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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분노의 고백 (167/210)


#167. 분노의 고백
2023.04.06.


크리스티나 줄리어스한테 돌아온 게 아니야.

난 당신한테 돌아온 거야.


“…….”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고백에 멍해지면서도 레이나는 동시에 넋이 나가는 기분이었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테일러랑……. 뭐라구요?”

“…….”

아서는 레이나의 의심스러운 듯 달갑지 않은 표정과 반문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자신이 없어졌다.

당장이라도 그녀가 자신은 할머니와 테일러에게 돌아가야 하니 당신하곤 함께할 수 없다는 말을 할 것 같았다.

황제 앞에서도, 황후 앞에서도 이렇게 자신 없었던 적이 없는데.

그녀에게 매달려 있는 자신의 모든 마음을 다 드러냈는데 받아들여지지 못할까 초조했다.

그에겐 더 이상 내세울 것이 없었다.

이미 재산 서류도, 작위도, 그와 함께하면 감당해야 할 위험도 다 보여 주었다.

아서는 자신 없는 태도를 보이고 싶지 않아 호흡을 느리게 조절하려 애썼다.


“……나한테는 기회 안 줬잖아.”

“네?”

아서가 단호하게 레이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테일러 로렌슨에게 주기로 한 반년. 그거랑 같은 기회, 나한테도 줘. 나도 같이 고민해. 내가 두 번째여도 괜찮아.”

아서는 침착해 보이려고 애썼다.


“…….”

레이나는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

아니……. 정부라도 되겠다는 거야? 당신 같은 사람이?

대체 세상 어느 여자가 당신 같은 남자를 두 번째로 둘 수 있단 말인가.

순식간에 당신이 세상 전부가 돼 버릴 텐데.

아서는 침착하고 단호하게 미친 소리를 이어갔다.


“난 몰래 만나도 괜찮아. 당신 곤란하게 안 할게.”

“…….”

아서의 얼굴에 어쩌지 못하는 초조함이 나타났다.

레이나가 대답하지 않자 더 애가 타는 듯했다.


“내가 싫지는…… 않은 거지?”

“…….”

레이나가 그 말에도 대답하지 않자 아서는 결국 조급하게 대답을 졸랐다.


“……싫어?”

레이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걸로는 보이지 않는 거야?


“제가 왜……!”

레이나는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검지를 들어 위층을, 그들이 뜨거운 밤을 보낸 침실 쪽을 가리켰다가 어쩔 줄 모르고 바닥을 가리켰다가, 다시 침실 쪽을, 그리고 그들이 입맞춤했던 조리대 쪽을 황망하게 가리켰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여기저기 바쁘게 오가는 손가락이 정신없이 바빴다.


“……제가 왜…… 왜 그랬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

아서가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 되었다.

레이나는 점점 빨개지면서 울컥 입을 열었다.


“당연히, 당신이 좋…….”

그런데 목에 턱 걸린 것처럼 그 말이 나오질 않았다.

레이나의 얼굴이 공기가 부족한 것처럼 빨개졌다.

레이나가 다시 숨을 삼키고 더듬거렸다.


“당신을, 내가, 좋…….”

“……?”

레이나는 당황했다.

말이 안 나와.

레이나는 점점 더 새빨개졌다.

무슨 거창한, 사랑한다, 결혼하자, 영원히 함께 하자도 아니고 그냥 좋아한다.

그 별것 아닌 솔직한 말 한마디가 나오질 않았다.

심지어 이미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은 몇 번 비슷하게 한 적도 있는 것 같은데.

그가 제 마음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좋아한다는 말의 의미가 심각하게 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 말을 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레이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를 쳐다보았다.

자기 마음을 말로 드러내기가 너무 부끄러웠다.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상기되었다.

왜 이런 말을 해야 아는 거야?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

받아준 기분이 들었다면서.

그것도 모르면서 나랑…… 그랬단 말이야?

두 번째도 괜찮다고 바보 같은 말이나 하면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

레이나의 눈이 촉촉해진 걸 보고 당황해 굳어진 아서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이…… 바보…….

테일러한테 그 말 할 때는 들었으면서.

왜 어젯밤에 한 말은 못 들은 건데.


“…….”

레이나는 눈물이 그렁해진 눈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발돋움하며 그의 목을 끌어당겨서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대단히 로맨틱한 입맞춤은 아니었다.

레이나는 눈을 감고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힘주어 눌렀다.

도장이라도 꾹 찍는 듯 멋없는 입맞춤이었다.

그러고는, 간신히 입술을 떼고 나서 빨개진 얼굴로 원망스러운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

아서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이나의 눈 안에서 뭔가 발견할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뚫어져라.

그 선명하면서도 바보 같은 시선에 괜히 서러워졌다.

왜 보면서도 모르는 거야?

레이나는 그를 보면서 힘주어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좋아한단…… 말이에요!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요!”

“…….”

아서가 레이나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교차했다.

그는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아서는 스스로의 마음을 꾹 억누르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레이나의 복장을 뒤집었다.


“……어떤 이유로 받아줬든 상관없다고 했잖아. 거짓말할 필요는 없어. 난 당신 마음이 동정심이어도 괜찮아.”

“……?”

아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남자를 진심으로 질투하는 얼굴로 레이나를 응시했다.

그녀가 그런 식으로 다른 남자를 받아주는 건 상상만 해도 싫다는 듯이.


“당신이 마음 약한 건…… 내가 익히 알지. 하지만 불쌍하다고 아무나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레이나가 새빨개지더니 다시 손가락으로 위층 어딘가를 가리켰다.


“당신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동정심 때문에 그……그럴 것 같아요?”

“…….”

아서는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나가 상기된 얼굴로 씩씩거렸다.


“당신 좋아한다구요! 진짜라구요! 근데 당신이 뭐가 아쉬워서 바보같이 두 번째여도 괜찮다고 그런 모자란 소릴 해요?”

“…….”

레이나의 안에서 아서는 소중하게 지켜 온 성역이었다.

하녀 다락에서 밤새도록 분노의 반박 논설을 쓰던 시간들이 아직도 생생했다.

아서 자신이라 해도 그를 깎아내리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레이나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세상에 당신을 두 번째로 둘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당신이야말로 세상 누구한테도 그런 말 마세요! 상대가 크리스티나 아가씨여도, 황녀님이든 황후님이든 마찬가지예요!”

“…….”

레이나가 소매로 눈을 문질렀다.

화가 나서 흥분으로 눈물이 찔끔 난 것 같았다.


“그리고 왜 당신이 멋대로 내 마음을 동정심이라고 정해요?”

“…….”

레이나는 붉어진 얼굴로 반발했다.


“당신이 뭐가 불쌍해? 당신이 얼굴이 모자라? 권력이 모자라, 돈이 모자라? 사생아? 그게 뭐 어때서! 당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

저도 모르게 본심이 넘쳐흘렀다.

레이나의 얼굴이 흥분으로 새빨개져 있었다.

마음 약하고 늘 쩔쩔매며 상황에 휩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그 순간 더없이 자기 주관이 뚜렷해 보였다.


“왜 이렇게 바보가 됐어요!”

“…….”

아서의 눈빛이 서서히 바뀌었다.


‘……?’

레이나는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만히 그녀를 보는 아서의 눈빛이 진지한 것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순간적으로 감동했거나 찰나의 감정에 휩쓸린 듯이 충동적으로 보이면 걱정이 안 될 텐데.

저 표정은 마치…….


“파혼할게.”

“악!”

레이나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아서가 침착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서는 제 입을 막은 레이나의 손을 깍지 껴 잡더니 그 손목에 입맞췄다.

레이나가 했던 것과 달리 그의 접촉은 감각적이고 관능적이어서, 레이나의 얼굴은 머리끝까지 새빨개졌다.

레이나는 다급하게 손을 당기고 그의 손을 꽉 잡았다.


“하지 마세요.”

파혼 그거 아니야.


“…….”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묵묵히 제 눈을 바라보는 그가 완전히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이 흔들리는 것도 싫었다.


“다, 당신 아내가 될 순 없다고 했잖아요. 아시잖아요. 사교계에서 당신 입지가 어떻게 되겠어요?”

그리고 다음 순간.

똑똑.

테이블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며,


“저기…….”

엉뚱한 곳에서 제삼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향했다.

부엌 쪽으로 난 뒷문으로 들어온 카일이 미안한 눈썹을 하고는 두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실례합니다, 레이디. 오랜만이네요.”

카일이 웃음을 참으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미안, 아서. 중요한 대화 중에 끼어들어서.”

“…….”

카일은 항복하듯 들었던 두 손바닥을 짝 소리나게 마주치며 말했다.


“밖에서 들었는데 내가 끼어드는 게 두 분 사이의 아름다운 결말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

“…….”

자기가 내내 뭐라 소리쳤는지 하나씩 떠올린 레이나의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밖에 다 들렸다고?

황태자 일행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순간 그걸 다 잊고 아서와 소리를 높이며 옥신각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화덕이나 쥐구멍에 숨을 틈은 없었다.

이어진 카일의 목소리가 레이나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서가 말 안 한 것 같은데.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아서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방식의 평화로운 파혼을 제안했습니다. 몇 가지 조건을 걸긴 했는데…… 아무튼. 그것 때문에 저 위쪽에선 한바탕 뒤집어졌어요.”

“…….”

레이나의 눈이 커졌다.


“……네?”

아서가 흠칫했다.


“카일.”

아서가 당장 카일 쪽으로 걸어가 그 입을 막으려 했지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호다닥 달아나는 카일의 입이 더 빨랐다.


“그리고 레이디. 아서에게 당신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안색이 변한 아서가 순식간에 카일을 붙잡고 그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하지만 카일이 얼른 아서의 손을 밀쳐내며 입을 빠르게 나불댔다.


“사교계 입지가 문제가 아니에요. 오러는 각인된 반려가 곁에 머물러 주지 않으면―.”

아서가 기어이 카일의 멱살을 쥐고 그의 입을 물리력으로 틀어막았다.


“입 다물어.”

“…….”

카일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카일 황태자는 씩 웃으며 놀란 레이나에게 윙크했다.

그리고 입이 막힌 채로 웅얼거렸다.


“이만 닥칠게요. 나머지는 두 분이 진솔한 대화 나누시고 아름답게 해결 보시길.”

“…….”

카일이 웃는 낯으로 레이나를 보며 아서의 어깨를 툭 짚었다.


“물론 이 자존심 높은 아서가 그것 때문에 당신에게 두 번째여도 좋다는 소릴 하는 건 아닐 겁니다. 오해하지 마시고 헤아려 주세요. 말하지 않은 이유는 강요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테니까.”

“…….”

카일이 킥킥대며 웃었다.


“아서가 생각보다 로맨티스트네요. 속 터지긴 하지만.”

“…….”

그리고 황태자는 요령 좋게 이복형제의 결박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

카일은 짧은 텀을 두고 아서를 향해 웃었다.


“……오러에 대해선 좀 더 할 말 남았어. 그건 나중에 하자. 덜 중요한 얘기니까.”

“…….”

아서가 이를 악물었다.


“카일. 그건 황실 기밀…….”

“어차피 배우자에게까지는 오픈되는 기밀이지. 난 인정한다, 저분.”

“…….”

“대화 잘하고.”

“…….”

카일이 유쾌하게 대답하고 뒷걸음으로 몸을 물렸다.

아버지의 또 다른 사생아가 살리아에 있었을 가능성 따위.

어쩌면 어머니가 그를 두고 꽤 잔인한 ‘오러 실험’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따위.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내 어머니의 일은 내가 해결해야지.

아서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상의해야 할 정도로 무능하진 않으니까.

이 정돈 내 선에서 해결할게.

카일은 속내를 감추며 웃었다.


“생각보다 빨리 기자들이 붙었어. 나도, 네 최측근 기사들도 자유롭지 않아. 전부 감시 속이라고 봐야 해. 떨쳐내고 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너를 못 챙긴 이유에 대한 변명을 이것으로 갈음한다.”

“…….”

카일은 모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아서의 혼인.

처음에는 엉망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일은 뒷문 쪽에서 둘이 소리쳐 다투는 걸 들으며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와 저 사람 사이에서 마음을 정했다.

카일이 레이나에게 예의를 갖추어서 인사했다.


“실례 많았습니다, 레이디. 그럼 저는 나중에 다시 올게요. 중요한 이야기 잘 나누세요.”

“……황태자 전하.”

“다음에 만날 땐 정식으로 당신을 소개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

그리고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뒷모습을 보인 채 손을 흔들며 문을 열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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