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 줄리어스의 딸 (168/210)


#168. 줄리어스의 딸
2023.04.09.



 
레이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아서의 손을 끌고 조용한 위층으로 올라갔다.

창피해서 기절할 것 같았다.

아서의 입에서 나온 말도,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도 전부 흑역사 감이었다.

어쩌자고 그랬을까.

탁.

아서를 들인 뒤, 방 문을 닫고 돌아선 레이나가 새빨개진 얼굴로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아서의 시선이 침대 쪽으로 흘깃 움직여 있었다.

큰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황한 레이나가 소리쳤다.


“대낮이거든요?!”

“…….”

아서의 얼굴이 조금 머쓱한 기색이 되며 그가 스스로 목덜미를 만졌다.


“별다른 뜻은…….”

온통 붉어진 레이나가 전차 같은 기세로 성큼성큼 걸어가선 테이블 앞의 의자를 빼 주었다.


“여기 앉아 보세요.”

“…….”

아서가 얌전히 테이블 앞에 앉았다.

마주 앉은 레이나가 빨개진 얼굴로 아서를 바라보았다.


“저한테 아직 말 안 하신 거 있나 봐요?”

“…….”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아서가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파혼부터, 오러부터?”

“파혼부터요. 오러에 대해선 카일 황태자 전하께 들을게요.”

“…….”

마침내 아서가 털어놓았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에게 평화롭게 파혼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긴 했어. 하지만 그 제안은 말이 안 돼. 고려할 가치가 없는 제안이었어.”

“…….”

그야 그렇다.

평화로운 파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말이 안 되는 전제라고 생각했으니까.

아서와 크리스티나에겐 언론과 대중의 시선이 집중돼 있어서 파혼 정도의 중차대한 사안을 평화롭거나 조용하게 처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레이나는 조금 더 침착해질 수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두 분 파혼은 양쪽 모두에 엄청난 피해일 테니까요.”

아서가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정했다.


“파혼으로 입을 피해 때문이 아니야.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제시한 조건이 말이 안 됐어. 그쪽과의 파혼은 내 문제인데, 대가로 당신에게 속한 권리를 포기할 걸 요구했으니까.”

내게 속한 권리?

레이나가 멈칫하고 아서를 바라보았다.

아서의 말이 이어졌다.


“그쪽 제안이 아니어도 파혼은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당신이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제안을 고민할 필요는 없어. 그건 헛소리야.”

“…….”

또 혼자 감당하려고 한다.

당신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고 그랬을 거라는 카일 황태자의 말이 맞았다.

레이나가 죄책감을 느끼며 말했다.


“……아서. 그건 불공평해요. 당신 결혼이 잘못된 건 제 책임도 있잖아요.”

“…….”

“아가씨가 뭘 요구했는데요?”

“…….”

아서가 짧은 틈을 두고 답했다.


“당신이 줄리어스 가문에 ‘릴리 아스타린의 딸’로서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 맹세하면 당신을 후작의 친딸로 입적하겠대. 그리고 자기는 물러날 테니 당신이랑 살라더군.”

레이나의 얼굴이 멍해졌다.


“……네?”

“당신을 내 아내로 인정하고 신부 교체에 대해 침묵하는 대신, 자신은 ‘줄리어스의 후계 권리를 가진 자유로운 미혼 딸’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레이나가 말을 잃고 그를 쳐다보았다.

‘릴리 아스타린의 딸’로서의 권리?

그게 무슨…….

아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 년 전 일과 별개로 결국 그쪽이랑 다시 약혼한 건 나야. 파혼은 나하고의 거래인데 당신이 포기할 게 있는 건 옳지 않잖아. 다른 파혼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레이나의 눈이 점점 커졌다.


“…….”

아서가 얼마 전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러에 대해 알려달라는 레이나의 말에 그가 했던 대답이었다.


「돌아가신 당신 어머니가 선대 후작의 혈육이었어. 후작하고는 이복누이 관계지.」

 
……그게 정말이란 말이야?

레이나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서가 이야기는 해 주었지만, 그게 사실이라는 실감은 나지 않았었다.

당신은 전혀 짚이는 게 없냐는 말에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몇몇 순간들이 떠올랐어도, 확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설령 사실이어도 변할 것은 없을 거라고 여겨졌다.

드높은 대귀족가의 벽이 그런 사소한 논란 하나에 흔들릴 일은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실과의 혼인 계약, 부실 보급, 아서의 위치, 그리고 선제후가 되어 급부상한 줄리어스 후작의 아슬아슬하고도 까마득한 입지를 생각하자, 정말로 자기 한 사람의 존재로 가문이 휘청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

흘려들었던 말이 뒤늦게 유의미하게 느껴졌다.

사생아가 아니라 후작을 위협할 수 있는 혈통이라는 말.

그럼 이 사람은 그 제안을 듣고, 내가 이제는 이걸 알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이야기해 준 거였나?


“아가씨는…… 그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

“최근에 알게 된 것 같더군. 며칠 전에 갑자기 찾아와서 제안했어. 대부인과 무슨 대화를 나눴을지도 모르지. 우린 대부인의 저택에 머물고 있었으니까. 당신 할머님을 보고 대부인도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고.”

“…….”

레이나의 머릿속에, 하녀들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던 이상적인 대부인 패트리시아 줄리어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분이 이상했다.

복도에서 자신과 할머니를 마주치고서, 대부인이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

레이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게 정말이라면…….


“……제가 요구할 만한 권리를 다른 방법으로 보장해 줄 테니 후작가와 진흙탕 싸움을 하지 말자는 얘기인가요?”

“맞아.”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할 법한 제안으로 느껴졌다.

자신에게도 받아들일 만한 제안으로 생각됐다.

조용히 숨죽이고 살아야겠지만…….

원래도 그렇게 살았고, 어차피 내가 이 집안 혈육이라고 권리를 주장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걸.

할머니도 원하지 않는 일.

애초에 레이나는 권리를 다툴 생각도 없었다.

물욕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런 일에 얽혔다간 목 달아나기 십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귀족가와 혈통 분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극소수다.

힘없는 개인이 대귀족의 권력에 욕심을 부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 걸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밑바닥을 쳐서 두려울 게 없거나, 최소한 조용히 제거당하지 않을 정도로는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는 사람뿐이었다.


“…….”

하지만 그 위험을 감수해 이 사람 곁에 머물 수 있다.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거짓말도, 꿈도 아니었다.

전부 현실이었다.

그리고 레이나는 아서가 자신과 할머니를 지켜 줄 것을 믿었다.

펄 공작 부인도. ……그리고 황태자 전하도.

아서가 정말 피해를 입지 않을 수만 있다면…….


“…….”

하지만 내가 후작님의 딸로 입적되는 걸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지 않나?

기자들이 알아챈다면 오히려 더 시끄러워질 텐데…….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눈앞에 예상되는 헤드라인들이 펼쳐졌다.

【 경악! 모 귀족가에 비밀리에 입적된 레이디! 남편은 엄청난 유명인으로…… 】

【 대 귀족가, 자매 사이의 한 남자?! 그들의 혼인에 무슨 일이?! 】

아서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다음 말을 털어놓았다.


“……당신이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되는 거야. 그쪽이 새로 입적하는 레이나 줄리어스가 되겠대.”

레이나가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네?”

아서가 말했다.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했잖아. 파혼할 방법은 많아.”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부실 보급. 사기 결혼. 황실 모독…….


“잠깐만요.”

레이나가 그의 팔을 잡았다.


“…….”

“당신이 생각한 파혼 방식은, 당신과 기사분들이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방식 아닌가요?”

“…….”

아서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대답이 되었다.

아서는 크리스티나와의 혼인 유지나 후작의 허락 없이도 가문을 계승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아서가 유리한 계약서를 빌미로 줄리어스를 배제한 채 그 가문을 먹어 치울 경우, 사생아인 그가 결코 정상적인 평판을 유지할 수 없을 거라는 거였다.

혼인에 대한 아서의 고발은 줄리어스에 재기 불능의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줄리어스가 황실의 사생아에게 가문을 도둑맞았다며 소송을 감행한다면, 어느 쪽도 온전한 승자가 되지는 못할 것이었다.

영주가 정상적으로 사교 활동을 할 수 없다면 영지는 당연히 모든 사업에 큰 피해를 입는다.

줄리어스의 징집병들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티나는 양쪽 모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공존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로 준비하고 있었어. 괜찮아.”

“…….”

“당신은 나서지 않아도 돼. 당신 끌어들이지 않고 나 혼자 파혼할 수 있어.”

“…….”

레이나는 사기 결혼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이었다.

하지만 아서가 정말로 레이나와 미래를 염두에 둔다면, 레이나는 아서와의 혼인에 줄리어스의 강요가 있었다고 증언할 수 없다.


“…….”

내 증언이 없다면 몇 배 더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레이나는 혼란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이내 마음을 정한 듯 그를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 * *

오러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그의 눈, 그의 상처, 오러가 그의 몸에 미치는 영향.

아서가 말하지 않은 그 모든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서는 황실의 기밀을 말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대답을 피하니, 황태자에게 물어볼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레이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오러’가 무엇인지를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 * *

공간이 느껴졌다.

그리고 공기의 흔들림과 온도도 느껴졌다.

사람의 체온.

시가 끝에 붙은 작은 불.

사람의 몸속으로 들이쉬어졌다가 내쉬어지는 공기의 흐름.


[…….]

금속과 유리는 나무보다 차가웠고, 티포트에 담긴 물은 찻잔에 담긴 물보다 뜨거웠다.

불의 기운을 품고 공기를 대류 시키며 위로 올라가다가 열기를 잃으며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은 담배 연기였다.

목소리가 들렸다.


[법적으로야 저의 동의 없이도 떠나실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상처가 없을 순 없으시죠.]

[전 당신이랑 그 애가 상처 없이 떠날 수 있게 협조해 드릴 수 있어요.]

[저로서도 큰 싸움이 일어나는 건 바라지 않아요. 지금의 ‘줄리어스’가 위험 부담을 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

[당신도 지켜야 하는 게 많은 사람이니 이해하실 것 같은데요.]

크리스티나 아가씨.


[평화롭게 보내드리는 대신 저희에게 평화를 약속해 주시는 거, 어때요?]

잠자코 듣고 있던 아서가 물었다.


[당신이 바라는 건?]

크리스티나가 서운하다는 듯이 ‘웃었다.’


[바로 바라는 게 뭔지 묻는군요? 좀 섭섭하네요.]

[난 당신이 맘에 들었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크리스티나는 그저 인사치레였다는 듯, 산뜻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약속받고 싶은 건 줄리어스 가문이 ‘줄리어스의 피’로 이어지는 거예요.]

[저로서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어야 하잖아요?]

[레이나야 우리랑 피가 이어진 사이니 괜찮지만, 당신이 전혀 엉뚱한 여자를 데려와서 가문을 이으려고 하면 우린 어떡해요?]

크리스티나의 말은 사뭇 합리적으로 들렸다.


[제 조건은 이거예요. 레이나가 ‘릴리 아스타린’의 딸로서 줄리어스 가문에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안토니오 줄리어스’ 쪽의 정통성을 인정할 것.]

[그 대가로 레이나는 아버지의 친딸이 될 거예요.]

[달리 말하지요. 레이나는 받아들일게요. 그 애를 아내로 두고 살아도 좋아요.]

[당신도 그 애가 마음에 드는 것 같고, 저도 레이나는 좋아하니까.]

[하지만 다른 여자는 안 돼요.]

[‘줄리어스의 딸’, 다시 말해 제가 아니면 레이나.]

[당신은 그 외의 여자하고는 결혼할 수 없어요.]

[그리고 줄리어스의 핏줄만 줄리어스의 후계자가 될 수 있어요.]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평화로운 파혼, 혹은 신부 교체에 협조하겠어요.]

[제가 제안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어때요?]

크리스티나가 턱을 괴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저에 대해 조사해 보셨다면 제가 그 애를 여러 번 보호했다는 것도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

[레이나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전 그 애를 소중히 생각한답니다.]

 

 

* * *



“…….”

레이나는 퍼뜩 눈을 떴다.

떠오른 잔상은 마치 실제로 본 것처럼 생생했다.

아서가 애용하는 시가.

크리스티나의 웃는 모습.

하나하나가 눈앞에서 본 것같이 느껴졌다.


“…….”

레이나는 자신이 ‘실제로 있었던 과거의 일’을 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