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청혼 <2부 완결>
(170/210)
170. 청혼 <2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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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청혼 <2부 완결>
2023.04.16.
“…….”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멍하니 아서를 보는 눈과 그를 놓지 못하는 손에 그를 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서. 나는…….”
그의 목울대가 꾹 내려갔다가 올라갔다.
욕심을 억누르고 있다는 게 그대로 드러났다.
레이나의 손끝이 움찔했다.
그에게 다가가 그를 만지고, 키스하고 싶었다.
그에게 나를 다 주고 싶었다.
왜? 멈추지 마요.
아서가 입을 열었다.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당신은 아이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게 걱정 안 돼?”
“…….”
아이?
레이나가 멍하니 아서를 바라보았다.
레이나의 얼굴이 천천히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
가장 먼저 검붉은 물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걸 먼저 떠올리면 안 된다는 것도 떠올랐다.
“……아이……요.”
그의 말이 맞았다.
아이.
아이가 생길 수 있었다.
그런 일이었다.
그를 안고, 그에게 안기는 일은…… 아이가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그건 레이나에게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새로운 가족이 생길 수 있는 행위라는 게 새삼 신비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레이나는 스스로 느끼는 그런 감정에 놀랐다.
“…….”
심장이 뛰었다.
그건 마치 언젠가 혼자 남겨질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약속 같았다.
애정을 쏟아부어도 되는, 나보다 먼저 떠나가지 않을 나의 가족…….
지금 당신과 사랑한 증거가, 나에게 또 다른 사랑을 줄 거라는 약속.
레이나는 입 밖에 내고서야 자신이 그것을 얼마나 원했는지를 깨달았다.
이상했다. 아직 아이가 생긴 것도 아닌데.
그가 아이 이야기를 입에 올리자 갑자기 그가 더없이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아이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
타인 같지 않았다.
마치 이미 그와 가족이 된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
그런데 당신은?
내가 아이를 가지면 당신에겐 걸림돌이 될까?
그래서 나랑…… 그러지 않으려는 거야?
레이나는 더럭 엄습하는 두려움에 깊이 생각하지 못한 채 초조하게 묻고 말았다.
“당신은 아이는 원하지 않아요?”
난 갖고 싶어. 난 아이를 많이 갖고 싶어.
그런데 당신은?
아서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는 듯, 목마른 눈빛으로 레이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 당연히 원해. 당신이 내 아이를 원해 준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은 없을 거야. 하지만 난 당신을 좀 더…….”
아서가 잠시 말을 멈추며 할 말을 찾았다.
“좋은 상황에서 안고 싶어.”
“…….”
아서가 더없이 소중한 걸 보는 듯한 눈으로 막막하게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것조차 아까운 것 같은 눈.
“지금은 내 욕심을 채울 뿐이잖아.”
“…….”
아서가 조심스럽게 레이나를 응시하며 말을 골랐다.
“내가 당신을 제대로 보호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겨도 모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
“그렇게 당신이랑 잠들고 깨어나고 싶어.”
그 후에야 레이나는 아서가 어떤 상황에서 태어났고, 어떻게 자랐는지를 떠올렸다.
어떻게 이걸 잊을 수 있었을까.
그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 상황을 극복하고 세상에 인정받기 위해 평생을 걸었다.
그의 어머니에게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도 떠올랐다.
꼭 이런 밤에 그가 레이나의 머리를 쓸어주며 해 주었던 말이었다.
그는 나와 자신의 아이에게 그런 걸 주고 싶지 않은 거야.
레이나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난 검붉은 물을 먹으면 된다고, 안아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당신을 너무 원하는데.
자기도 원하지만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아서에게서 뭔가 다른 차원의 충족감이 느껴졌다.
정말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조차 나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니까…….
아서는 그녀의 표정이 애틋하게 변한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
아서가 레이나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 웃었다.
“지금은 나한테만 좋잖아. 음, 아니.”
“…….”
아서가 웃었다.
“나하고 당신한테만…….”
“…….”
사생아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는 대신, 그는 그저 농담처럼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레이나도 결국 민망함 속에서 웃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삶이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한 적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아이가 생기게 하고 싶지 않다는 아서에게서 그의 삶이 느껴졌다.
“……이렇게 말하기엔 어제 무책임하게 행동했지. 지난밤에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미안해.”
“…….”
그는 가만가만히 약속했다.
“물론 혹시라도 아이가 생기면 최선을 다할 거야. 약속할게. 하지만…… 가능하면 책임감 있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
“…….”
촉.
다시 그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입맞춤은 부드러웠고, 마주 보는 눈은 따스했다.
레이나가 가만히 말했다.
“당신은 황제 폐하랑은 다른 아버지가 될 거예요.”
아서가 웃었다.
“그래야지. 그러고 싶어.”
레이나가 훌쩍 코를 들이켰다.
“……내가 어떻게 당신 같은 과분한 사람을 만났을까요.”
아서가 레이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웃었다.
“우연이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레이나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웃었다.
“전 첫 아이는 아들이면 좋겠어요.”
“아들?”
“네. 당신 닮은 아들.”
아서가 웃었다.
“선택권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 난 당신 닮은 딸이 좀 더 기대되긴 해.”
“아들이 필요하지 않아요? 후계자가 필요하잖아요.”
아서가 웃음기 남은 얼굴로 말했다.
“딸이든 아들이든 당신 아이가 내 후계자가 될 거야. 그런데 우리 가족 계획은 결혼하고 나서 제대로 하지. 내가 너무 내 할 도리를 제대로 못 하고 욕심만 많은 것 같은데.”
결혼. 아이.
그런 이야기가 당신하고 나 사이에서 나오고, 우리가 같이 웃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레이나가 빛나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저 아가씨 만나 볼게요.”
“…….”
레이나가 미소 지었다.
“위험한 것 같으면 안 하겠다고, 도와 달라고 할게요. 언제든 말할게요. 약속해요.”
아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나가 너무 예쁘게 웃고 있었다.
넋을 잃게 하는 미소였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당신 아내가 되게 해 줄래요?”
“…….”
탁, 벽난로에서 붉은 불티가 날아올랐다.
바람이 잘게 창을 흔들었다.
아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
레이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말문이 막히고 만 그의 얼굴을.
“…….”
아서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이며 표정을 감추려 애썼다.
억누르는 방법만 배워, 차마 그것을 표현할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표현해 달라는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환희가 넘쳐흘렀다.
그에게 저런 표정을 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이 벅차게 기뻤다.
“……무슨 그런 말을 해.”
아서가 레이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난 계속 당신이 허락해 주기만 기다렸는데.”
눈썹을 찡그린 채, 눈빛은 어쩔 줄 모르는 애정이 가득했다.
버거운 애정과, 감사와, 기쁨, 애틋함, 미안함. 그 모든 것이 뒤섞인 그의 눈빛이 레이나의 가슴에 새겨졌다.
레이나는 이 순간을 영원히 담고 싶다고 생각했다.
좋아해. 당신을 너무 좋아해.
레이나가 그에게 입 맞추었다.
* * *
케이와 황태자, 펄 공작 부인, 그리고 아서의 최측근 기사들이 논의했다.
황태자의 변호사. 아서의 변호사.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계약서 초안이 다듬어졌다.
또다시, 혼인 계약서였다.
【 혼인 계약서 】
황태자가 해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진짜 이게 성사될 줄은 몰랐다.”
“언제든 파기 가능합니다.”
케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 * *
크리스티나의 인성에 대한 레이나의 말을 그대로 믿진 않았다.
하지만 아서는 다른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레이나에게 ‘암살 의뢰’가 있었을 때.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길드를 통해 ‘줄리어스의 금발 하녀의 납치’를 동시에 의뢰했다.
몸 상하지 않게 안전히 납치하여 이곳, 후작 대부인의 저택으로 보내라고.
다친 곳이 없다면 열 배를 주겠다는 조건이 덧붙었다.
‘해결사 잭’이 받았다는 의뢰였다.
그 의뢰인은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였다.
정황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결론은 명백해 보였다.
그녀에 대한 ‘암살 의뢰’가 있었던 걸 알게 된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그 일이 일어나기 전, 레이나를 안전하게 빼돌리려 했다.
그리고 아서가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서 레이나를 찾았기에, 뒷수습을 하지 못한 의뢰가 무산된 것이었다.
그것은 아서가 그때까지 크리스티나를 참아 준 이유이기도 했다.
크리스티나가 실제로 레이나를, 단 한 번이라도 보호하려 한 적 있다는 것.
레이나는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순간.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단 한 번이라도 그녀를 보호하려 했다면.
그렇다면 아서는 그것에 대해서만은 온당한 값을 쳐 주겠노라 생각했다.
* * *
아서가 레이나를 에스코트했다.
크리스티나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온 것을 발견한 크리스티나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서에게 살짝 무릎 굽혀 예를 표한 뒤 레이나를 응시했다.
“…….”
아서가 굳은 얼굴로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반사적으로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서. 괜찮아요.’
레이나가 살짝 그에게 시선을 보낸 뒤, 그의 손을 놓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
크리스티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녀와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려면, 자신이 아서의 약점으로 느껴지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다.
레이나가 크리스티나 앞에서 예를 갖추었다.
“아가씨.”
크리스티나가 해사하게 웃었다.
“레이나.”
크리스티나가 다가왔다.
또각. 또각.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크리스티나가 레이나 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들렴.”
“…….”
레이나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크리스티나는 제법 애틋한 표정을 지으며 레이나의 뺨을 만졌다.
“널 영영 잃어버린 줄 알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
레이나는 순간, 아서가 자신을 빼돌린 것을 들키지 않기를 바라 조마조마하게 긴장했다.
동시에 아서에게 자신이 크리스티나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기를 바랐다.
‘난 아가씨를 좋아해. 아가씨랑 잘 지낼 수 있어. 10년 가까이 그 일을 했는걸.’
레이나가 빠르게 자기 세뇌를 되뇌며 미소 지었다.
“절 걱정하실 것 같아서 연락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해요.”
다른 사람처럼 웃는 크리스티나의 다정한 표정에 긴장되었지만, 레이나는 물러서지 않기 위해 조용히 심호흡했다.
그리고 얼른 본론으로 말을 돌렸다.
“그리고 저에게…… 아가씨께서 과분한 제안을 해 주셨다고 들었어요.”
크리스티나가 미소 지으며 레이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과분하긴. 오히려 그동안 내가 너를 몰라봐서 미안하지. 우리가 진짜 자매였다니 얼마나 재밌는 일이니?”
“…….”
크리스티나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아가씨라는 호칭은 관두렴. 자매가 될 텐데.”
“…….”
자매…….
이미 다 알고 왔는데도 크리스티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그녀의 다정한 태도는 낯설고 충격적이었다.
본능적으로 당황스럽고 몸이 얼어붙어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언니라고 부를래? 아니면, 내가 언니라고 부를까?”
“…….”
크리스티나가 레이나의 어깨에 묻은 머리카락을 다정스레 털어주며 고개를 기울이고 웃었다.
“어릴 때 잃어버린 쌍둥이 자매 정도로 하는 것도 괜찮게 느껴지는데……. 어떠니?”
크리스티나가 살갑게 미소 지었다.
“네가 나에게 언제나 무척 다정했으니, 나는 언니의 사랑에 과분해하는 동생 역할도 기대가 되는구나.”
―<하녀와의 계약결혼> 2부 완결.
3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