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 아끼다 (169/210)


#169. 아끼다
2023.04.13.



 


“아서, 아서!”

레이나가 아서를 흔들어 깨웠다.

아서는 거의 눈을 뜸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머리맡의 칼을 쥐고 레이나를 제 곁으로 당겼다.


“…….”

주변에 느껴지는 위험은 없었다.

레이나는 그를 붙들고 흔들며 물었다.


“아서. 혹시 오러로 과거의 일도 볼 수 있나요?”

아서가 뒤늦게 얼떨떨하게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과거의 일?”

아서가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다가 답했다.


“오러는 마법 같은 건 아냐. 그냥 감각이지. 그런 것까진 알 수 없어.”

“…….”

레이나는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아서는 주변이 안전하다는 걸 거듭 확인한 뒤, 뒤늦게야 발견한 듯 눈이 마주친 레이나를 어색하게 바라보다가 그녀를 놓아주었다.


“…….”

급하게 깨어나면 일단 야습이었던 기억 때문에 반사적으로 그녀를 제 쪽으로 당기고 봤는데.

레이나가 너무 예뻤다.

그리고 너무 가까웠다.

간밤의 뜨거운 기억까지 떠올라 더 위험했다.

아서는 자신의 침대에 스스럼없이 침범해 이불 위에 한쪽 무릎을 올리고 있는 레이나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날 좋아한다면서 이 여잔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가?

아서가 손을 들어 눈 위를 문질렀다.


“……왜? 뭔가 궁금한 과거 일이 있는 거야?”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나왔다.


“…….”

레이나는 뭔가 생각에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갑작스럽게 말했다.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절 아끼셨던 건 사실이에요.”

아서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뭐?”

레이나가 말했다.


“날카롭게 보이셔도 사실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니세요. 예민해서 그렇지 저한텐 잘해주셨거든요. 그러니까…… 보기보다는 좋은 분이세요.”

“…….”

“제가 처음에 줄리어스 저택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레이나는 크리스티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다.

아서는 대체 왜 이 야밤에 침대 위에서 좋아하는 여자로부터 다른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 알 수 없었다.

언제나 레이나로부터 자신을 크리스티나에게 보내려는 말만 들어 왔기에 더 달갑지 않았다.

아서는 막 시작되려는 레이나의 말을 막았다.


“그딴 좋은 여자에 대한 건 알고 싶지 않아.”

“…….”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냉정하게 나갔다.

말문이 막힌 레이나의 얼굴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되었다.

아서는 그 얼굴에 마음이 약해져 어색하게 다시 말했다.


“갑자기 그건 왜?”

“…….”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의지가 생긴 눈빛으로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저…… 그 제안 받아들이고 싶어요.”

“……뭐?”

레이나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자세를 고쳤다.


“아가씨로서는 해 볼 만한 제안인 것 같고,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가씨랑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그런 생각을 하다 잠들어서 그런 꿈을 꾼 건지, 진짜 그게 의미 있는 무언가였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자신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다는 거였다.

생각할수록 이 방법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아서가 가만히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레이나는 그의 눈빛을 유심히 마주 보았다.

아서는 크리스티나의 제안을 말도 안 된다고 여기고 있었고, 내키지 않아 했다.

아마 레이나를 걱정해서 그런 것일 터였다.

아서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를 볼 수 있냐는 이야긴 왜 물은 거야?”

레이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당신이 과거를 볼 수 있다면 믿으실 것 같아서요. 아가씨가 저를 아끼셨다는 거…….”

아서의 표정이 믿기 어려워졌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당신을 아꼈다고?”

“…….”

레이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아껴줬는데.”

레이나가 크리스티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줄리어스 저택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일을 잘하지 못해서 다른 저택으로 쫓겨났던 적이 있었거든요.”

레이나는 어린 막내 하녀였던 자신이 줄리어스에서 해고당하고 다른 저택으로 보내졌을 때, 크리스티나가 그 집에서 자신이 고생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직접 끌고 돌아와 주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후에 크리스티나가 레이나는 다른 데 보내지 말라고, 저 애는 끝까지 자신의 곁에 두겠다고 올가에게 직접 지시했던 것도.

덕분에 레이나는 마리나처럼 특출난 재능이 없는데도 크리스티나에게 자주 불려가 많은 잔심부름을 하며 이런저런 부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는 것도.

가끔 크리스티나가 레이나를 자기 식사 테이블에 앉히고 함께 식사했다는 것도.


「저를 많이 돌봐 주는 아이예요. 챙겨 주고 싶어요.」

 


“그런 말도 하셨었거든요.”

“…….”

“…….”

아서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당신을 아꼈던 증거라고?”

“…….”

……어?

레이나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레이나는 그때까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크리스티나가 자신을 꽤 아꼈다고…….

그래서 다른 귀족들로부터도, 그리고 후작님이나 후작 부인, 하녀장으로부터도 ‘이 애는 내 거’라며 특별히 보호해 주었다고.


“…….”

그런데 아서에게 말하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왜…… 말하고 보니 그렇게 아꼈던 것 같지 않지?

레이나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아서의 앞이기 때문이었다.

아서는 언제나 그녀와 함께 식사했다.

그녀가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늘 물었고, 자신 기분 내킬 때만이 아니라 언제나 시간을 내어 자신과 같이 먹고 싶어 했다.

식탁에서 자신이 싫어하는 요리는 멀리 빼 주었고, 가장 맛있는 요리는 앞으로 밀어 주었다.

우연히 발견하고 기분이 나쁘다며 제 곁으로 다시 끌고 돌아오는 게 아니라, 언제나 내가 어디 있는지를 확인하고 내가 안전한지를 살펴주었다.

내 거니까 다른 데는 안 보낸다는 게 아니라…….

내가 떠나고 싶다고 하니, 꾹 참고 날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려고 애썼다.


“…….”

레이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분명 줄리어스에서 자신은 크리스티나 아가씨의 총애 덕분에 과분한 대우를 받았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아서의 행동과 비교하자 크리스티나는 자신을 그리 아꼈던 것 같지 않았다.


“…….”

하지만 레이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레이나는 아서를 설득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서는 절대 아가씨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레이나는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어필하고 싶었다.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서에게 피해가 없는 파혼을 선택하게 하고 싶었다.

그건 자신만 할 수 있는 거였다.

아서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레이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안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아가씨가 그 정도로 마음을 표현한 사람은 많지 않아요. 아가씨도 애정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지, 마음은 느낄 수 있었거든요.”

“…….”

아서는 조금도 믿지 않는 듯 설핏 웃었다.

레이나를 무안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웃어는 주지만, 크리스티나에 대한 것을 곧이곧대로 듣지는 않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다음 말에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제가 아가씨를 좋아했나 봐요.”

“…….”

레이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랫동안 자라는 모습을 지켜봤으니까, 가끔은 정말 자매같이 느껴졌어요.”

레이나가 고개를 숙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가씨 닮았다는 소리를 종종 들어서 더 그랬나?”

“…….”

레이나가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어갔다.


“저 아가씨도 좋아해요.”

“…….”

“그런 방식으로 파혼해 주신다는 말……. 아가씨로서도 쉽지 않았을 텐데 고맙구요.”

“…….”

“아가씨도 당신도 큰 피해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레이나가 미소 지었다.


“해 보고 싶어요.”

“…….”

아서가 침묵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찬성해 줄 것 같지 않았다.

레이나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솔직히 처음으로 진지하게 당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제안이었어요.”

“…….”

“처음으로 당신하고……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건가. 진짜 그래도 되는 건가.”

“…….”

“저 솔직히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멍하고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

“이제야 당신…… 좋아해도 되는 건가 싶고. 그래요.”

“…….”

레이나는 조금 자신 없는 눈빛으로, 하지만 마음과 의지가 분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해 보고 싶어요.”

“…….”

조용한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그는 끝내 긴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어깨에 툭 이마를 갖다 댔다.


“…….”

레이나가 순간 숨을 멈췄다.

아서가 조금 피로하고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랑 다른 여자 얘기 좀 그만하고 싶다.”

“…….”

“……당신이 있으면 다른 생각은 들지도 않는데. 그런 건 나뿐인 것 같군.”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가 담고 있는 어딘지 짙은 느낌에 레이나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뒤늦게 지금 상황이 미묘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와 닿아 있는 부분이 갑자기 의식되며 긴장이 되었다.

레이나가 당황스럽게 손가락을 꿈질거렸다.

횡설수설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죄, 죄송해요. 주무시는데 제가 갑자기 깨워서……. 꿈에…… 놀라서.”

정신이 없었어요, 하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아서가 고개를 들고 그녀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아니, 괜찮아. 좀 놀라긴 했지만.”

아서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쓸어 주며 물었다.


“나쁜 꿈 꿨어?”

“…….”

레이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의 손가락이 스치는 곳에 간질간질 전류가 흐르는 것 같다.

기분이 이상해.

그의 웃는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온몸이 구름처럼 붕 뜨는 느낌이었다.

……조금 전까지 어떻게 멀쩡하게 대화하고 있었지?

새삼 그의 피로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못 견디게 유혹적으로 들렸다.

몸속 어딘가가 간지럽혀지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레이나는 다시 부끄럽고 도망치고 싶어졌다.

레이나가 빨개진 얼굴로 슬금슬금 도망치고 싶은 듯이 몸을 뒤로 빼자 아서가 웃으며 그녀의 등 뒤로 손을 깍지꼈다.


“같이 잘래?”

“…….”

그리고 레이나는 딱 몸을 멈췄다.

……와.

그의 눈웃음 한 번에 순식간에 달아나려는 의지가 사라졌다.

그저 멍해졌다.


“…….”

레이나가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벽난로의 불빛이 아른거리고, 잠에서 깬 그가 저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달아.

너무 달아서 죽을 것 같아.

세상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 레이나는 이미 그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레이나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러나 입맞춤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서가 멈추었다.


“…….”

그러더니 작게 웃으며 곤란한 듯 그녀의 쇄골에 머리를 묻었다.


“…….”

“…….”

아직 다 채워지지 않은 느낌이 망연하여 레이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더 하면 못 멈출 것 같다. 미안.”

그의 목소리가 나직이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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