고 부른 거고, 아들들이면 아서 경도 같이 부른 거니까.”

“어차피 황제님 아들인 거 온 세상이 다 아는데?”

“암암리에 부정하지 않은 거랑, 공식 석상에서 심지어 개선식에서 황제가 손잡아 주면서 땅땅 못 박아 ‘내 아들’로 말한 게 같냐. 심지어 황태자랑 나란히 불렀는데.”

마리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게다가 카일 황태자보다 아서 경 이름을 먼저 불렀잖아. 보통 그런 자리에선 맏아들을 먼저 부르는데, 이건 당연히 논란감이지.”

근래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는 수준 높은 정치 교육을 가까이서 접하고 있는 하녀들도 풍월을 읊기 시작했다.

특히 마리나는 볼튼 경의 일로 이래저래 치이며 강제로 학습하게 된 귀족 세계의 규칙들이 많았다.


“나란히 형제로 두고 부른데다가 ‘맏아들이어서 순서대로 불렀다,’ 이런 뜻이라면 황자로 본다는 거니까…….”

“그냥 대충 말한 걸 수도 있는 거 아냐?”

마리나가 늘어진 채 손사래를 쳤다.


“그런 자리에서 할 말을 대충 정할 리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수십 번은 검토했을걸?”

“겨우 말 한마디에?”

그렇게까지 하겠냐고 말하면서도 브로디는 기분이 좋아서 싱글벙글했다.


“뭐……. 수백 명이 검토했어도 결국 입을 여는 건 황제 폐하니까 모르는 거긴 하지만…….”

마리나는 내심 부러워하며 브로디를 바라보았다.

브로디는 레이나 쪽으로 제대로 줄을 서더니 이제 아서 경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제 가족 일처럼 좋아했다.

그래, 너라도 행복하니 됐다.

나도 그랬어야 했는데…….


“…….”

브로디는 삼십 번쯤 반복한 말을 또 했다.


“그나저나 레이나 말이야. 사생아도 아니고, 죽은 줄 알고 어릴 때 잃어버린 딸이었다니……. 너무 신기하지 않아? 어쩐지 귀티가 나더라니!”

마리나는 눈을 꿈벅이며 천장만 쳐다보았다.


‘……너는 그걸 믿니? 누가 봐도 둘러대는 거잖아.’

 

* * *



“하녀가 글쎄…… 임종 전에 전부 고백했다지 뭐예요. 사실 같이 태어났던 쌍둥이가 죽지 않았다고……. 자기가 키운 게 그 집 아이라고…….”

“어머 어쩜……. 그럼 후작 부인은 아이가 갓 낳았을 때 죽은 줄 아시고 여태? 집에 난리가 났겠네요.”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줄리어스 후작가가 죽은 줄 알았던 딸을 최근 되찾았다는 내용의 소문이 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시끄러워지길 바라지 않아서 쉬쉬하고 있대요. 경사이긴 한데, 아무래도 지금은 아서 경 일로 모두 축하하고 있는데 그런 일로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받아야 할 주목을 뺏어오는 것이 될까 봐…….”

“아 그렇네요……. 아무래도 갑자기 기억에도 없는 자매가 있다고 하면 외동딸이었던 레이디 크리스티나 입장은 당황스러울 수 있으니까.”

“천천히 소개할 테니 이번 데뷔탕트엔 너무 주목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셨대요. 새로 찾은 딸도 사람들 주목을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언니한테도 폐라고.”

“어머나……. 다행히 무척 사려 깊은 아이인가 봐요.”

귀족들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교환했다.

사생아일까? 진짜 후작 부인의 딸일까?

덕분에 후작 부인은 칩거 중이고, 후작은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아내를 위해 사람들에게 모르는 척해 주길 부탁했다고 했다.

후작 부인은 20여 년 만에 되찾은 딸이 슬프고 기쁘고 충격적이어서 칩거 중인 걸까, 아니면 사생아를 용납하지 못하고 자신의 친딸이라는 핑계를 내놓은 뒤 울화통이 터져 앓아 누운 것일까?

아무래도 타이밍이 공교로운 데가 있었다.

사생아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엔 복잡한 상황의 줄리어스이니.


“그래도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새 여동생을 아주 배려해 준다더라구요. 레이디 크리스티나 입장에선 갑자기 이런 타이밍에 평생 없던 자매가 생기고 그 자매가 자기와 남편이 받아야 하는 주목까지 뺏어가면 싫을 법도 한데…….”

“워낙 신실하기로 유명하잖아요.”

귀족들은 겉으로는 맞장구를 쳐 주면서도 내심 의심스러운 마음을 눈빛 속에 숨겼다.

진짜일까? 아닐까?


“근데 믿을 수 있는 건가요? 상속권을 노리고 하녀가 자기 딸을…… 거짓말했을 수도 있잖아요.”

“당연히 의심했겠죠. 그런데 아무래도 사실이 맞다고 짚이는 게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 하녀가 평생 고해성사를 하고 사제가 정해준 보속을 하면서 살았는데, 어쩌다가 치정 문제로 꼬리를 밟혔다더라.

사제한테 고해성사 내용을 말하라고 괴롭히는 사람이 붙었고 사제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하녀가 사제가 고초를 겪는 걸 보고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고백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꼭 진짜처럼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했고, 잘 꾸며진 거짓말 같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소문들도 여러 가지 있기는 해요…….”

소곤거리는 귀족들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 * *

케이가 레이나에게 속성으로 역사와 정치를 교육했다.


“개선식을 보셨죠? 선대 황제 폐하의 개선식을 연상시키는 배치를 여러 가지로 답습했어요. 너무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예우로 느껴지도록 상당히 신경을 쓴 상황입니다. 하지만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은 본질을 알아볼 겁니다. 전쟁이 일어난 이유도 그때와 같지 않으니까요.”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선황제께서 전쟁을 하신 이유는 자국을 지킨다는 명분이 확실했죠. 워낙 걸출한 분이기도 하셨고요. 하지만 이번 전쟁은 황제의 의도가 어느 정도 보이는 상황입니다. 지금의 폐하께선 능력을 증명할 기회도 없으셨고, 여러모로 선황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으시니까요.”

레이나가 케이의 리드에 따라 턴을 돌았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스텝을 밟았다.

그 사이에도 케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권력을 오랫동안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황제 폐하는 선위를 염두에 두고 서서히 물러날 준비를 하려 할 가능성이 있어요. 평판이 좋은 황태자에게 스스로 물려주지 않고 오랫동안 쥐고 있으면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보여서 제국민의 지지가 떨어질 테니까요.”

케이가 말을 이었다.


“선제후 회의를 열기에 지금은 나쁘지 않은 시기입니다. 어떤 선제후라도 두 분의 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거고, 선제후들도 불만이 있는 듯이 보여 자기들의 명성을 망치고 싶지 않을 것이라 전쟁이 일어난 이유에 대한 황제의 의도 같은 건 슬쩍 넘길 수 있는 상황이죠.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미화되기 마련이니까. 그럼 질문입니다. 확고한 황제에게 국민의 지지가 왜 필요할까요?”

레이나가 그의 리드를 따라가며 답했다.


“선제후들이 차기 황제를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보통은 황제의 권위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부드럽게 황태자에게 황위가 승계되지만, 민심이 좋지 않거나 자질이 의심되는 상황이라면 대공이나 공작, 다른 선제후 중에서도 황제가 나올 수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그럼 왜 전쟁이었을까요?”

“선제후들이 카일 황태자 전하를 이의 없이 지지하게 만들려면 정치적으로 빚을 져야 하고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니까, 폐하는 황태자 전하가 전쟁에서 공훈을 세워 루사익 선황제 폐하를 떠올리게 만들고 스스로 확실하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그럴 필요가 없게 하고 싶으셨을 것 같아요. 살리아의 도발과 영주 피살 사건은 좋은 핑계였을 거구요.”

“네, ‘그런 평가를 내릴 소지가 있습니다.’ 정도로 말할까요? 황실에 대한 말은 항상 조심하는 게 좋아요. 사람들 앞에선 지금의 저처럼 솔직하시면 안 됩니다.”

“네, 주의할게요.”

“역시 이쪽은 우수하시네요. 그리고 춤 쪽은, 제 발을 세 번 밟으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케이 경. 제가 춤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좋아요. 잘 대응하셨습니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마시고 그렇게 레이디처럼 우아하게 웃으세요.”

레이나가 생긋 웃으며 케이를 바라보았다.

케이가 무심히 춤을 리드하며 말을 이었다.


“상대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 무례한 것 같다면 적당히 무심한 분위기를 흘리면서 피곤하다고 하시고 아서 경이나 다른 신사분에게로 벗어나세요. 아마 아서 경과 제가 앞에 있는데 그런 사람은 없긴 할 겁니다.”

“네.”

“방금 스텝 틀리셨습니다.”

“아.”

 

 
춤과 귀족 에티켓과 역사와 정치 교육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레이나는 온갖 귀족 교육을 속성으로 강습받고 있었다.

아서가 처한 상황과 주의할 점에 대한 지식 쪽은 놀라울 만큼 우수했고, 크리스티나를 보고 자란 레이나는 레이디의 에티켓도 빠르게 익혔다.

다만 쉽게 긴장하는 것과 움츠린 태도를 교정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평생 해 본 적 없는 춤 역시 쉽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사교 파티에서 춤 신청을 받는 레이디가 아닌, 사원에서 기도하는 레이디로서 알려진 사람이었기에 공개적으로 춤을 보인 적은 없었다.

춤을 완벽하게 추지 못한다고 큰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데뷔탕트의 첫 춤은 어쨌든 해내야 했다.

그 정도의 레이디라면 평생 사교 댄스를 배웠을 것이 너무나 자명하니까.

레이나는 무슨 교육을 받든 춤 연습은 끝없이 하고 있었다.

덜컹.

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와 웃었다.


“또 남자랑 춤을 추고 있군.”

춤을 중단하고 케이가 레이나에게 예를 표해 마무리했다.

레이나도 예를 표했다.

그조차도 에티켓 연습의 일부였다.

케이가 고개를 돌리고 아서를 타박했다.


“여교사와 백 번 했습니다. 저랑은 한 번 했고요. 솔직히 제 누이보다는 제가 좋은 교사입니다.”

“그냥 추고 있다고 말했을 뿐인데.”

“네. 남자 교사는 또 해고하셨더군요. 저도 자르실 겁니까?”

“봐서.”

아서의 농담에 레이나가 웃었다.


“케이 경 좋은 교사세요.”

전혀 도움 안 되는 지원에 케이가 한숨을 쉬었다.


“레이디께서 저를 자르려고 작정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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